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11월 19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5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창 23:1-4)
노년에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것은 축복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사라와 아브라함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들은 평온한 죽음을 맞이했을까? 죽음을 앞두고 후회와 아쉬움이 없었을까? 사라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이 토라포션은 ‘하예이 사라,’ 즉 ‘사라의 삶’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창 23:1-2,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사라는 127세를 일기로 죽었다. 아브라함은 애통했다.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품고 살았던 평생의 반려자가 죽은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더욱 절망적인 것은 그 때까지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두가지 약속을 하셨다. 하나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 그러나 그 때까지 가나안에는 아브라함 소유의 땅이 한 평도 없었다. 언약을 이어갈 아들 이삭을 100세에 겨우 얻었지만, 이삭은 마흔이 되도록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했다. 두 가지의 언약 모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사라의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 사실에 절망하고 말았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그를 통해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라를 위해 애통한 뒤 이제 홀로 믿음의 길을 간다.
창 23:3,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갔다는 말에 그의 의지의 결연함이 보인다. 창 23: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아브라함이 땅을 구입하는 장면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고 소개한다. 히브리어로는 ‘게르 뵈토샤브 (גר ותושב)’라고 표현되어 있다. ‘게르’는 ‘살다’라는 뜻의 동사 ‘가르 (גר)’에서 온 말이다. ‘토샤브’는 ‘거주하다’라는 뜻의 ‘야샤브(ישב)’에서 온 말이다. 두 단어가 합쳐져서 ‘잠시 머물러 사는 나그네’라는 뜻이 된다. 우리 중 대부분도 이스라엘에 잠시 머물러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아 고국을 떠나온 이후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로 살았다. 외국인으로 사는게 쉽지 않다. 그가 땅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 주민인 헷 족속의 동의가 필요했다. 헷 족속의 에브론은 막벨라 굴을 원하는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그냥 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매장할 소유지를 값을 주고 사겠다고 답한다. 그는 흥정도 하지 않고 에브론이 제시한 가격인 은 사백 세겔에 그 땅을 구입한다. 지금으로 하면 약 8억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바가지를 쓴 것이다. 결국 막벨라 굴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구입한 최초의 땅이 되었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 매장지를 공짜로 받아 사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곳에 사라만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계속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아브라함 자신과 그의 자손인 이삭과 야곱도 묻혔다.
‘유대인의 역사’를 쓴 역사학자 폴 존슨은 이렇게 말했다. “This is where the 4,000-year history of the Jews, in so far as it can be anchored in time and place, began”. “이곳이야말로 4천 년 유대인의 역사가 시작된 곳, 시간과 공간 속에 닻을 내렸던 곳이다.” 이 땅에서 살았던 많은 제국의 사람들은 사라졌다. 그러나 오직 유대인들만 이 땅에 돌아와 존재했다.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곳에 묻혔다는 것은 그들이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구입했던 막벨라 땅은 유대인들이 죽더라도 그들의 본향을 향하여 머리를 두고 싶은 수구초심을 일으킨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무덤을 찾을 때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 약속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오기를 지금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비싼 값을 주고 막벨라 굴을 산 것은 결국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데 기여한 값진 투자였던 것이다.
사라가 죽은 이후 아브라함이 일어나 한 것이 또 있었다. 그것은 아들 이삭의 배필을 찾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두 내용은 땅과 자손이다. 막벨라를 구입한 것이 땅에 대한 언약을 이루려는 시도였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의 배필을 찾기 위해 종을 보낸 것은 자손에 대한 언약을 이루려는 시도였다. 이처럼 언약은 하나님이 다 이루시도록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액션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창 24:1-2,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이삭이 나이 40에 결혼 했으니 이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40세 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뭇별과 같이 셀 수 없는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이 언약이 이루어지려면 최소한 아들 이삭이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야 한다. 그러나 이삭은 주변의 아무 여자와 결혼 할 수 없었다. 주변의 여자들은 모두 가나안 족속의 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믿음의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는 며느리를 얻기 위해 아브라함은 그가 신뢰하는 종을 그의 동족이 있는 하란으로 보낸다.
창 24:10,”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아브라함은 신부 집에 보낼 선물로 낙타 열 필과 은금 패물과 의복 등을 준비한다. 이삭의 신부를 찾기 위해 그는 아낌없이 투자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어떤 며느리를 원했을까? 종의 기도를 통해 알 수 있는 첫번째 기준은 ‘헤세드의 사람’이다. 즉, 나그네를 환대하고 충성스럽게 일할 수 있는 여자였다. 종의 기도대로 리브가는 낙타 열 필에게도 물을 먹이겠다고 자청한다. 먼 여행에 지친 낙타 열 필을 먹이기 위해서 리브가는 상당한 양의 물을 길어야 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는 두 번째 기준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날 수 있는가’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음을 확신한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종과 함께 즉시 “가겠나이다”라고 말한다. 리브가는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나그네를 환대하며, 믿음의 여정을 감당하기에 최적의 신부감이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결국 아들 이삭의 결혼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의 나이 160세에 손자 에서와 야곱의 출생을 지켜 보게 된다. 그 후 아브라함은 175세에 편안하고 만족한 죽음을 맞이한다.
