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8월 27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8 축복의 조건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신 11:26-28)
우리 삶에는 축복과 저주라는 두 개의 원리가 작동한다. 우리 중에 축복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축복된 삶을 살기 원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저주의 굴레를 다 벗어나지 못한 채 불행한 인생을 운명으로 여기며 살아 간다. 우리는 어떻게 저주가 아니라 축복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신 11:26,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이 구절은 한글 번역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르에(ראה)’라는 말로 시작한다. ‘르에’는 ‘보라, 주의를 기울이라’라는 명령이다. 축복과 저주는 우리가 어느 한 순간에 얻게 되는 결과물이 아니다. 우리가 오늘이라는 매일의 순간에서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축복 뿐만 아니라 저주도 우리 앞에 두셨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만 축복된 오늘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축복은 뭐고, 저주는 뭘까? 우리는 무언가 좋은 일이 내게 오는 것을 축복이라 생각한다. 또한 무언가 안 좋은 일이 내게 오는 것을 저주라고 생각한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축복과 저주의 정의는 좀 다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 나오는 모세의 말을 보자. 신 11:27-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히브리 본문을 직역하면 이렇다. “축복은 여호와의 명령을 듣는 것이다.” “저주는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않고 다른 신들을 따르는 것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축복과 저주는 우리가 단지 수동적으로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능동적인 선택을 통해 축복을 받을지, 저주를 받을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축복과 저주는 매일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운명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운명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느냐, 그 명령을 듣지 않고 우상을 따르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에 따라 축복을 받을 것인지, 저주를 받을 것인지의 여부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축복이냐 저주냐’는 신명기서에게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주제다. 모세는 그의 설교를 이렇게 마친다. 신 30: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그런데 신 30:15절을 보면 축복과 저주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신 30: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생명과 선(토브)’ ‘사망과 악(라아)’를 두신 것이다. 즉, 축복은 ‘생명과 선’과 동일시되고, 저주는 ‘사망과 악’과 동일시 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매일 선택하는 것은 ‘생명이야, 죽음이냐’ 라는 것이다. ‘선이냐, 악이냐’라는 것이다. 생명과 죽음, 선과 악처럼 극명히 대비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이것은 인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선택인 것이다.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한 나무는 생명과 관련되어 있고 다른 나무는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안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나무의 열매를 선택한다. 그것은 그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도록 유혹하는 뱀의 말에 그가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뱀의 유혹은 에덴동산 만이 아니라 지금도 매일 우리의 삶에서도 마주치는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선택했을 때 따르는 저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나무의 열매를 선택한다. 왜 일까?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세상 신의 말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율법의 조항을 잘 지키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고난을 당하며 떠도는 삶을 살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임의대로 말씀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공의’였다. 신 16:20,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원어로는 쩨데크, 쩨데크(צדק צדק), 즉 ‘공의’라는 단어를 두 번 반복하면서 ‘너는 그것을 뒤쫓으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정의와 공의의 모습이 사라졌음을 탄식한다. 사 5: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이 말을 원어로 보면 그 의미가 더 다가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정의, 즉 ‘미쉬파트(משפט)’를 바라셨는데, 도리어 포악, 즉 ‘미쉬파흐(משפח)’를 보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공의, 즉 ‘쩨다카(צדקה)’를 바라셨는데, 도리어 부르짖음, 즉 ‘쩨아카(צעקה)’를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손을 펴면 나도 너희에게 손을 펴겠다. 그리하여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이 명하신 미쉬파트와 쩨다카를 행하기 위해 아낌없이 손을 펴는 자에게 축복의 손을 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미쉬파트와 쩨다카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풍요와 번영을 약속하는 바알을 따라갔다. 나눔보다는 부의 축적을 위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망각한 삶이다. 내가 가진 모든 소유가 나의 것이라고 착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삶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해 부를 쌓는 삶의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뇌물을 받으며 판결을 굽게 했다. 판결적 정의, 미쉬파트를 행하지 않은 것이다. 부자와 고관들은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지 않고 자기 배만 불렸다. 분배적 정의, 쩨다카를 행하지 않은 것이다. 피흘림과 억울한 부르짖음이 가나안 땅에 점점 쌓여갔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고 만다. 한마디로 그들은 미쉬파트와 쩨다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놓쳤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올바른 판결인 미쉬파트가 사라지고, 공의로운 나눔인 쩨다카가 사라진다는 것은 한 사회나 국가의 멸망의 전조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정글과 같은 시장 경쟁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위기감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다. 이러한 시대에는 남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우선 나와 내 가족이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다. 여기에 교회의 위기가 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이 절박한 생존경쟁 때문에 뒷전으로 밀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좀더 벌고, 안정되고 난 그 다음에 신앙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위기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엿새 일하고 하루 안식하는 것이다. 내가 거둔 소득의 십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물질 만능주의에 빠지지 않고, 내가 가진 풍요를 나보다 더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이다.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위험한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신앙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돈을 추구할수록 우리는 상대적인 궁핍을 느끼며, 더 물질에 매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6:25, 33,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그의 의’는 바로 올바른 판결인 ‘미쉬파트’와 이웃을 위해 내 것을 나누는 ‘쩨다카’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할 때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미쉬파트와 쩨다카를 행할 때 모든 것을 더하시고 복을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인 것이다. 우리가 이웃을 향해 쩨다카의 손을 펼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해 축복의 손을 펴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맛보며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공의를 행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도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우리 육신의 생각 때문이다. 바울은 말한다. 롬 8:6-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을 따랐던 아담은 지식나무의 열매를 선택했다. 그것은 죽음과 악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담과 동일하게 마귀로부터 세번의 유혹을 받았을 때,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았다.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을 앞세워 육신의 생각을 자극하는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실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안에 하나님 말씀이 있어야 우리는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때 우리에게 생명과 축복이 열리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고백을 했다. 갈 2:19-2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는 비결을 발견했다. 그것은 육신의 생각을 십자가에 못박는 삶이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이다. 그것이 결국 축복으로 나아가는 조건인 것이다.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인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르는 것이 축복이다. 반대로 육신의 생각을 따라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이는 것이 저주다. 우리가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또한 성령의 조명을 따라 그 말씀을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한다. 축복은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축복은 내가 종교활동을 잘 한다고 오는 것도 아니다. 축복은 매일 내 육신의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