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53 책임으로의 부르심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10월 8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53 책임으로의 부르심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 32:3-4)

지난 주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토라의 내용을 노래로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시는 장면을 살펴 보았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신명기 32장에는 이제 모세가 그것을 노래하는 내용이 나온다. 모세는 이 노래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담겨지길 바랬다. 그는 자신이 죽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이 이 노래를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서 있길 원했다. 그런데 이 노래에는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예측까지 다 담겨져 있다. 모세가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는 무엇이었을까? 이 노래에 어떠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32: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모세는 하늘과 땅을 향하여 노래를 시작한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하아지누 하샤마임(האזינו השמים)” 하아지누는 ‘듣다’라는 뜻의 동사 ‘아잔(אזן)’에서 온 말이다. 히브리어로 귀가 오젠(אזן)인데, 아잔은 ‘손으로 귀를 펴다’라는 말이다. 따라서 ‘하아지누’는 ‘귀를 기울여 들으라’라는 명령이다. 듣는 것이 왜 중요할까? 그것은 누구의 음성을 듣는가가 그 사람의 삶의 양식과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유대 경전인 미드라쉬 라바는 귀가 우리 몸의 모든 기관에 생명을 준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귀로 토라의 말씀을 듣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울도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우리의 믿음과 운명이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많은 소리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다른 음성에 마음을 빼앗기며 산다. 하나님 말씀 외에 다른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삐뚤어진다. 그것은 길이요 진리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모세는 왜 하늘과 땅을 향하여 그의 노래를 시작했을까? 그것은 사람은 죽어도 하늘과 땅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노래가 대대로 이어지도록 하늘과 땅을 증인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는 이어서 두 가지 사실을 대비한다. 32:3-4,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첫번째 사실은 하나님은 반석이라는 것이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계신다는 사실이다. 두번째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에 관한 것이다. 32:5-6,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두번째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삐뚤어진 세대라는 것이다. 반석이신 하나님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모세는 이 삐뚤어진 세대에게 본격적인 권면을 시작한다. 32: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광야 2세대 중 연장자들은 역대의 연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모세는 그것을 설명한다. 32:8,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이것을 알려면 창세기 10장으로 가야 한다. 창세기 10장에는 노아 자손들의 족보가 나온다. 모두 70명이다. 그런데 이들은 바벨탑 사건 이후 온 지면으로 흩어져 각각 나라를 이룬다. 노아 자손의 수효대로 70개의 나라의 경계가 정해진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인종’이라는 표현은 히브리 원어로는 ‘브네이 아담’인데, ‘아담의 아들들’이란 뜻이다. 홍수 이후 아담의 아들들이 전 세계로 흩어져 70개의 나라를 이루게 된 것이다.

민수기서를 보면 초막절 규례가 나온다. 초막절 7일 동안 매일 수송아지를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이다. 29:13-32, “너희 번제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리되 수송아지 열세 마리와… [17] 둘째 날에는 수송아지 열두 마리와… [20] 셋째 날에는 수송아지 열한 마리와 … [23] 넷째 날에는 수송아지 열 마리와… [26] 다섯째 날에는 수송아지 아홉 마리와… [29] 여섯째 날에는 수송아지 여덟 마리와… [32] 일곱째 날에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13+12+11+10+9+8+7 모두 더하면 70마리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70나라를 위한 번제였던 것이다. 13에서 7로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소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번제를 드리는 것은 이 세상 나라들이 소멸되지 않도록 기원하고 축복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초막절 번제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부르심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었다. 9절에 그 내용이 나온다. 32: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이스라엘은 온 열방을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기업이라는 것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 어떠한 사랑을 쏟으셨는지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32:10-12,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과거를 노래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세우셨고, 그 언약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백성으로 강하게 훈련하셨다. 물론 그 광야의 훈련은 쉽지 않았다. 아직 날 수 없는데 둥지에서 떨어지는 것은 새끼 독수리의 입장에서는 정말 아찔하고 감당이 안 되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새끼 독수리는 추락할 때 비로소 날개짓을 하는 것이다. 날개짓을 하다가 힘을 얻어 날아 오르게 되는 것이다. 어미 독수리에겐 새끼를 떨어뜨려도 된다는 믿음이 있다. 힘 없이 떨어지는 자기 새끼를 자신의 날개로 다시 받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사랑하는 자녀를 광야로 보낼 때는 다 믿음이 있으시다. 광야에서 혹독하게 굴리시지만, 결국은 자기의 눈동자같이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 광야가 펼쳐질 때, 그것은 나를 독수리처럼 비상할 수 있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광야의 시간을 기억할 때 우리는 희망으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내일이면 초막절이 시작된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이 되면 수카를 짓고 거기서 일주일 동안 지낸다. 그들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그들은 가진 것이 없었다. 그들이 가진 것이 있다면 초막 사이로 보이는 불기둥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결국은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소망 하나였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 하나를 붙들고 그들은 광야를 통과했던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남들이 가진 것을 갖지 못했을 때 슬픔을 느낀다. 한 해를 돌아보며 내가 이룬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할 때 의기소침해진다. 그럴 때 우리 역시 초막으로 들어가야 한다. 거기서 나의 현재를 비교하지 말고 과거를 기억해야 한다. 내가 남들처럼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 한 분만 소유하면 된다는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광야를 탓하지 말아야 한다. 그 광야를 허락하신 하나님도 탓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광야가 나를 창공을 나는 독수리로 만들어내는 공간과 시간임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과거를 기억할 때 우리 삶에 감사가 회복되는 것이다.

