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9월 10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50 용서했는가?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신 23:7)
사람이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때 말이 많아지는 것 같다. 모세는 이번 주 토라포션에서 74개의 명령을 한다. 유대인들이 전체 토라에서 자신들이 지켜야할 명령으로 뽑은 것이 613개인데, 74개면 그 중 12%에 해당되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자유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길 원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74개의 계명 중 한 가지만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신 23:7,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왜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명령을 내리셨을까? 에돔 사람이 누군가? 애굽 사람이 누군가? 그들은 한마디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사람들이다. 에돔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에서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왕의 대로를 이용하게 해달라고 정중히 요구했을 때, 그 요청을 거절했던 백성이다. 에돔은 에서의 후예였다. 이스라엘과는 형제 관계였지만 그들은 냉정하게 이스라엘의 요구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 땅을 우회하기 위해 홍해까지 내려가야 했다. 네게브 광야를 지나가 본 적이 있는가? 홍해가 있는 에일랏까지 차로 가려면 광할한 네게브 광야를 지나야 한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길을 따라 에돔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마음이 상했다고 기록한다(민 21:4).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많이 죽게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 사람을 생각했을 때 증오심으로 이를 갈았을 것이다.
애굽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는 그들의 관계를 잘 안다. 모세 당시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아 그들의 삶을 괴롭게 했던 민족이다. 그들의 왕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강성해지자, ‘아들이 태어나거든 그 아이들을 나일 강에 던지라’고 명령했던 자다. 자 그런데 요단강 앞에서 모세는 다음 세대를 향하여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평생을 증오해도 모자랄 것 같은데, 무슨 이유에서 였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유를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자유로워지려면 미움을 버려야 한다. 그들이 과거 그들의 원수들을 계속 미워했다면 어떤 결과가 따랐을까? 랍비 조나단 삭스는 그 결과를 이렇게 말한다. “Moses would have taken the Israelites out of Egypt, but he would not have taken Egypt out of the Israelites.”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낼 수는 있었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애굽을 나오게 하진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노예로 애굽의 있었을 것이며, 쇠사슬이 아니라 마음의 사슬에 묶여 있었을 것이란 진단이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다음 세대들이 과거에 묶여 살기를 원치 않았다. 자신들을 괴롭게 했던 자들에 대한 원망과 증오를 버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여전히 과거에 묶여 현재의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모세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그들이 네 형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에돔은 에서의 다른 이름이었다.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그를 죽이겠다고 맹세한 때가 있었다. 그만큼 야곱이 미움 받을 짓을 했다. 그는 형의 장자권을 속여서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것은 에서가 장자의 권리를 가볍게 여긴 결과이기도 했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향해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다”(창 27:40) 라고 예언했다. 야곱과 에서, 두 형제와 그들의 후손 사이에 영원한 갈등이 있을 것임을 암시하는 예언이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이 무엇이었던 간에 이스라엘은 에돔을 미워해서는 안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형제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땅을 통과하려는 일이 거절당함으로 모욕을 받았지만, 그 일에 대하여 어느 때에라도 보복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워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의 죄는 괘씸했지만 죄인은 미워하지 않아야 했다. 과거를 기억해야 했지만, 그것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괴로움을 당한 상황 속에서도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모세는 또한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말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땅에서 객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매 칠년마다 종을 자유케 하고, 그들을 놓아줄 때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후히 주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명령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신 15:15,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 이러한 맥락의 명령은 이번 주 토라포션에서도 발견된다. 신 24:17-18,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신 24:21-22,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특히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너희들이 종으로 어려움을 당해봤기 때문에 너희들은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을 박해했던 애굽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종으로 사는 것에 대한 고통이었다. 그들은 과거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복수의 칼을 갈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 대신 그 때의 고통을 기억하며 다른 사람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정말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이제 과거의 피해자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것을 멈춰야 했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미움을 포기해야 했다. 얼마든지 미워해도 될 이유가 있었지만 미워하려는 의지를 접어야 했다. 그래야만 약속의 땅에서 여전히 과거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미래를 건설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몽상가의 비현실적인 명령이 아니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명령이다… 미움을 미움으로 갚으면 미움만 늘어날 뿐이고, 별이 사라진 밤을 더 어둡게 만든다. 어둠을 몰아낼 수는 있는 것은 어둠이 아니다. 빛만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미움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미움이 아니다. 사랑만이 미움을 몰아낼 수 있다.”
