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11월 5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 성지행전: 마므레 – 기다림도 사역이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창 17:1-2)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엄마가 된 사람은 아이를 잉태하고 그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기다린다. 우리 노암이가 잘 자라고 있는데, 노암이가 ‘엄마’, ‘아빠’ 말을 언제 할지, 걸음마를 언제 할지 우리 모두 기다린다. 우리 학생들은 공부 잘 해서 좋은 대학 가기를 기다리고, 군대 간 친구들은 언제 전역할지를 기다린다. 우리 싱글들은 언제 나에게 좋은 사람이 나타나 결혼하게 될지를 손꼽아 기다린다. 지난 주간 미국에서 손님이 오셨는데, 청년부 때 함께 기도했던 누님이었다. 그 때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많이 했는데, 그 누님은 삼 년 전 환갑 때 한 장로님을 만나 결혼하셨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우리가 죽는 순간 모든 기다림은 멈추게 된다. 그러나 기다린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문명의 발전은 기다림의 시간을 줄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왔다. 더 빠른 열차, 더 빠른 와이파이… 우리는 문명이 가져다 준 편의를 누리며 점점 더 기다림의 시간을 못 견디는 사람들로 진화해 왔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기다림의 끝판왕이 나온다. 아브라함과 사라다. 이들이 무엇을 기다렸는지, 이들의 기다림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기를 갖는 것이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 불임은 하늘이 내린 벌로서 여자에게는 저주였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약속을 던지셨다. 창 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한 아이를 주시겠다는 것도 아니고,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여러분이 아브라함이었다면 떠나겠는가? 나 같으면 떠난다. 오랜 기다림을 끝낼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레크 레카(לך לך)’라는 단어가 나온다. 레크는 히브리어 할라크, ‘걷다, 가다’의 명령형이다. 그리고 레카는 “너 자신을 위해서” “for yourself”라는 뜻이다. 즉 레크 레카는 ‘너 자신을 위해서 가라’는 말이다. 가기 위해서 전제 되는 것이 떠남이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다. 그는 익숙한 것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낯선 가나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익숙한 것을 떠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용기를 높이 평가한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칭송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진짜 믿음의 여정은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비로소 시작된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살려고 애굽으로 내려간다. 거기서 예쁜 아내 때문에 죽을 까봐 살려고 거짓말을 한다. 그가 믿음의 사람인지가 의심스럽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시행착오 끝에 마므레라는 곳에 정착하게 된다.
창 13:17–18,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마므레에 정착한 뒤 바로 일어난 사건이 전쟁이었다. 시날 왕 연합군이 소돔 지역을 쳐들어왔다. 이 전쟁통에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간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자신의 군사 318명을 이끌고 그를 되찾아 온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른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초조하다. 가나안은 안전한 곳도 아니었고, 아내 사라에게서는 여전히 잉태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에 아브라함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 말씀해 주신다. 창 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약속의 말씀이 아브라함의 맘에 다가오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응답한다. 창 15:2-3,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섭섭했다. 그는 아들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종 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하나님은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밤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신다. 마므레에서 바라본 밤하늘의 별들은 엄청 많았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겠니?” 셀 수 없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을 거야.” 이후에 성경은 이런 기록을 남긴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 안에 믿음의 씨앗이 떨어진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이 때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축복에 대한 약속이 아니었다. 하나님 자신이었다. 하나님의 인격에 그는 설득된 것이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횃불의 형상으로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시며 땅과 자손에 대한 언약을 맺으신다.
이제 아브라함에게는 언약이 있었다. 그러나 또 십 년의 시간 흐르는 동안 아브라함이 가장 원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땅과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라는 초조한 마음에 그녀의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주어 아이를 낳게 한다. 창 16: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십 년 이란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의 모습에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하나님은 13년 동안 침묵하신다. 창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은 왜 그제서야 나타나신 걸까?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삶이 이전에는 완전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아내 사라의 의견을 따라 하나님보다 앞서 걸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면서 그들의 인간적인 힘이 빠지기까지 13년이란 시간을 더 기다리셔야 했다.
