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9월 17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51 공유된 기쁨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신 26:11)
유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 한 해가 지나가는 시점에서 우리는 한 해 동안 내 수고의 열매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 광야의 시간을 마감하고 이제 가나안 진입을 앞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다. 가나안 땅에서 거두게 될 소산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계명이다. 그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신 26: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땀 흘리며 수고하여 거둔 소산의 “첫 열매”, 비쿠림을 드리라는 계명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어느 지역에 있든지, 한 해의 소산을 거둔 후 그것의 처음 열매를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으로 가져가야 했다. 그곳은 여호와의 궤가 있었던 실로였을 것이고, 성전이 건축된 이후에는 예루살렘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 첫 열매를 제사장에게 주면서 하는 대사가 흥미롭다. 첫 번 째 대사는 이렇다. 신 26:3,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그들은 이 말을 하면서, 자신이 한 해 동안 땀 흘리며 경작한 땅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으로 주신 땅임을 기억하게 된다.제사장은 그들이 가져온 첫 열매를 받아서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게 된다.그 후 그들은 두 번 째 대사를 한다.신 26:5-10,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가나안 땅에서 그들이 그 땅에서 거둔 첫 열매를 바칠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그들은 이 열매가 있기까지 그들의 조상과 자신들이 겪었던 시련과 그 가운데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의식을 통해 400년이 넘는 그들의 역사를 집단적으로 공유하게 된다.
여기서 ‘방랑하는 아람사람’은 누구인가? 야곱이다. 그들의 조상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아람 땅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낸다. 집 없이 떠돌던 그가 다시 고국에 왔지만, 그는 또다시 애굽으로 내려가 살게 된다. 거기서 크고 강한 민족이 되었지만, 그로 인해 그의 후손들은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으로 오게 되었고, 거기서 땀 흘려 마침내 열매를 거두게 된 것이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기까지 그들에겐 기가 막힌 역사의 굴곡이 있었다. 그들의 처음은 나라 없이 떠돌던 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한 민족을 이루어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첫 열매를 드리며 함께 예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쿠림의 축제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수고해서 이만큼 거두었고, 이만큼 성공했음을 자축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첫 열매를 거두기까지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지난 온 역사를 공유하며, 한 민족으로 함께 하나님 앞에 서서 감사하는 것이다. 그들은 개인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을 공유한 일원으로 함께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이다.
첫 열매, 비쿠림을 드리는 의식 이후에 성경은 또한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신 26: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가나안 땅에서 첫 열매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말미암아 이웃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기쁨이란 감정도 명령하신다. ‘싸마흐타 베콜 하토브(הטוב בכל שמחת)’ ‘모든 좋은 것에 너는 기뻐하라’ 여기서 ‘기쁨’이라는 뜻의 명사 ‘씸하’가 명령형 동사로 씌였다. 그런데 ‘씸하’는 개인적으로 느끼는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공유된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느끼게 되는 감정이 ‘씸하’인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라고 명령하고 있다. 첫 소산을 드리는 즐거움에 아무도 예외 되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또한 성경은 ‘씸하’를 추구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신 26:12,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십일조를 통하여 그 혜택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돌아가게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 받은 백성들의 무거운 책임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을 자기 가족이나 개인적 차원에서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경제적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추구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명을 놓친다면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신 28:47-48,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 저주가 일어나게 되는 조건이 무엇인가? 그것은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않는 것’이다. 조금은 황당하다. 기쁨 없이 사는 게 삶의 최선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기쁨을 잃고 산다고 그것이 저주받을 일이거나 죄가 아니다. 그런데 기쁨과 즐거운 마음을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은 너희가 주리고, 헐벗고,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무슨 의미일까? 간단하다. 그것은 그들이 기쁨을 공유하지 않을 때 망한다는 것이다.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기뻐하지 못한다면 기쁨을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다.
‘씸하’는 내가 얼마를 가졌는가에 따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많이 벌어서 많이 쓰기 때문에 커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과 나눌 때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씸하’라는 감정이다. 그것은 소유의 넉넉함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는 사회속에서 산다. 그런데 행복과 번영을 추구할수록 우리는 자신의 행복과 번영을 확장하는데 더욱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덜 가진 사람들이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된다. 사회가 그러한 방향으로 간다면 그 사회에서 ‘씸하’는 사라지게 된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누리는, 공유된 기쁨과 행복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사회는 물질적으로 번영을 이루었을진 모르지만, 함께 망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신명기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첫 열매를 드리는 의식에 대해 살펴보았다. 인간이 처음 만질 수 있었던 첫 열매는 무엇이었나? 그것은 선악과 나무의 열매였다. 그 열매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 아담은 그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자기 환상에 빠졌다. 아담은 결국 사탄의 유혹에 빠져 그 처음 열매를 자신이 취하게 된다. 처음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비쿠림 의식은 어쩌면 이 원죄에 대한 치유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해의 수확물을 손에 들고 이것을 어떻게 거둘 수 있었는지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그들의 재주나 성공의 결과물이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은 것이기에 그들은 첫 열매를 드리며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올 한 해 우리가 거둔 열매들을 바라보며, 우리 역시 이것이 내 노력과 내 성공의 결과라는 착각에 빠져선 안 된다.
모든 것이 부족할 것이 없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잃어버린 것이 있다. 그것은 감사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물었을 때 아담은 이렇게 대답한다. 창 3:12,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랍비 라시는 여기에 대한 주석을 이렇게 기록한다. ‘Here he [Adam] showed his ingratitude.’ ‘여기서 그는 감사하는 마음이 없음을 보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위해 하와를 주셨을 때, 그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외쳤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그녀를 비난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그녀를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린 행위인 것이다. 원죄는 물론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에 대한 불순종이지만, 또 다른 원죄의 핵심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에덴동산은 가나안 땅에서의 삶의 축소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담의 원죄는 에덴에서의 추방을 초래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을 추구하다가 불순종의 죄를 저질렀다. 그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게 하신 하와를 비난하며, 그녀와 함께 하는 기쁨을 잃어버렸다.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류가 잃어버린 것은 감사와 ‘함께 하는 기쁨’이었다. 그에 대한 결과는 낙원을 잃어버리고 추방당한 것이었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잃어버린 것 역시 감사였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기쁨’이었다. 그에 대한 결과는 가나안 땅을 잃어버리고 추방당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고, 이웃들과 함께 기뻐하지 못한 것이 결국 2000년이 넘는 추방으로 이어질 것이라 누가 상상했겠는가?
감사를 잃어버린다고, 기쁨을 잃어버린다고 우리는 에덴에서 쫒겨나거나, 포로로 끌려가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를 잃어버리고 기쁨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낙원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인 우리는 나만의 행복과 기쁨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기쁨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즐거워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명을 감당 할 때 우리 삶에는 감사와 기쁨의 선순환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관계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공동체로서의 연대가 많이 약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와 함께 누리는 기쁨인 ‘씸하’보다는 네플릭스와 유튜브, 컴퓨터 게임 등이 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나르시스적인 기쁨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위기다. 내 자신만의 성취과 기쁨에만 몰두하는 것 역시 위기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와 ‘함께 하는 기쁨’을 회복하는 것은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처방인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한 해의 열매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하고 있는 공부, 그것은 내가 잘나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얻게 된 은혜의 열매인 것이다. 그 열매의 처음 것을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는 감사와 감격을 회복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거둔 열매를 다른 사람과 나누며, 함께 누리는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혼자 생존을 위해 싸우는 개인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공유한 자들이다. 우리가 노력하여 얻은 열매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함께 나누는 자들인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의 처음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와 기쁨을 회복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