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8월 13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6 위로의 근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
이해인 수녀의 ‘작은 위로’라는 시를 읽어드리겠다.
잔디밭에 쓰러진
분홍색 상사화를 보며
혼자서 울었어요
쓰러진 꽃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하늘을 봅니다
비에 젖은 꽃들도
위로해주시구요
아름다운 죄가 많아
가엾은 사람들도
더 많이 사랑해주세요
보고 싶은 하느님
오늘은 하루 종일
꼼짝을 못하겠으니
어서 저를
일으켜주십시오
지혜의 웃음으로
저를 적셔주십시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재난과 사고의 소식들을 듣는다. 위로 받고 위로해야 할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세상이다. 유대력으로 이번 주는 샤밧 나하무(נחמו), 위로의 안식일이다. 지난 주가 티샤 베아브, 성전이 두 번 파괴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슬픈 날이었기에 유대인들은 이번 주부터 새해가 오기까지 7주간 선지자들의 위로의 말씀을 읽는다. 그 첫번째 말씀이 이번 주 하프타라인 이사야서 40장 말씀이다. 사 40:1-2,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히브리어로는 “나하무, 나하무 암미(נחמו נחמו עמי)”로 시작되는데, 직역하면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이다. ‘나하무’란 동사가 두 번 반복된 것은 성전이 두 번 파괴된 것에 대해 두 번의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유대인들은 해석한다. 여러분은 힘들 때 누구에게 위로를 받는가? 무엇을 통해 위로를 얻는가?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한 위로를 통해 역사의 비극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민족이 되었는지 살펴보며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의 근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고자 한다.
이번 주 토라포션은 모세의 기도로 시작된다. 신 3:23-25,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모세의 심정이 느껴진다. 모세는 광야 40년간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단강 앞까지 인도했다. 하나님이 그의 조상들에게 약속했던 땅을 코 앞에 두고 모세는 얼마나 그 땅에 들어가고 싶었을까? 그런데 모세는 그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신 3: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참 슬프다. 모세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거절이었다. 모세가 얼마나 서운했을까? 성경에서 슬픈 장면들이 많지만, 이것이 가장 슬픈 장면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거절 당한 이 이야기를 위로의 안식일, 샤밧 나하무에 읽는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그들에게 위로가 될까?
이번 한국에 나갔을 때 장모님께서 질문을 하셨다. ‘이서방, 모세는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나?’ 그 때 나는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므리바 사건에 대해 말씀드렸다. 그런데 이번 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새로운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가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그에게 마지막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마지막 사명이 뭘까? 신 4: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여기서 ‘이제’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히브리어로 ‘앗타(עתה)’인데 ‘이제부터는’ 이란 뜻이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 기도가 거부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들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을 가르치는데 온 힘을 쏟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부여하신 그의 마지막 사명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쉐마’다.
모세는 이제 유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친다.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다”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누 아도나이 에하드(שמע ישראל יהוה אלהינו יהוה אחד)” 이 말은 유대인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가장 먼저 가르치는 말이다. 또한 이 말은 유대인들이 죽기 직전 암송하는 말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지금도 매일 하루 두번씩 이 말씀을 암송한다. 유대인들의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매일 그들의 전 인생을 지배하는 가르침이 바로 ‘쉐마’인 것이다. 이 구절을 자세히 보면 히브리어 알파벳 아인(ע)과 달렛(ד)이 다른 글자보다 크게 씌어져 있다. 두 자를 합하면 에드(עד)라는 단어다. ‘증거, 증인’이라는 뜻이다. 유대인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라는 것이다.
모세는 비록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쉐마’의 가르침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성전은 파괴되고 사라져도 쉐마는 유대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게 되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이 파괴되어 포로로 살아야 하는 비극 속에서도 쉐마를 암송하며 위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도 하루 두 번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누 아도나이 에하드”라고 외쳤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다” 이것은 포로 중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자신들은 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위로하라’라는 명령형 ‘나하무’는 ‘나함(נחם)’이란 동사에서 온 말인데, 이는 한 숨 쉬다’라는 뜻이다. 큰 상실을 경험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내 상황과 처지 때문에 같이 한 숨 쉬는 모습에서 위로를 얻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통해서도 위로 받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진정한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온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서 들려올 때 우리는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쉐마 이스라엘’, ‘들으라 이스라엘’이라고 다음 세대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말한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세상은 변하고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소망의 말씀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도 세상은 성공과 번영을 위해 계속해서 우상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 한 분을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며 그 분의 말씀 듣기를 구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는 가나안 땅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다음 세대들이 여호와가 유일한 신인 것을 고백하길 원했다. 왜냐하면 바알은 인간의 갈망을 결코 채워줄 수 없는, 그 땅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우상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여러분의 매일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욕망을 따라 만들어내고 섬기는 우상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이라는 분명한 선포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단지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시는 삶을 살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들음을 통해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를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를 얻는 자는 강하다. 세상이 그를 흔들 수 없다. 왜냐하면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는 한 서기관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다. 막 12:29-31,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예수님도 ‘쉐마’의 말씀을 아셨다. 그래서 ‘쉐마’가 첫번째로 중요한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이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더하셨다. 이것은 레위기에서 인용하신 것이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눈에 보이는 이웃부터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을 우린 살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를 포함하여 이 세대를 상징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각자도생 (各自圖生)’이다. ‘각자 살 길을 스스로 도모한다’는 뜻이다. 코로나로 내일이 불안한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너도 나도 각자 살 길을 찾느라 분주하다. 이제 ‘각자도생’은 본인만 살겠다는 이기적인 선택이 아닌, 필연적 흐름이 된 느낌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하루 하루의 위로다. 위로 없이 생존을 위해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위로의 근원이 되는 것은 바로 이웃 사랑이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사랑이 없어 각박해 질수록 우리는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우리를 도전한다. 요일 4:10-12,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형제 자매를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질 때 우리는 서로 위로를 받는 것이다.
지금까지 위로의 근원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위로의 근원 첫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위로의 근원 두번째는 이웃 사랑이다. 간략하게 위로의 근원 한 가지를 더 살펴보고자 한다. 마 23:38-39,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선포하신 말씀이다. 유대인들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기 전까지 그들은 위로 없이 남아있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진정한 위로의 근원은 이미 오신 예수님이시며, 장차 다시 오실 그리스도이시다. 메시아가 다시 오실 때 그분을 왕으로 믿으며 기다린 자들의 위로가 완성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주실 위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위로를 다 경험할 수 없다. 우리가 받아야 할 위로는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메시아가 다시 오셔서 완성하실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인 것이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쉐마의 가르침을 남겼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산다는 것이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 세대는 모세 없이도 쉐마의 말씀을 붙들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 사라진 뒤에도 쉐마의 말씀을 가지고 하루 두번씩 기도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와 소망을 얻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갔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위로를 얻는가?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의 신앙을 대신할 수 없다. 교회가 여러분의 신앙을 보장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겐 신앙의 선배들이 남긴 하나님 말씀이 남아있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는 위로의 근원이 되길 바란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옆에 있는 형제 자매를 사랑함으로 하늘의 위로를 함께 경험하게 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하나님이 부르신 백성을 위로하고, 위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