우리가 나를 괴롭게 한 형제나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역시 용서받은 자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베드로가 자신에게 죄를 진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줘야 하는지, 일곱 번 정도 하면 되는지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 18:22). 490번까지 하라는 말씀이다. 사실 우리는 누가 나를 한 번만 괴롭혀도 피의 보복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끊임없이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한 비유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다. 어떤 사람이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다. 아내와 자식을 팔아도 갚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사람은 주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했고,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의 빚을 탕감해준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자 빨리 갚으라고 윽박지른다. 백 데나리온은 만 달란트에 비하면 껌값이다.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말하는 빚진 동료를 그는 잡아 옥에 가둔다. 주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 그를 불러다가 말한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그래서 그 주인이 그가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넘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하시며 말씀하신다. 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용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용서받은 자라는 증거가 된다. 바울은 자신이 용서받은 자였기에 죄로 넘어진 형제를 용서하기로 결정한다. 용서가 그 사람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힘이 될 것을 그는 믿고 있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권한다. 엡 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 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우리 중 상처 받고 싶은 사람은 없다. 상처를 주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관계 속에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경험한다. 상대방이 내 분노의 뇌관을 건드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 안에서 폭발하는 것이 있다. 악독과 분노다. 그 사람을 비방하고 싶고, 어떻게 해서라도 보복하고 싶은 악의가 올라온다. 이럴 때 바울의 처방은 간단하다. 그런 마음을 버리라는 것이다. 서로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용서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지금 한번 여러분 자신을 돌아 보라. 나는 쉽게 분노하는 사람인가? 나는 자주 다른 사람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는 사람인가? 내가 남들보다 분노지수, 불만지수가 높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천성이 그렇다고 그대로 살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바울의 권면대로 그런 마음들을 버릴 수 있다. 옛사람의 천성을 새사람의 성품으로 바꿔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용서받은 자임을 기억할 때 상대방을 용서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용서하는 자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경험하는 자들이 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6:14-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는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음으로 그 사람에게 내가 받은 상처를 되돌려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용서하지 않는 것이 보복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그가 용서할 때까지 평생 원망과 원한의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과거를 떠나 보내지 못하고, 자신을 피해자라고 정의하며 여전히 피해자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결국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을 늘 피해자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분노와 원망, 증오를 안고 사는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괴롭게 한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용서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여러분의 가나안 땅에서 자유로운 미래가 시작되는 것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용서받는 자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로 종에서 자유자가 되었다. 그들은 애굽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들을 괴롭혔는지를 기억하며 그들을 미워하라고 구속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종에서 해방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들도 다른 사람을 자유케 하라고 부름 받은 것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형제가 나를 괴롭게 할 수 있다. 내가 기도 응답으로 알고 들어간 직장에서 상사가 바로처럼 나를 노예로 부려먹을 수 있다. 그러나 미움은 부름 받은 자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다. 가정에서 배우자가 내 분노의 뇌관을 건드리고 있는가? 참아야 한다. 교회나 직장에서도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미워하기를 멈춰야 한다. 용서와 사랑으로 앙갚음해줘야 한다. 우리는 주변 사람의 연약함 때문에 화가 나더라도, 용납하며 자주 자주 용서해줘야 한다. 그것은 나 자신 역시 실수하며 용서가 필요한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서로 용서하는 것만이 가정과 공동체의 분열을 일으키는 사단의 계략을 막는 것이다. 용서만이 가족의 해체, 공동체의 분열을 막고 새로운 삶을 건설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의 미래 약속의 땅에 미움과 증오를 달고 들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과거의 기억이 여전히 우리를 아프게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땅에서 사랑과 용서와 자유를 심고 가꾸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