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10월 22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 창조의 동역자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 1:31)
이번 주부터 새로 토라포션이 시작된다. 토라는 창조에 대한 기록과 함께 시작된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사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창조 세계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동역자로 부름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창조 사명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천지 창조 당시 세상은 혼돈과 무질서 상태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토후 바보후(תוהו ובוהו)’이다. ‘토후’는 ‘혼돈,’ ‘보후’는 ‘공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 즉 ‘토후 바보후’인 세상에 말씀으로 창조 사역을 시작하셨다. 창 1:3-5,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 뿐인 세상에 빛이 들어왔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좋았을까?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여기서 ‘나누다’라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바달(בדל)’이다. ‘분리하다, 구별하다’라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본질은 구별하는 것이었다. 경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첫째 날 빛이 창조되면서 낮과 밤의 경계가 생겼다. 둘째 날 궁창이 만들어지면서 하늘과 땅의 경계가 생겼다. 하나님은 여섯 째 날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여 사람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여섯째 날 창조 사역을 마치시면서 ‘토브 메오드(טוב מאד),’ ‘매우 좋았다’라고 말씀하셨다. 혼돈과 공허로 가득했던 땅에 이제 창조의 질서가 들어온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또 있었다. 그것은 ‘한계’였다 하나님은 에덴동산 안에 생명 나무와 선악과 나무를 두셨다. 하나님은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하셨지만, 선악과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금지하셨다. 그 한계를 통해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신 것이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한계를 두셔야 했다. 한계를 갖고 살아가는 것, 그것은 항상 절대자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그 한계를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는 것으로 여기도록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그 한계 밖으로 넘어가도록 인간을 유혹했다. 아담과 하와의 눈에 그 한계 밖의 세상은 자신을 더 지혜롭게 해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한계를 넘어갔고, 그 결과 에덴을 상실하고 말았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며, 아담은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와 한계가 무너지는 곳에서 다시 혼돈과 공허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가 뭘까?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질서와 한계를 잘 관리하기 위해서이다. 고대 근동의 신화에서는 신들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는 오직 왕 뿐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그저 신들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고대근동의 신화는 신의 대행자인 왕을 위해 일하는 하층민이라는 수직적 질서 체계를 합법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런 신화와 달리 성경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라고 말한다. 이것은 곧 모든 인간이 신을 대행하는 왕 같은 존재이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을 잘 관리해야 할 권한과 책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고대근동의 문화와 가치관를 뒤집는 혁명이자 복음인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질서를 이 세상에 세워 나가도록 사람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동역자로 부름 받은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하나님의 창조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할 가능성을 모르셨을까?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사람들이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을까? 다 아셨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면서도 왜 인간을 창조하셨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믿음에 부응하여 순종하며 일어설 사람들이 있음을 믿으셨다. 창세기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아담의 실패로 인간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축복은 저주로 바뀌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괴되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에서는 아담의 실패를 바꿀 인물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철저히 순종의 사람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은 이처럼 불순종의 고리를 끊고, 하나님과 동역하기로 결심하며 일어설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여 그러한 사명을 맡기셨다. 특히 제사장들을 세워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지키도록 하셨다. 레 10:10-11,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또 나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여기서 ‘분별하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바달(בדל)’이다. 제사장의 사명은 한마디로 구별하는 것이다.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본질이었다. 따라서 제사장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이어가는 자였다. 그들의 사명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무엇인지,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와 한계가 무엇인지 구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서를 이 세상에 세워 나가도록 부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명에 실패하고 만다. 그리하여 기원전 586년 국가의 멸망을 경험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멸망을 미리 내다보며 이렇게 탄식했다. 렘 4:22-23,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여기서 ‘토후 바보후’란 단어가 나온다. ‘히네 토후 바보후 (הנה תהו ובהו)’ 예레미야는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다’라고 탄식했다. 그는 땅이 혼돈과 공허로 가득하고, 하늘은 빛을 잃었다고 표현했다. 유대 사회가 타락하여 창조 이전의 무질서와 혼돈의 상태처럼 되었다고 그는 탄식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대신 세상과 우상에 무릎 꿇을 때 반복되는 것이 바로 ‘토후 바보후,’ 혼돈과 공허의 역사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에 연민을 느끼셨다. 그리고 책임감을 가지셨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통해 혼돈과 흑암의 세상에 빛을 던질 메시아가 올 것을 예고하셨다. 사 42:6-7,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그리하여 태초에 말씀으로 존재하셨던 예수님은 때가 차매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둠 가운데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들의 인생에서 어둠이라는 혼돈을 끝내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도전한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그 분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태초에 혼돈으로 가득했던 세상에 말씀이 선포되면서 혼돈의 역사가 끝난 것처럼, 우리 삶에 예수님이 오셔야 우리 인생의 혼돈이 끝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에 주인이 되셔야 ‘토후 바보후’였던 삶에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이다.
이처럼 ‘토후 바보후’인 세상에 빛을 던지는 것이 창조 사역의 핵심이다. 세상에 혼돈과 공허가 가득하다고 그런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은 창조 사역의 부르심을 외면하는 행위다. 하나님은 ‘토후 바보후’인 세상에 빛을 창조하셨다. 예수님은 혼돈과 공허 가운데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빛으로 오셨다. 그 빛을 받은 우리 역시 혼돈과 공허 뿐인 세상에 빛을 비추는 창조의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힘든 건 하나님이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무질서의 창조자가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도와야 한다. 작은 칭찬이 상대방의 얼굴을 빛나게 할 수 있다. 사랑과 위로의 말들이 한 영혼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창조가 말씀으로 시작된 것처럼 우리는 말로써 세상에 빛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연약해서 작은 말에 쉽게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의 빛에 노출 될 때에야 비로서 성장을 경험한다. 나 역시 그러한 빛을 받았기에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우리도 누군가가 성장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서 좋은 점을 찾아내고,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그들이 혼돈과 공허를 벗고 빛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랬을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창조의 사역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하여 혼돈과 공허 가운데 있을 때에 빛을 던지신 분이시다. 우리에게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 말씀하시며, 우리가 다시 빛 가운데로 나아오도록 도우시는 분이시다. 내가 과거의 부정적인 평가의 말들 가운데 주저앉았다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내 인생 가운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혹은 우리가 그분을 찾을 때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가 빛 가운데로 나아오도록 도우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이러한 일을 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하나님과 한 동산 안에서 거니는 것보다 나의 생존과 번영, 그 자체가 더 중요해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지우고, 자신의 욕망을 선택함으로 혼돈과 공허라는 ‘토후 바보후’의 역사를 반복해왔다. 이 ‘토후 바보후’의 역사를 끝내는 길은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질서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세상의 혼돈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이어가는 동역자가 되라고 이 땅에 부름 받은 것이다. 바라기는 혼돈과 흑암이 침투한 우리 일상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춰지길 소망한다. 말씀의 빛이 비춰짐으로 내 삶에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가 세워지길 바란다. 말씀의 빛이 비춰질 때 우리 영혼의 혼돈이 끝난다. ‘토후 바보후’가 끝나고, ‘토브 메오드’, ‘매우 좋았더라’의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토라포션을 통해 올 한 해 말씀의 빛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길 바란다. 그 빛을 받아 혼동과 공허가운데 있는 세상과 영혼들에게 빛을 전하는 창조의 동역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