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11월 12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 성지행전: 모리아 – 하나님은 보신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1-2)
사람에게는 다섯 개의 감각이 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다. 이 오감 중에서 시각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될까? 약 87%라고 한다. 그만큼 시각은 강력한 것이다. ‘본다’는 것은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넘어 그 사물을 인지하고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다’는 히브리어로 ‘라아(ראה)’인데, ‘라아’는 단지 눈으로 보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깊이 생각하다. 준비하다’라는 2차적인 뜻도 가지고 있다. 이번 주 토라포션의 제목은 ‘봐이예라’다. ‘그가 나타났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라아’라는 동사의 수동형이다. ‘그가 보여졌다’라는 뜻이다. ‘보여졌다’와 ‘나타났다’는 같은 말이다. ‘라아’는 이번 토라포션의 핵심단어이다. 이 단어가 본문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그는 ‘힌네니(הִנֵּֽנִי)’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한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로 준비한듯, 그는 대답한다. 창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자신의 미래였던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는다. 너무도 큰 테스트였다. 명령에 순종하는 순간 그의 미래는 불확실성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나뿐인 아들이 사라지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라는 그의 부르심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리아는 예루살렘에 있는 땅인데, 지금 성전산이라 불리는 곳이다. ‘모리아’는 ‘보다’라는 뜻의 ‘라아(ראה)’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여호와께 보여짐’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왜 이곳에서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원하셨을까? 하나님은 분명 그에게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 21:12)”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그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하신다. 정말 모순되는 명령이다. 이삭이 약속의 자녀인데, 이삭을 바치면 약속의 씨가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째서 이러한 모순되는 명령을 하셨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의외로 주저함없이 바로 길을 떠난다. 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까지는 걸어서 삼일 정도 되는 거리다. 그런데 가던 길에서 아들 이삭이 질문한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으로선 참 뜨끔한 질문이었다. 아브라함은 대답한다. 창 22:8,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원어로는 “엘로힘 이르에 로 하세 레올라 베니(אלהים יראה לו השה לעלה בני)”다. 여기서 ‘준비할 것이다’라는 뜻의 ‘이르에’는 ‘보다’라는 동사 ‘라아(ראה)’에서 온 것이다. 이 단어를 한국어로는 ‘준비하다’, 영어로는 ‘provide’로 번역했다. 그런데 ‘provide’는 ‘pro video’라는 라틴어에서 온 말이다. “to see before” ‘미리 보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미리 볼 수 있는 분이기에 준비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고백이다. 그는 25년동안 자신보다 앞서 보시고, 앞서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이다.
창 22:9-10,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아브라함은 의외로 단호했다. 그의 행동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그의 행동은 그의 마음 속에서 벌어졌던 갈등을 이미 해결하고 난 다음에 나온 것이다. 좀 전에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명령 사이에는 모순이 있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순간, 하나님의 약속은 끝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랍비 조너던 삭스는 이렇게 말한다. “The trial of the binding of Isaac was not about sacrifice but about uncertainty. Until it was over, Abraham did not know what to believe, or how it would end. He believed that the God who promised him a son would not allow him to sacrifice that son. But he did not know how the contradiction between God’s promise and His command would resolve itself.” ‘이삭을 바치는 시험은 실제로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에 관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이 끝날 때까지 그것이 어떻게 끝날지 몰랐다. 그는 그에게 아들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 아들을 희생하도록 하지 않을거라 믿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명령 사이의 모순이 어떻게 해결될지는 몰랐다’ 이것이 삭스의 주장이다.
신약성경은 이 사건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히브리서를 보자. 히 11:18-19,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이 죽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분으로 믿었다. 죽은 태를 열고 생명을 주셨던 하나님이,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고 그는 믿은 것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명령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다. ‘자신을 인도해 오신 신실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이 모순을 해결하리라’ 그는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절대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기 원하셨다. 절대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세상의 상식을 뒤엎고,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이 땅에서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리아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이삭의 목숨이 아니었다. 아브라함 그 자신이었다. 그는 모리아에서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세상의 문화와 상식에서 당연히 여겨지던 것들을 거부해야 했다. 그는 또한 자신이 합리적이라 여기는 방식들도 버려야 했다. 모리아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자아의 종말을 선언해야 했던 곳이었다. 그 대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일으켜야 했던 곳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 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각보다 높이 계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자아의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이번엔 천사가 아브라함을 다급하게 부른다. 그는 이 때에도 “내가 여기있나이다”, ‘힌네니(הִנֵּֽנִי)’라고 응답한다. 믿음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 시험이란 다름 아니라 세상에 순응하라는 목소리다. 신앙을 타협하라는 유혹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이 세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끝까지 순종하려면 우리는 나의 논리와 세상의 상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 신앙의 승패는 듣는 것에 달려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말한다. 창 22:12,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은 자신이 약속으로 받은 축복마저도 하나님의 최종 명령 앞에 내려놓았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믿음이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은 세상의 통계와 상식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독자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장차 그분이 친히 준비하실 어린 양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사도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친히 준비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다. 하나님께 예수님은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구원할 십자가 사건을 미리 보시고, 그의 아들을 친히 준비하신 것이다. 우리는 결국 모리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자를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창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브라함이 모리아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יהוה יראה)’라고 부른다. 여기서도 ‘라아(ראה)’ 동사가 미완료태로 씌였다.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보이실 것이다” “he will show himself”라는 뜻이다. 이 예언처럼 우리 인류는 이 모리아산에서 인류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 모리아 땅에서 인류의 구원을 미리 보고 계셨던 것이다. 훗날 이 모리아 땅에는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다. 거기서 드려진 희생제물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죄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또 이 모리아 땅에 훗날 십자가가 세워진다. 거기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인류의 구속이 시작된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미리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길을 잃은 곳에서 나아갈 길을 미리 보고 계시는 분이다. 모리아에서 이삭의 결박과 아들의 결박을 보셨던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스런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도 미리 보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늘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믿음으로 순종하는 동역자를 찾으신다. 그분의 친구를 찾으신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묶여 있는가? 불안한 내일에 묶여 있는가? 자녀에 대한 근심에 묶여 있는가? 돈과 일과 학점과 진로에 대한 걱정에 묶여 있는가? 우리가 묶여 있는 대상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끌려가게 된다. 우리는 그것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결박을 풀어내야 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한 소유권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
팬데믹 이후 우리 사회에는 불확실함이 더욱 커졌다. 이제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도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람들은 더 안전하고 확실한 것을 찾는다. 그러나 확실한 길을 걷는 데는 믿음이 필요 없다. 믿음이란 불확실하고 불안한 곳일지라도 하나님 한 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하나님께 나를 드린다는 것은 불확실함으로 나아가는 용기다. 나의 미래, 나의 계획을 내 뜻대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기에 그분 앞에 가장 큰 사랑으로 내딛는 발걸음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믿음과 사랑으로 헌신하는 자에게 그가 준비하신 어린 양을 내어 주신다. 그리고 당신의 동역자가 되어 헌신하는 사람들의 삶을 당신의 영원한 언약으로 이끄신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축복인 것이다. 지금 여러분의 이삭은 무엇인가? 여러분이 오래 기다려서 얻은 것, 그러나 그것을 잃을까 봐 가장 마음을 졸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는가? 바라기는 모든 것을 미리 보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 한 분에 대한 믿음이 여러분 안에 일어나기를 축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부르실 때 ‘내가 여기있나이다” 응답하며 순종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