로마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롬 4:18-20,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것은 결과적인 이야기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견고해진 것은 백 세에 이르러서였다. 그가 백 세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의 몸은 죽은 것 같았고, 사라의 태도 죽은 것 같았음을 그들은 알게 된다. 육신의 힘을 의지하여 자녀를 낳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더이상 할 수 없는 그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다시 찾아 오신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의 몸과 사라의 태로는 더 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음을 알았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근거가 이제는 더이상 자신들로부터는 가능하지 않음을 알았다. 상황을 보면 아무 것도 바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 대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진정한 믿음의 길을 걸어갔다. 믿음의 근거가 자신들이 아니라, 이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완전함을 이를 수 있도록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신다. 창 17:4-5,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아브람’은 ‘존귀한 아비’라는 뜻이고,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란 뜻이다. ‘아브람(אברם)’이란 이름에 ‘여호와(יהוה)’를 상징하는 단어인 ‘헤(ה)’가 더해져서 ‘아브라함(אברהם)’이 된 것이다. 인간적인 아브람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의 삶에 더해져야 했다. 이름이 바뀌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람’은 그 때까지 더 높아지고 존귀한 자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그가 그저 높고 존귀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민족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는 믿음의 아비가 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라의 이름도 바꾸어 주셨다. ‘사래(שרי)’이름에 ‘헤(ה)’가 더해져서 ‘사라(שרה)’가 된 것이다. 인간적인 사래가 완전해지기 위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녀의 삶에 더해져야 했다. 그리하여 사라는 더이상 ‘아브라함의 왕비’가 아니라 ‘여러 민족의 왕비’가 되어야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남편 잘 만나서 시집 잘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낳는 어머니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완전함이었던 것이다.
마므레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 이삭을 얻기까지 약 25년을 기다리며 살았던 곳이다. 마므레는 기다림에 지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신 곳이었다. 의심하는 아브라함에게 쪼갠 고기 사이로 횃불이 되어 지나가시며 언약을 하신 곳이었다. 또한 마므레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열국의 아비와 어미로서의 정체성을 갖도록 이름을 바꿔 주신 곳이었다. 아브라함이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 한 분에 대한 절대 믿음이다. 그들은 마므레에서 이 절대적인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가정을 준비했던 것이다.
가족의 목적이 무엇인가? 서로 의지하며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가족의 목적이라면 그것은 반쪽짜리다. 하나님은 믿음이 준비된 아브라함에게 그와 그의 가족의 사명 선언문과 같은 말씀을 주신다. 창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헤브론 아브라함의 묘지 위에 씌여 있는 구절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가족의 목적은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어떠한 제도와 기관이 아니라 가족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며 생명을 전달하는 일을 하기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 믿음을 가진 한 아비와 어미를 만들기 위해 마므레에서 25년 이란 시간 동안 아브라함과 사라를 준비시키신 것이다. 따라서 기다림은 결코 불필요하거나 허비된 시간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기다림은 믿음이 영글어 가는 시간이었다. 그들에겐 기다림도 사역이었던 것이다.
이후 아브라함은 소돔의 죄악을 위해 중보하는 자가 된다. 그것이 열국의 아비로서 그가 품게 된 부담감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가정에 아들이 없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으로 죽을 위기에 처한 도시를 위해 중보하는 열국이 아비가 된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을 읽으면서 마므레를 가고 싶었다. 아직 안 가봤던 곳이고, 유대인에겐 출입이 금지된 Area A지역이라 처음에는 혼자 가려고 했다. 그런데 우리 교회 가족을 이루신 분들과 같이 가서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침 이스라엘 선거일이라 두 가정과 같이 갔다. 마므레를 어렵게 찾아 갔는데, 거기서 이스라엘을 위해, 팔레스타인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국가적인 애도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대한민국과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도했다.
다음 세대는 늘 빠른 속도로 변한다. 이제는 MZ세대가 아니라 알파세대가 자라나고 있다. 알파세대는 2010년 이후 태어난 시대다. 영국에서는 18개월 된 아기가 처음 한 말이 ‘엄마’가 아니라 ‘알렉사’였다고 한다. 우리와 다른 환경에서 자라나는 세대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가 과제이다. 그러나 세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가족의 사명이다.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는 가족의 사명은 영원한 것이다.
공중 권세 잡은 자는 지금 이 시대에 무엇보다도 가족을 흔들고 있다. 가족이 무너지면 하나님의 의와 공도의 전달이 끊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의 행복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족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믿음의 아비와 어미로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 자녀와 다음 세대에 절대 믿음을 물려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나의’ 것에만 관심을 갖는 ‘아브람’과 ‘사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 믿음을 상속하는 열국의 아비와 어미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슬픔이 치유될 때까지 우린 또 얼마의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우린 자신을 의심하며, 남을 탓하게 된다. 그러나 그 어쩔 수 없는 시간을 견디는 힘은 바로 기다림이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한다. 시 40:1-3,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인류의 구원 역사는 아브라함의 기다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오랜 기다림 끝에 하나님은 그의 인생에 찾아오셨고, 그의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다. ‘너 자신을 위해 걸어가라’는 레크 레카의 부르심을 완성했던 것은 마므레에서의 오랜 기다림이었다. 바라기는 이 세대가 여호와를 기다리는 세대로 자라가기를 기도한다. 한국에서 슬픔을 당한 모든 가족들이 결국은 새 노래로 하나님께 찬송을 올려드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여호와를 기다리며, 이 땅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세대가 일어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