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12월 10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8 완전한 나로 살기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창 35:9-11)
경쟁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끊임 없는 씨름들을 한다. 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한 씨름, 더 나은 삶을 얻기 위한 씨름들을 하게 된다. 성경의 인물 중 야곱만큼 처절한 씨름을 했던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쌍둥이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 그는 악착같이 남을 속여서라도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 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던 목적을 이루었지만, 그의 힘겨운 씨름은 오래도록 끝나지 않았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이 씨름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에도 여전히 야곱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세겜에 이르렀을 때 그 성읍 백성들과 씨름해야 하는 소동에 휩싸인다. 그의 인생에서 언제 씨름이 끝났을까? 그것은 그가 다시 벧엘에 이르렀을 때이다. 그는 거기서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오늘은 야곱이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새 이름이자 그의 정체성이었다. 하나님이 부여해주신 정체성으로 살아야 인간적인 씨름이 끝나게 된다. 우리의 삶에도 인간적인 씨름이 끝나고,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완전한 나’로 사는 비결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창 32:24-25,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야곱은 천사와 씨름을 벌인다. 그 씨름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천사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을 때 야곱은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그 순간 어쩌면 자신이 살아왔던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야곱은 평생 씨름하며 살았던 자였다. 그는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형 에서와 씨름했다. 그는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기 위해 눈이 잘 안보이는 아버지 이삭과 씨름했다. 그는 자신의 몫을 되찾기 위해, 자신을 이용해먹은 외삼촌 라반과 씨름했다. 그는 두 아내 사이에서 그들의 질투심과 씨름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가 평생 씨름해온 것은 그 자신과의 씨름이었는지 모른다. 형 에서를 유독 사랑하는 아버지를 보며 그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씨름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예정으로 이끌려는 엄마 때문에 그는 지금껏 도망자로 살아야 했다. 그는 그런 삶을 끝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천사와의 씨름 도중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음에도 그는 더욱 악착같이 매달렸다.
창 32: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때 천사는 야곱에게 묻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었을까? 아니다. 그것은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냐’라는 질문이다. 야곱은 그 질문에 “야곱이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천사는 왜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질문했을까? 그것은 야곱을 직면하기 위해서다. 아버지 이삭은 야곱에게 같은 질문을 했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 아버지 이삭이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간다. 그 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던 이삭은 야곱에게 질문한다.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이 때 야곱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좋아했다. 특히 그가 사냥해 온 고기를 즐기며 그를 편애했다. 야곱은 그런 아버지의 사랑과 축복을 받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숨겨야 했다. 에서의 옷을 입고 거짓 자아로 아버지 앞에 섰던 것이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속이는 자, 발꿈치를 붙잡은 자’라는 뜻이다. 천사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그는 “야곱이니이다”라고 답한다. 악착같이 남을 속이며, 거짓 자아의 옷을 입고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천사가 야곱에게 말한다. 창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하나님이 새 이름을 주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새로운 정체성과 사명을 주시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이스라(ישר)’와 ‘엘(אל)’이 결합된 말인데, 이는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그의 데스티니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악착같이 부과 권력을 얻어야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확신할 때 이기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확신할 때, 우리는 우리의 내일을 불안해 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확신할 때, 우리는 편법과 속임을 쓰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확신할 때, 우리는 남의 운명을 부러워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확신할 때, 우리는 거짓 자아의 옷을 벗고 진짜 나로 살게 된다.
