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11월 26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6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는 삶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창 25:34)
이번 주 토라포션의 제목은 ‘톨돗(תולדת)’이다. 톨돗은 ‘족보, 계보’란 뜻이다. 이 말은 ‘얄라드 (ילד)’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다. 얄라드는 ‘새끼를 낳다, 아이를 낳다, 해산의 고통을 겪다’라는 뜻이 있다. 아이를 낳아야 이어지는 것이 족보다.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이어지는 것이 계보다. 마태복음 서두에는 예수님의 계보가 나온다. 마 1:1-2,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이삭은 에서를 먼저 낳았는데, 왜 예수님의 계보는 에서가 아닌 야곱을 통해 이어졌을까?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였다. 그러나 에서가 먼저 나오고 야곱은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다. 에서는 장자로서 당연히 장자에게 주어지는 명분을 누릴 수 있었다. 장자의 명분은 히브리어로 ‘베코라(בכרה)’이다. ‘태를 열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장자권은 어미의 태를 먼저 연 자가 갖게 되는 특권을 말한다. 장자의 특권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두 배의 재산을 상속받는 것이다. 그리고 가정을 다스리는 아버지의 명예와 권위를 이어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삭의 뒤를 잇는 장자에게는 또 다른 중요한 특권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적 축복을 이어받는 것이었다. “땅과 많은 자손을 주겠다, 이를 통해 열방을 축복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이 가정에 약속하신 언약적 축복이었다. 에서가 이 사실을 몰랐을까? 모를 리 없었다.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그가 15세가 될 때까지 살아계셨다. 아브라함은 손자들을 무릎에 앉혀 놓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갈대아 우르에서 어떻게 부르셨는지, 그들의 아버지 이삭을 왜 100세에 낳게 되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이 왜 큰 아버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통해 이어지게 되었는지를 말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는 어쩌면 할아버지의 무릎에서 매번 딴 짓을 하거나 졸았을 수 있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설교를 따분하게 여기며, 그의 마음은 늘 들판에 가 있었을지 모른다. 성경은 에서를 ‘들의 사람 (a man of open country)’이라고 기록한다. 그는 들에서 사냥을 하고, 자신이 사냥한 고기로 요리를 해 먹으며 즉각적인 만족을 누리는 사람으로 자란다. 그는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보다는 당장 누릴 수 있는 물질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어 간다. 바울은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 9:8)”고 말한다. 에서는 전형적인 육신의 자녀였고, 육신을 따르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롬 8:5-8,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에서는 육신의 일에 익숙해진 자였다. 한번 길을 내면 그리로 다니게 되는 것처럼 그는 육신의 일에 빨리 반응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하여 그는 영의 일을 알 수도 없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도 없었다.
야곱은 어떤가? 성경은 야곱을 ‘조용한 사람’이라고 기록한다. ‘조용한 사람’은 히브리어로 ‘이쉬 탐(איש תם)’으로 표현되어 있다. ‘경건한 사람, 올바른 사람’이란 뜻이다. 그는 장막에 머무르며 할아버지와 엄마 리브가가 들려주는 말에 주목했다. 그는 한마디로 집돌이였다. 어린 야곱의 마음 속에서 할아버지와 엄마가 들려주는 언약에 대한 이야기는 먼 미래에나 이루어지는 이야기였다. 그가 다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들려주는 영적인 일에 반응하고 주목하는 자로 자라갔다. ‘당장 내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장차 일어날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결코 놓쳐서는 안되겠구나’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야곱은 물론 인간적인 약점이 많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현실 이상의 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실재하는 하늘의 것과 하나님의 축복을 붙잡으려는 열망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죽을 쑤어 놓고, 배고픈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라”고 요청한다. 배고파 죽을 것 같았던 에서는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고 만다.
창 25: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에서의 행동은 다섯 개의 동사로 표현된다. “먹고, 마시고, 일어나고, 갔고,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 우리는 이 연속되는 다섯 개의 동사에서 그가 얼마나 성급하고 즉각적인 만족에 길들여진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이 다섯 개의 동작을 끝으로 그는 믿음의 계보에서 완전히 제외된다.특히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다’는 히브리어 동사 ‘바자 (בזה)’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얕보다, 업신여기다, 싫어하다’라는 뜻이다. 그는 손으로 만질 수 없었던 언약적 축복을 업신여기며, 그 대신 당장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팥죽 한 그릇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따라 인생은 갈려지게 된다. 에서에게 있어서 중요한 가치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지금 당장 내 배를 채워줄 수 있는 물질이 그에게 중요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문제는 이러한 에서형 인간을 양산해 내는 것이다. 그들은 손에 만질 수 있는 당장의 만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교회 가서 예배 드리는 것, 집에서 조용히 성경을 읽는 것은 돈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는 것, 하늘의 상급을 얻는 것을 가볍게 여긴다. 에서와 같은 물질주의자는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한다. 언약이 이루어지는 긴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기에 적합한 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에서와 달리 야곱은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다. 장자의 명분이 당장 그를 배부르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는 장자권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있음을 주목했다. 그래서 그는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의 인생이 믿음의 계보를 잇는 장자로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구원의 언약을 펼쳐가신다. 하나님은 에서의 계보가 아니라 야곱의 계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이어갈 장자로 예수님을 세우셨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에게 처음 주셨던 언약적 축복은 이제 예수님과 그를 믿는 자들을 통해 이어지게 하셨다. 성경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갈3:14,29,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만 받고 끝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적 축복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믿는 자들을 통해 이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 역시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는 장자로 부름 받은 것이다.
야곱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장자의 명분은 육신의 순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받는 것이 아니었다. 장자에게 주어진 언약적 축복을 소중히 여긴 사람들이 그 장자의 명분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롬 9:12-16,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의 선택은 선택된 자만을 일방적으로 편애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자녀를 선택하신 것은 그 약속의 자녀만 사랑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그 약속의 자녀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되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복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모두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와 긍휼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긍휼이 있었기에 이방인인 우리도 약속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약속의 자녀는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약속의 자녀는 당장 주어지는 물질적 만족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리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소중히 여기며 그 언약이 이루어지길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다. 약속의 자녀는 자신의 힘만 믿고 하나님 없이도 사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작고 미약함을 알기에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작고 미약한 자에게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허락하신다. 결국 약속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강한 자로 세워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열방에 나눌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것을 세상에 힘 있는 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작고 미약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소중히 여기는 자들을 통해서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린 야곱을 택하신 이유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보여주기 위함인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는 약속의 자녀가 되길 원하신다.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이 땅에 펼쳐내는 장자가 되길 원하신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믿음의 후손이 된 것에 안주해선 안된다.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다음 세대와 열방에 전달하는 장자의 사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은 바로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오늘 우리는 욥바 언덕에 올라 찬양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니라 (고전 1:18)”고 말했다. 세상은 십자가의 도를 업신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언약을 이어가는 장자가 되었다. 우리가 얻은 장자권은 주님께서 친히 값을 치르시며, 피의 대가로 주신 선물이자 특권인 것이다. 바라기는 오늘 욥바 언덕에 우리가 믿음의 장자로 서서 우리가 사는 도시 텔아비브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우리 인생을 통하여 믿음의 계보가 이어지는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