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8월 20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7 진짜 전쟁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신 7:12)
로마, 영국, 몽골, 네덜란드, 미국이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조건이 뭐였을까? ‘강자의 조건’이란 책에서 밝히는 그 조건은 ‘관용’이다. 저자는 이 나라들이 관용의 정신을 통해 다양한 민족들을 받아들이고, 그 민족의 뛰어난 인재들과 함께 기술 혁신을 이루어 강대국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번영의 조건에 대해 말한다. 오늘은 그것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신 7:12,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조건은 한 가지였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듣고 지켜 행하는 것이었다. 세상의 다른 제국들처럼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워 힘을 가진 나라가 되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이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의가 다른 민족들보다 뛰어나서도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다른 제국들과 비교해 볼 때 너무도 작고 보잘 것 없는 민족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작은 나라를 강하게 하시겠다고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다. 신 11:23, 25,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차지할 것인즉…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하시기 전 이스라엘에게 부탁하신 것이 있다. 그것은 작은 이스라엘이 강자로 남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두 가지만 살펴보겠다. 먼저 그들이 강자로 남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잊지 않아야 했다. 신 8:11-14,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 없이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했다. 마실 물도, 제대로 된 음식도 없어서 힘든 시절이었다. 적에게 공격을 받았던 때도 있었다. 그러한 어려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싸워야 했던 시험이었다. 그러나 이 모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 진정한 시험은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에서 있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워야 할 진짜 전쟁은 가난과 광야의 고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누릴 풍요였다. 이스라엘이 번성하느냐 멸망하느냐는 풍요의 때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제국들도 마찬가지였다. 풍요와 권력과 명성을 가졌을 때 하나님을 잊어버린 제국들은 자멸의 길로 갔다.
하나님은 이제 풍요의 땅으로 들어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다. 신 8: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풍요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잠재우는 늪이 되어선 안되는 것이다. 성공이 하나님의 손을 놓고 혼자 달려가는 경주가 되어선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풍요의 때 하나님을 잊어선 안된다.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장만하고, 소유가 다 풍부한데, 한 가지, 하나님을 잊고 산다면 우리는 돌이켜야 한다. 세상에서는 물질을 많이 소유한 자가 강한 자처럼 보이나, 정말 강한 자는 하나님 한 분을 소유한 자이다. 그분의 강한 손과 편 팔을 의지하는 자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강자로 남기 위한 두번째 조건은 정의와 사랑을 행하는 것이었다. 신 10:17-19,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모세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다.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는 분이다.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을 묘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도 하나님처럼 행하라는 도전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행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뭘까? 그것은 연약한 자에 대한 관용이다. 우리가 관용으로 이웃을 섬길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군림하는 자가 강한 자처럼 보이겠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 나라의 통로가 되는 자가 강한 자인 것이다. 사람들이 부와 권력을 쥐게 될 때 그들은 더 이상 가난한 사람과 약자를 돌보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부와 권력이 당연히 누려야 할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청지기처럼 잘 사용하라고 주신 부와 권력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게 될 때 인생의 위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소유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셨다. 신 9:5-6,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부와 권력이 따를 때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목이 곧은 자인지 아신다. 그럼에도 우리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펼쳐가시려고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통로가 되어 나그네를 사랑하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신 7:12)라고 약속하셨다. 여기서 인애는 히브리어로 ‘헤세드’다. 헤세드는 상대방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베푸는 사랑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바람난 아내 고멜을 데려와 다시 그 여자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왜일까? 그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지만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헤세드를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호세아가 바람난 아내를 참고 데려왔듯이 하나님은 바알과 바람난 이스라엘을 참고 기다리시면서 헤세드를 베푸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인 헤세드가 언약백성의 삶에도 그대로 드러나길 원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헤세드의 삶을 사는데 실패한다. 호 6: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회 공동체 안에 ‘인애’, 즉 헤세드가 사라진 것을 탄식하셨다. 헤세드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처럼 그 공동체 안에 희미해진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문자적으로는 잘 지켰다. 십일조를 드리고 안식일을 지키고 하루 세 번의 기도도 잘 드렸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헤세드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할 때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비판했다. 그 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인용하셨다. 여기에서 표현된 ‘긍휼’이란 단어가 바로 ‘헤세드’를 번역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헤세드가 무엇인지 가르치신 것이다. 헤세드는 받을 만한 자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까지 베푸는 사랑인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처럼 우리가 헤세드의 사랑을 하기 원하신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끌어안는 사랑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 해주기 때문에 나도 그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니라, 그 사람이 받을 자격이 없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 조건을 떠나 베푸는 사랑인 것이다. 이처럼 헤세드는 감정이 일어나서 하는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하는 사랑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언약 백성으로 부르신 그들의 삶에 하나님이 원하셨던 헤세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왔다고 안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에서 진짜 전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풍요 속에서 마음을 지키는 전쟁이며, 번영 속에서도 헤세드를 지키는 전쟁인 것이다. 우리가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면 우리는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도 헤세드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재난과 위기가 터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공존’보다는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살아가기 바쁘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강한 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주님처럼 인애를 베푸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강자의 조건인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이스라엘은 헤세드가 없어 멸망했다. 헤세드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직 그 사회에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점점 더 인애보다는 무자비함이 우선시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애를 가진 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은 성경을 많이 알고, 예배 빠짐 없이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 헤세드를 행하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헤세드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시기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시대를 탓하지 말고, 환경을 탓하지 말고, 사람을 탓하지 말고 묵묵히 헤세드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헤세드는 선택하는 것이다. 내가 손해보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우리는 무자비한 세상에 하나님의 인애를 베푸는 언약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무자비한 세상에서 인애의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구원 받은 백성들이 수행해야 할 진짜 전쟁인 것이다. 인애의 사람은 인종과 혈통과, 모든 증오와 경계를 넘어서는 사람이다. 그래서 인애의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인애의 사람을 축복하신다. 하나님은 인애의 사람을 통해 당신의 강한 손과 편 팔의 역사를 나타내기 원하신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인애의 사람이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강한 자로 살아가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