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12월 3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7 인생에 되는 일이 없을 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15-16)
인간의 뇌는 혼돈을 싫어한다. 불확실한 상황이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서 빨리 답을 찾아 그러한 상황을 끝내기 원한다. 우리가 받았던 학교 교육의 대부분의 목표는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직장에서 요구하는 인재들도 문제의 원인을 빨리 파악하고 최대한 신속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로 가득하다. 매뉴얼에 익숙해진 뇌는 매뉴얼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사고가 정지되어버린다. 초조해지고 불안해지면서 멘탈이 나간다. 일본의 정신과 의사인 하하키기 호세이는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는 ‘소극적 수용력(negative capability)’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소극적 수용력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성급히 결론을 내리지 않고 그 불안정한 상태를 견뎌내는 힘’이라고 한다. 성경의 인물 중 누가 가장 소극적 수용력이 많았을까? 나는 야곱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야곱의 인생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가 어떻게 자신이 처한 상황들을 수용하며 그것을 통과했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창 28:10-11,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야곱은 자신을 죽이려는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가고 있었다. 막막했을 것이다. 불안했을 것이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미래는 늘 불안한 것이다. 그가 이르렀던 ‘한 곳’은 아무 이름도 없는 곳이었다. 히브리어로 그저 ‘마콤’ (מקום)이라고 표현한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지점에 자신의 인생이 처하게 되길 원하지 않는다. ‘다음’이 결정되지 않은 장소, ‘내일’을 확신할 수 없는 공간이 바로 ‘마콤’이다. 그런데 야곱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영적 체험은 바로 정처없이 머물게 된 이 마콤에서 일어나게 된다.
삶의 경계선에서 절망하며 잠들었던 그 순간 하나님은 꿈에 야곱을 찾아오신다. 창 28:13-14,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땅과 자손’에 대한 언약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을 야곱에게 다시 말씀하고 계신다. 왜 야곱일까? 그가 언약을 이어갈 장자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어서 말씀하신다.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야곱과의 동행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이처럼 언약이 있는 자의 삶에 동행하신다. 그들의 삶을 책임지신다. 그래서 사명이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속에서도 불안할 필요가 없다. 사명자는 그 사명이 다 이루어지기까지 잘못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은 이렇게 고백한다. 창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동안 야곱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경험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꿈을 통해 그에게 영적인 자각이 일어난다. 드디어 그는 하나님을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으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창 28: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하나님을 만난 그의 인생에 이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생긴다. 그가 누웠던 곳은 이제 이름도 없는 ‘마콤’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 ‘벧엘’이 된다. 이전에 그가 가졌던 불안과 두려움도 사라진다. 새로운 두려움,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그의 마음에 생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미래가 두렵지 않다. 보장되지 않은 미래도 하나님이 동행하시면 버틸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에게 이제 탄탄대로가 열렸을까? 그렇지 않았다. 야곱은 밧단아람에 이르러 라헬을 만난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다. 그녀를 아내로 얻기 위해 그는 삼촌 라반 밑에서 칠 년을 일한다. 그래도 라헬을 사랑하기에 야곱은 칠 년을 며칠처럼 여길 수 있었다.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고 첫날 밤을 치른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가 누워 있었다. 라반에게 속은 것이다. 야곱이 레아인 것을 확인하고서 이렇게 말한다. “힌네 후 레아(הנה הוא לאה)” 한국말로 번역하면 ‘이런 레아잖아’, ‘여기 왜 레아가 있지’ 이런 뉘앙스다. 라헬을 기대했던 야곱으로서는 절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다시 멘탈이 흔들렸을 것이다. 속이고만 살았던 그가 된통 속임을 당한 것이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또다시 칠년을 라반을 위해 일해야 했다. 그리하여 야곱이 다시 벧엘로 돌아오는데는 총 20년의 세월이 걸리게 된다. 그는 20년 동안 노동 착취를 당하며 험한 세월을 보냈던 것이었다.
야곱에게 왜 이런 시간이 필요했을까? 야곱은 왜 라반이라는 사람을 만나야 했을까? 왜 원하지도 않았던 레아를 아내로 얻어야 했을까?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면 야곱의 인생은 그저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그러나 이 20년이란 시간이 있었기에 야곱은 후에 열 두 지파가 되는 열 두 아들을 얻게 된다. 그 험악한 20년의 세월이 있었기에 야곱은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브니엘의 새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형도, 아버지도 속이며 악착같이 살아온 야곱을 길들이기 위해 하나님은 그보다 한 수 위의 사기꾼, 라반을 예비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야곱은 라반의 손에서 참교육을 당하게 된다. 라반은 다름 아니라 야곱의 변화를 위하여 하나님이 그에게 붙이신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후에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창 31:12)” 하나님은 알고 계셨다. 야곱은 라반이 자신을 얼마나 부당하게 대우했는지 원망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목하신 것은 라반의 압제가 아니었다. 야곱의 변화였다. 야곱은 결국 온 가족을 데리고 라반에게서 도망친다. 7일 길을 쫒아 온 라반이 야곱에게 이런 말을 한다. 창 31:29,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라반은 야곱의 변화를 위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 안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라반을 허락하신 이유는 결국 변화된 야곱을 얻기 위함이었다.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을 얻기 위함이었다.
