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12월 24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0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창 41:38-39)
2022년 한 해도 저물어 가고 있다. 이번 주 토라포션의 제목은 ‘미케츠’이다. 오늘 본문은 “미케츠 쉬나타임 야밈(מקץ שנתים ימים)”이란 말로 시작하는데, 이는 “2년의 시간 끝에”라는 뜻이다. 이 ‘2 년’은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이 석방된 이후 지나간 시간을 말한다. 술 관원장이 요셉을 잊었기에 요셉이 2년 더 감옥에서 보내게 된 시간이다. 그러나 무의미하게 흘러버린 듯한 이 2년이란 시간은 결코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요셉을 바로 앞에 세우기 위해 세고 계셨던 시간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요셉이 서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이 그의 인생에 펼쳐진다. 감옥의 죄수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는 영화 같은 반전이 그의 삶에 일어난 것이다. 어려운 한 해를 보낼수록 우리는 영화 같은 반전이 나의 삶에도 일어나길 바란다. 우리의 삶에는 언제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이 펼쳐질까? 오늘 요셉의 삶에 있었던 반전을 살펴보며 그 비결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지금까지 요셉의 삶에 수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어느 하나도 그가 원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삶은 온통 다른 사람이 지배했던 삶이었다. 아버지 야곱은 일방적으로 그에게 채색옷을 입혔다. 그의 형제들은 강압적으로 그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노예로 판다. 애굽에서는 그의 주인인 보디발과 감옥의 간수장이 그의 삶을 다스린다. 그는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철저히 다른 사람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삶을 살게 된다. 삶이 어려워질 때마다 그는 이러한 질문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꿈을 주셨는데, 내 삶은 왜 이리 힘들까요?” 그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자신의 꿈과 자신의 삶에 대한 해석을 하나님께 구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의 삶은 비록 다른 사람들의 의해 끌려가는 수동적인 삶이었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능동적으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어간다.
그러던 중 하나님이 준비하신 시간이 찾아온다. 당대 최강 제국인 애굽의 통치자 바로가 꿈을 꾸게 된 것이다. 그 꿈에서 바로는 나일 강 가에 서 있었다. 그런데 아름답고 살진 일곱 마리 암소가 강 가에서 올라와 갈대밭을 뜯어먹는 꿈이었다. 그 후 또 흉하고 마른 일곱 암소가 그 아름답고 살찐 일곱 암소를 먹어버리는 꿈을 꾼이었다. 잠시 깨어났던 바로는 또 다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개의 이삭이 나왔는데, 이후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앞의 좋은 이삭들을 삼켜버리는 꿈을 꾼다. 꿈에서 깨어난 바로는 고민에 빠졌다. 꿈이 예사롭지 않았다. 암소는 풍요와 사랑을 나타내는 이집트 여신 하토르를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이다. 갈대는 파피루스를 말하는데, 이는 고대 하이집트의 상징이다. 그런데 암소가 파피루스를 뜯어 먹은 것은 너무도 불길한 꿈이었다.
당시 애굽은 태양신 ‘라’가 수호하는 나라였다. 바로는 이 신의 아들로 애굽에 풍요를 가져오는 신으로 추앙 받았다. 그런데 마른 이삭이 충실한 이삭을 삼키는 꿈은 왕으로서의 그의 존재를 위협할 만한 불길한 꿈이었다. 바로는 그 꿈의 의미를 알기 원했다. 그래서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다 불러 모은다. 그러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술 관원장이 2년 전 자신의 꿈을 해석해 주었던 요셉을 기억해낸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바로 앞으로 바로 불려 간다.
바로가 요셉에게 말한다.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도다. 내가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이에 요셉이 답을 한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이 대답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아니라”는 히브리어로 ‘빌아다이(בלעדי)’다. 직역하면 “나없이”인데, 이는 “나는 절대 아닙니다!”라는 강한 부정의 말이다. 요셉은 이어서 “엘로힘 야아네(אלהים יענה)”, 즉 “하나님이 답하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자신이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답을 주실 것이란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애굽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말한 것이다. 당시 애굽에는 많은 신화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는 애굽신의 현신으로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신처럼 여겨지는 바로 앞에서 담담하게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의 꿈의 내용을 들은 요셉은 이렇게 말한다. 창 41:25,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은 “하엘로힘 오세(האלהים עשה)”를 번역한 것이다. ‘그 하나님이 지금 행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의 삶의 간증이었다. 그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은 늘 언제나 그의 삶에 지금 행하고 계시는 현재 진행형의 하나님이셨다. 노예로 팔려간 것도, 감옥에 갇히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우리는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날 때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고 생각한다.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좋은 일만이 아니라 우리 눈에 안 좋아 보이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일 수 있는 것이다.
요셉은 바로가 꾼 꿈이 단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창 41:32,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그는 이제 하나님께서 그가 계획하신 일을 곧 시작할 것이라고 말한다. 요셉은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의 주체이심을 선포한다. 요셉은 꿈만 꾸는 몽상가가 아니었다. 그는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그 꿈이 주는 메세지에 따라 자신의 삶의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늘 고민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구체적으로 바로가 꿈을 나누었을 때, 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전략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의 꿈을 통해 앞으로 7년의 풍년이 오고, 이어서 7년의 흉년이 온다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다. 그래서 바로에게 지혜로운 감독관을 세워 풍년에 20% 소득세를 걷고, 각 성읍에 비축하여 흉년을 대비하라고 조언한다. 이처럼 요셉은 꿈만 해석한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탁월한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러한 지혜와 감각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요셉이 꿈을 해석하고 실제적인 조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이는 그가 지내온 과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보디발의 가정에서 총무의 일을 했다. 그는 감옥에서도 온갖 일을 도맡아 한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은 요셉에게 기회의 시간이었다. 그는 거기서 일을 배우고 성장했다. 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특별 훈련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여러분의 삶에서도 이러한 훈련의 시간들이 있을 것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그리 폼이 나지도 않는 곳에서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받는 훈련들이 카이로스와 연결되는 시간이 될 지 모르는 일이다.