모세는 이어서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베푸신 은혜를 노래한다. 32:13-14,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지 못했다면 그들은 다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것은 구원의 반석이었고, 거기서 나온 물은 생명의 물이었다. 광야 반석에서 구원의 물을 주셨던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도 꿀과 기름을 빨게 하셨다. 밭의 소산인 밀과 포도주를 먹게 하셨다.

자 그런데 다음 구절부터 모세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예견하며 노래한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물질의 풍요가 아이러니하게도 풍요를 주신 하나님에 대한 배도로 나타날 것에 대해 예견했다. 32:15,18,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이스라엘이 누리게 된 풍요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과 더 많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초래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기고, 그들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수룬(ישרון)’은 이스라엘의 별칭이다. ‘야살(ישר)’에서 나온 말이다. ‘야살’은 ‘곧다, 옳다.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다’란 뜻이다. 이스라엘은 한 때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배가 부르자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혼자 걷기 시작한 이스라엘이 제대로 걸을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며 삐뚤어진 세대가 된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걷지 않는 인생은 구부러진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반석이 되신 하나님을 버린 결과는 재앙과 포로됨이었다.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하나님은 역사상 앗수르, 바벨론, 로마 제국을 일으키셔서 살찐 여수룬을 심판하셨다. 하나님은 그 심판 속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그들로 알게 하셨다.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절대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알기 원했다. 모세가 선포했듯,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시다. 모세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협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결국 심판을 당하게 될 때, 그들이 삐뚤어진 길에서 돌이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구원과 회복에 대한 소망으로 끝난다. 32:43,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하시는 것이란 사실이다. ‘키페르 아드마토 암모(כפר אדמתו עמו)’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여기서 ‘속죄한다’는 뜻의 ‘키페르’는 ‘카파르(כפר)’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카파르’는 ‘덮다’라는 뜻이다. 며칠 전 욤 키푸르가 지났는데, 이 날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덮어 주시는 날인 것이다.

지금까지 모세의 노래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모세가 이 노래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뭘까? 그것은 ‘언약 백성의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성경에 나오는 인류의 이야기는 대부분 책임에서 도피하는 것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자 하와를 탓했다. 가인은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는 동생 아벨을 죽였고, 하나님께서 아벨이 어디 있냐고 물으실 때,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고 말하며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 안타깝지만 우리도 종종 이러한 실수를 저지른다. 내 인생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내 인생에 문제가 생긴 것은 출신 탓이고, 부모 탓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며 운명을 탓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이 보는 것처럼 운명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봉인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운명의 결정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과 먹을 것으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하여 넘어질 때도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고,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운명을 우리와 함께 열어 가시는 분인 것이다. 모세가 노래한 것처럼 하나님은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분이시다. 공의로우시고 바르신 분이시다.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탓하지 않아야 한다.그래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올바른 길을 다시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조나단 삭스는 이런 말을 했다. “If we seek a better world, we must make it. God teaches us, inspires us, forgives us when we fail and lifts us when we fall, but we must make it. It is not what God does for us that transforms us; it is what we do for God.”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영감을 주시고, 실패할 때 용서하시고, 넘어질 때 일으켜 주시지만, 우리가 그것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입니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저런 것을 안 해 주셨어’ 이 말은 틀린 것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책임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우리 삶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그의 책임을 회피했을 때, 그는 낙원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책임을 회피했을 때, 그들은 가나안을 잃어버렸다. 이제 내일부터 초막절이 시작된다. 초막절을 지나면서 유대인들은 과거 그들이 70마리의 소를 번제로 드리며 열방을 축복했던 때를 기억하며, 제사장 나라로서의 책임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우리 역시 초막절을 지나면서 우리의 부르심에 대한 책임을 회복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의 부르심을 이렇게 말한다. 벧전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그저 한 개인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다. 열방을 위해 기도하고 열방을 살리기 위한 제사장으로서의 책임에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부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열방을 만드시고, 그 열방이 돌아오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그 열방을 축복할 제사장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풍요롭고 안정된 삶, 그 자체는 우리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을 추구하다가 정작 반석이신 하나님을 놓친다면 우리는 전부를 잃는 것이다. 바라기는 ‘귀를 기울이라’라는 명령으로 시작되는 모세의 노래에 우리의 귀를 기울일 수 있길 바란다. 언약 백성에게는 특권만이 아니라 그 언약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우리 역시 이웃과 열방에 책임을 다하라는 부르심이 있는 것이다. 이웃을 위한 책임에는 손해가 따를 수 있다. 열방을 위한 책임에는 위험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제사장 나라로서의 책임에 대한 부르심은 그러한 손해와 위험보다 더 높은 부르심인 것이다. 바라기는 이 부르심에 책임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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