우리 역시 살면서 라반과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나를 이용해 먹고, 부당하게 나를 대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억울함에 주목한다. 그 사람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에 주목한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변화를 위하여 우리에게 ‘라반’을 붙이신다. 생각만 해도 행복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라반 너머로 ‘변화된 나’를 얻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열정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리브가는 라반이 아들 야곱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그 먼 곳까지 그를 보냈다. 그러나 라반은 야곱에게 도움 대신 고통을 주었다. 우리 역시 기대를 가지고 만난 사람이 오히려 나에게 고통을 줄 때가 있다. 좋은 사람, 좋은 회사라고 들어간 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복병들을 만난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당한 수모가 상처로 남지 않는다. 그래야 우리가 당한 고통이 분노로 남지 않는다. 그래야 우리는 변화되고 성장하여 하나님이 얻으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야곱은 20년의 연단의 시간을 마치고 이제 라반을 피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위기에 직면한다. 형 에서가 400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자신을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다. 그가 다다른 마하나임은 야곱이 또다시 경계선에 서게 된 장소, ‘마콤’이 된다. 야곱은 두렵고 답답해진다. 그는 그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창 32: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그동안 야곱의 삶은 정말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에서에게 쫓겨 피해 온 곳에서 그는 라반에게 당한다. 그리고 라반을 피해 달아나는 길에서 이제 에서가 자신을 향해 온다. 도무지 평탄한 게 없는 인생이다. 그의 인생에 자신이 원하던 삶이 펼쳐지지 않는다. 라헬을 기대했는데, 아침에 눈 떠 보니 레아였다.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삶… 그런데 그것이 그를 기도의 자리로 이끈 것이다.
기도가 왜 필요할까? 그것이 어떤 차이를 만들까? 우리가 기도하면 정말 하나님을 움직여 우리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러나 기도는 상황을 바꾸는 것보다 우리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기도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레히트팔렐 (להתפלל)’인데, 이는 재귀 동사이다. 재귀동사는 동사의 행위가 주어인 자기 자신에게 미치는 동사를 말한다.따라서 기도하는 행위는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기도는 ‘나’라는 자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나를 포함한 세상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기도 속에서 ‘나’라는 자아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세상에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세상은 내 뜻대로 돌아가지도 않음을 발견한다.
우리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우리가 얼마나 자기애로 가득한지 깨닫기 위해서는 큰 위기가 필요한 듯하다. 멘탈이 흔들릴 정도의 큰 위기를 겪어야 우리는 비로소 자기애라는 강력한 집착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기도는 그래서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나’라는 자아를 잠재우면서 내 인생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바로 기도의 자리인 것이다.
야곱은 그날 밤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씨름을 한다. 천사가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야곱은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겠다”고 맞선다. 야곱은 이 씨름을 통해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이스라엘’이었다.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다. 결국 마하나임은 야곱에게 또 다른 변혁의 장소가 된다.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פניאל)’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대면한 이곳에서 그는 더이상 ‘남의 발꿈치를 잡는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된다. 하나님과 이미 씨름을 끝낸 곳에서 다른 문제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야곱은 에서와 만난 자리에서 극적인 화해를 이룬다. 이 화해는 에서를 만난 현장이 아니라 이미 기도의 자리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결국 야곱은 그가 얻은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을 모든 유대인들에게 유산처럼 남겼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세워진 것이다. 야곱은 다른 어떤 족장들보다도 많은 도피와 유랑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야곱은 그 모든 시간을 인내하며 견뎌냈다. 그가 인생의 비극적인 순간에서도 견뎌낼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 그것은 그가 ‘내일’을 확신할 수 없었던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거기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하마콤 (המקום, the place)’이 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불안으로 가득한 ‘마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하마콤’으로 변하는 것이다. 야곱은 유대인들이 인생의 비극을 겪을 때 그들의 인생 모델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두 번 경험했다. 그들은 중세와 현대사에서 수많은 대학살을 경험했다. 그들의 조상 야곱처럼 ‘험악한 세월’을 보낸 것이다. 그들이 그 모든 혼돈속에서 절망했다면, 유대인은 역사속에서 사라진 민족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붙들었다. 그 믿음을 붙든 그들은 결국 살아남아 국가로 부활했다.
지금 우리 중엔 인생 최악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혼돈의 시간 속에서 멘탈이 흔들리며 불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혼돈 속에서도 끈질기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불안한 ‘마콤’이 하나님의 집, 벧엘이 된다. 대결의 장소, ‘마하나임’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브니엘’로 변한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는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신앙의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을 걷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길은 내가 정한 길,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내게 허락하신 사명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 사명을 다 이루기까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분과의 동행을 놓치지 않는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