야곱이 에서로 변장하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받았던 축복은 그가 풍성한 소유를 얻고 만민이 그를 섬기게 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부와 권력’에 대한 축복이었다. 야곱은 이 축복대로 부를 쌓고, 종들을 거느리는 권력자가 된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에서의 축복을 구한다. 부와 권력을 통해 힘 있는 자가 되길 원한다. 그래서 자신을 숨기고, 에서의 옷을 입고 에서처럼 말하려 한다. 내 모습 그대로 보여주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까봐 불안해 한다. 부와 권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내일이 불안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행복하기 위해 남에게 허락된 운명을 자신의 데스티니로 정하고, 자신을 채찍질 하며 정신없이 살아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데스티니대로 살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도 계속 불안하며,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야곱은 다행히 형과 화해를 이루었고, 그들은 각자 자신의 길을 간다. 창 33:16-17,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숙곳은 요단 동편에 있다. 야곱은 아직 요단강을 건너지 않았다. 야곱은 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직행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곳이 목축하기에 좋은 땅이었기 때문이다. 야곱에게는 라반에게서 얻은 많은 가축들이 있었다. 숙곳에 이르렀을 때 야곱의 계산기는 분주하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는 약속의 땅에 속히 돌아가기 보다 그곳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그는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짓는다. 그의 딸 디나가 밧단 아람을 떠나올 때의 나이가 여섯 살 정도였는데, 그들이 세겜에 이르렀을 때 디나는 결혼 적령기의 여인으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숙곳에서 최소 10년은 머물렀을 것으로 보인다. 야곱은 이후 다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 세겜으로 이동한다. 그는 거기서 밭을 산다. 땅을 산다는 것은 그곳에 머물겠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세겜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세겜 백성들과의 소동으로 인해 야곱은 또다시 씨름하게 된다.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기대하시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집을 짓고, 장막터를 넓히고, 소유를 늘이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 바라시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야곱이 서원한 대로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집, 벧엘을 세우기 원하셨다. 세겜 땅이 야곱의 눈에는 좋아보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브니엘에서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데스티니에 따라 살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인생에서 씨름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다. 세겜의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에 다시 개입하신다. 창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야곱에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세겜에서의 모든 사건은 그가 벧엘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야곱이 참 ‘이스라엘’로 살게 하기 위해 그의 안전한 환경을 흔드셔야 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벧엘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야곱은 그가 잊고 있었던 서원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야곱의 변화는 이 때부터 시작된다. 야곱은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명령한다. ‘이방 신상을 버려라, 너희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그리고 그는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고 예배하겠다고 선언한다. 야곱은 벧엘로 가기 전 드라빔을 묻으라고 명령한다. 드라빔은 사람 모양으로 만든 작은 우상이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집, 벧엘이 회복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버리지 못하고 있던 드라빔들을 묻어야 한다. 하나님보다 우리가 더 의지하던 작은 우상들을 버려야 한다.
창 35:6-7,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드디어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은 벧엘에 이르렀고, 거기서 예배한다. 야곱은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다. ‘엘벧엘’은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란 뜻이다. 왜 ‘엘벧엘’일까? 인간의 삶에 하나님의 집이 세워지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 그 목적이 이루어지길 원하셨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집이 세워져야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신 나만의 독특한 데스티니를 알게 된다. 그것을 알아야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그분의 완전한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의 외모나 성취에 따라 등급을 매긴다. 이런 세상에서 ‘완전한 나’를 누리기란 매우 어렵다. 에서의 옷을 입고 원하던 축복을 얻어도 야곱은 하나님이 부르신 이름., ‘이스라엘’로 살아야 행복한 것이다. 야곱이 이 ‘엘벧엘’의 비전을 다시 회복하고나서야 그의 인생은 변하기 시작한다. 그는 땅에서의 삶이 재산을 늘리며 그의 육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의 인생은 이제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 된다. 그는 이제 야곱이라는 개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을 예배했다. ‘엘벧엘’의 비전을 회복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창 35: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은 야곱을 이제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주신다. 좀처럼 변화되지 않던 야곱을 오랫동안 기다려주시고, 이제 그를 변화된 이스라엘로 여겨 주시며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야곱의 변화를 주도하셨다. 하나님은 이제 그를 이렇게 축복하신다. 창 35: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하나님은 이제 그가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축복하셨다. 백성들의 총회가 그에게서 나오고, 왕들이 그의 허리에서 나올 것을 축복하셨다. 하나님은 그가 야곱이었을 때는 이런 축복을 하지 않았다. 인간적이고 악착같은 야곱이 생육하고 번성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야곱이 변화되어 이스라엘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의 번성을 위해 축복하신 것이다. 우리 역시 변화되어야 약속을 받는 것이다. 변화는 우리가 하루아침에 착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목적으로 우리의 관심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집’의 비전을 회복하는 사람들에게 번성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엘벧엘’의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 땅에 하나님의 집을 세우기보다 자기 집을 세우는 목적에 머무른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집을 세우기 위해 벧엘로 올라가지 않는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자기 집을 짓기 위해 숙곳에 머물고 있지는 않는가? 땅을 사기 위해 세겜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벧엘로 올라가야 한다. 거기서 엘벧엘,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이 땅 위에 세운 교회에서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인생과 열방에 하나님의 집이 세워지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삶의 목적을 회복한 사람에게 번성을 약속하신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 때문에 씨름하고 있는가? 혹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다른 사람에게 허락된 축복을 얻으려고 씨름하며 살아오고 있지는 않았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야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살아가기 원하신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완전한 자’인지 발견할 때, 우리의 삶에 야곱의 씨름은 끝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의 삶이 될 때, 우리는 선한 싸움을 위해 기꺼이 씨름하기를 자원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바라기는 야곱이 경험했던 ‘엘벧엘’의 하나님을 경험하길 소원한다. 거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새로운 이름,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를 낙인 찍고 평가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자’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