바로의 꿈을 해석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전략을 제시하는 요셉의 능력에 바로와 신하들은 호감을 느낀다. 바로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요셉에게서 영적 권위를 느낀다. 그리하여 그에게 자신의 전권을 넘겨주며, 그를 온 애굽의 총리로 삼는다. 자신이 끼고 있던 인장 반지를 빼서 요셉의 손가락에 끼워 주고, 그를 자신의 병거에 다음가는 병거에 태운다. 바로는 그에게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의 이름을 지어 준다. ‘사브낫바네아’는 이집트식 이름을 음역한 것이다. “신이 말한다. 그리고 그는 살아있다”란 뜻이다. 어쩌면 이 이름은 요셉의 삶을 잘 표현하는 것일지 모른다. 하나님은 요셉의 삶에 말씀하셨고, 그 말씀은 그가 존재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제사장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여 첫아들을 얻고, 그의 이름을 ‘므낫세(מנשה)’라고 짓는다. 히브리어로 ‘나싸(נשה)’는 ‘잊어버리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라는 뜻으로 요셉은 그 아들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므낫세를 얻기까지 요셉에게는 긴 상처의 시간들이 있었다. 13년 동안 요셉에게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던 깊은 마음의 상처가 있었다. 그러나 요셉은 총리가 되고 나서 자신에게 벌어졌던 모든 사건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더이상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게 된다. 그는 첫 아들을 얻으면서 그 모든 고난의 시절을 잊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요셉은 둘째 아들의 이름을 ‘에브라임(אפרים)’이라고 짓는다. ‘에프랏(אפרת)’은 ‘열매를 많이 맺음’이란 뜻이다. 에프라임(אפרים)은 히브리어 쌍수로 ‘두 배의 결실’이란 뜻이다. 그는 둘째 아들을 얻으면서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라고 고백한다. 요셉이 번성한 것은 다른 곳이 아니라 그가 고난을 겪었던 땅에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요셉의 성공에 주목한다. 그의 형통했던 ‘에브라임의 시간’에 주목하며 요셉의 형통이 자신의 삶에도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그러나 에브라임의 형통은 고난의 시간이었던 ‘므낫세의 시간’이 없이 온 것이 아니다. 사실 ‘므낫세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가’가 ‘에브라임의 형통’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므낫세의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삶에게도 잊어버리고 싶은 므낫세의 시간들이 있을 것이다. 내 자신이 인생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남들에 의해서 부당하게 이끌려온 삶의 시간들이 있을 것이다. 요셉은 그 시간에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자신의 인생을 해석했다. 그의 비참한 현실을 내버려 두지 않고, 그 현실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묻고, 그 일을 열심히 감당하며 고난의 시간을 통과했다. 그리고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라고 고백하며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므낫세의 시간을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 시간을 감수하며 하나님과 동행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더 큰 목적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시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연결된다. 주재원으로, 유학생으로 이스라엘에서의 시간들은 분명 이전보다 더 낯설고 힘든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은 므낫세의 시간이며, 연단의 시간이다. 이 기간에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환경이나 사람들은 사실 나를 에브라임의 축복의 시간으로 인도하는 훈련 교관들인 셈이다. 요셉의 형제들과 보디발의 아내, 술 관원장…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요셉을 훈련시키셨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훈련된 요셉을 바로 앞에 설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바로는 요셉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요셉에게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한다. 그의 지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잠언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경외했기에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도 뿌리칠 수 있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갈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나는 것이 그가 지켰던 원칙이었다. 지혜는 그가 노력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생겨난 것이다. 그리하여 요셉은 결국 당대 제국의 바로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산 것이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요셉은 2년 연장된 감옥생활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감옥처럼 여길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는 커녕, 빨리 이 인생의 감옥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 하고 살 수 있다. 그러나 고통스런 그 자리가 나의 운명이 바뀌는 모판이 될 수 있다. 나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내동댕이 쳐지고, 수동적으로 이끌려 갈 때, 우리는 더욱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 안에 서는 연습을 해야 하다. 그랬을 때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말한다. “Miketz is the space we make in our minds for the things not under our control. The name of that space is faith. (Sacks, Jonathan. Genesis: The Book of Beginnings) “’미케츠’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해 마음 속에 만드는 공간이다. 그 공간의 이름은 믿음이다.” 우리가 잊고 싶은 ‘므낫세의 시간’과 우리가 형통하게 되는 ‘에브라임의 시간’ 사이에는 분명 간격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간격을 믿음으로 채워야 하는 것이다.
이제 내일이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하는 날이다. 이사야는 메시아의 오심을 이렇게 예언했다. 사 11: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예수님 역시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으로 충만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고난이라는 므낫세의 시간을 통과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메시아가 되셨다. 하나님의 영으로 나의 삶을 채워야 우리는 현실 속에서 역사하실 하나님의 전략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 전략이 있어야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를 위해 그가 하실 일을 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이 임할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힘든 상황을 탓하거나, 나를 부당한 상황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더이상 원망하지 말고, 우리는 내 생애에서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하실 일을 기대해야 한다.
한 해를 돌아보며 한 해 동안 내가 받았던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다면 그것이 치유되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힘들었던 일을 잊어버리고,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도 용서하는 결단을 할 수 있길 바란다. 내 모든 고난의 일을 잊어버리는 ‘므낫세의 은혜’가 있을 때,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는 ‘에브라임의 은혜’가 열리게 될 것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살아가는 은혜가 있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