하나님의 언약과 현실 사이에는 너무도 긴 여정이 있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비해 아브라함이 구입한 헤브론의 막벨라 땅은 너무도 작았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수많은 자손에 비해 그가 얻은 아들은 단 한 명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만족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그것은 비록 그가 언약의 성취를 다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언약의 씨앗이 시작되고 자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큰 약속은 그의 작은 시도들을 통해 결국 현실이 되었다. 그는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무슬림과 크리스천들에게도 아버지가 된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결국 예수님을 통해 자신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게 된 것 같다. 이것이 그가 만족스럽게 숨을 거둔 이유다.
신약의 히브리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삶을 이렇게 평가한다. 히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시기로 한 약속의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다. 그 땅에서 자신을 위해 성을 쌓는 삶이 아니라, 본향을 사모하며 영원한 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허비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본향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었다. 히브리서는 그 본향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히12:22) 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분명 약속의 성취를 다 보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도성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궁극적으로 돌아갈 본향으로 사모하며, 그 영원한 본향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허비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말한다.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성경의 저자들은 공통적으로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을 ‘나그네’로 표현한다. 이 세상의 삶은 잠시지만 믿음의 사람들이 가게 되는 본향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본향을 찾는 자들의 특징이 있다. 그들은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계속 하나님이 부르신 곳으로 움직인다. 그들은 이 땅에서는 ‘나그네’요 ‘거류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산다. 그들은 땅의 소유나 이 땅에서의 명예에 얽매이지 않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산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약의 성취를 위해 산다. 그리고 죽을 때 그들은 그들이 성취하지 못한 것 때문에 억울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금까지 언약의 통로가 된 삶으로 인해 만족하며 눈을 감는다. 행복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약속된 모든 것을 성취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내 자신이 부름 받은 일을 하다가, 그것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을 볼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명을 살다간 사람들은 죽어도 살아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의 제목이 ‘사라의 죽음’이 아니라 ‘사라의 삶’인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의 인생 여정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영원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들은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한 시도들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히 11:1)”라고 말한다. 이 정의에 의하면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실체화 되는 것이다. 믿음은 또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바랐던 것은 그의 당대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실체화 되었다. 여러분은 무엇을 소망하고 있는가? 바울은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롬 8:24). 우리가 바라는 것들은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소망하는 것이다. 소망의 사람들은 지금 보이는 것에 투자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에 투자하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고후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과 수많은 자녀라는 큰 약속을 하나님께 받았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인생에 오랜 시간 동안 보이지 않았고, 그가 그저 바라기만 했던 소망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보이지 않는 소망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그가 바라던 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 끝까지 하나님이 언약하신 것을 믿으며, 그는 자신이 소망했던 것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들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그의 작은 시도들을 통해 결국 후대에 이르러 모두 현실이 된다. 그의 후손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졌고, 그 후손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얻게 된 것이다. 이처럼 신앙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단지 손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언약을 이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를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과 꿈이 있는가? 혹 그것이 내 삶에서 보이지 않고, 너무도 더디 성취되는 것 같은가? 그러나 그것이 비록 더딜지라도 상황과 환경 때문에 꺾이지 않는 불굴의 믿음을 일으키기 바란다. 비록 내가 바라던 것을 다 이룰 수 없을 것 같다 해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방향으로 나아가라. 하나님의 언약의 방향은 주님이 다시 오신 뒤 모든 믿는 자에게 펼쳐질 영원한 본향, 새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하늘의 그 본향에 이르기까지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이 땅에서는 ‘게르(גר)’와 ‘토샤브(תושב)’로, 즉 잠시 거주하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잠시 거주하는 이스라엘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나그네로 사는 이곳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시작되는 약속의 현장이 되기를 바란다. 한국이나 고국에서 살면 좀 더 편안할 수 있겠지만, 거기서도 우리가 나그네로 사는 것은 사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약속과 나의 현실 사이에 우리가 인내하며 걸어가야 할 긴 여정이 있을 것이다. 이 긴 여정을 가는 동안 우리는 시간을 초월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내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시간을 붙잡아야 한다. 이 긴 여정을 가는 동안 우리는 또한 공간을 초월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부르심을 따라 이동하는 나그네의 삶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언약의 방향으로 걸어갈 때 결국 그 약속이 성취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언약의 성취를 향한 우리의 여정은 끝나지 않다. 바라기는 우리의 삶이 다할 때까지 영원한 언약을 이루기 위해 작은 시도들을 멈추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