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12월 31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1 진정한 화해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창 44:18)
이스라엘에 역대 초강경 극우 정권이 출범했다. 많은 언론들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이 더 깊어질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서로 원수였던 사람들이 화해를 이루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올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요셉이 형제들과 화해를 이루는 장면이 나온다. 요셉은 자신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들에게 복수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형제들을 용서했고, 그들과 화해를 이루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인생이 내려가는 것을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요셉의 인생이 한없이 내려가기만 했을 때 그는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요셉이 당한 것을 다 당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형들에 의해 다른 나라에 노예로 팔려갔다. 거기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13년 동안 자유를 잃었다. 그리고 가족과 헤어져 홀로 22년의 세월을 보냈다. 요셉의 마음은 형들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애굽의 2인자가 되어 충분히 복수를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요셉은 그러한 감정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형제들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한다. 창 45:5, 7-8,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자신이 처음 느꼈을 비통함에 지배당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형들을 위로하고 배려하는 따뜻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요셉을 형제들보다 먼저 애굽으로 보내셨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고,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기에 요셉의 고통이 멈춘 것이다. 그의 과거가 정리되고 그가 받았던 상처가 더이상 상처로 남지 않게 된 것이다.
후에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형제들은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를 할까 봐 또 두려워하게 된다. 그 때 요셉은 이렇게 말한다. 창 50:19-21,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그의 과거 전체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재구성했다. 그는 더이상 자신을 형제들에 의해 희생 당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 여러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사명을 맡은 자로 보았다. 그에게 일어났던 모든 고통의 순간들은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필요했던 것임을 그는 깨달았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이 죄책감 아래 짓눌려 살지 않도록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한다. 그것을 통해 그 스스로도 형제들에 대한 원한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이처럼 그의 과거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기에 그는 분노와 복수심이라는 부정적 감정에 매여 살지 않았다. 만약 그가 과거를 재구성 할 수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미래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집중하여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할 수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구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과거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지만 과거에 대한 이해를 바꿈으로 그의 미래를 바꿨다. 이처럼 용서는 우리를 과거로부터 해방시킨다. 요셉의 용서는 그들 형제들의 과거의 죄책감도 해방시켰다. 그리하여 그들이 요셉의 용서와 사랑을 알았을 때 그들은 요셉과 입맞추며 서로 안고 통곡했다. 이처럼 우리가 용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포로가 아닌 것이다.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아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곡하는 때가 올 것에 대해 예언한다. 슥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여기서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이방나라들과 싸우다가 죽는 메시아의 모습이 그려진다. 랍비들은 메시아가 죽는다는 예언에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승리의 아이콘인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죽어야 하는가?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랍비들은 두 메시아 사상을 제안한다. 이들에 의하면 메시아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마시아흐 벤 다비드(משיח בן־דוד),’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 메시아다. 그러나 이들에 의하면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오는 길을 예비하는 메시아가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마시아흐 벤 요세프 (משיח בן־יוסף)’, 요셉의 자손 메시아라는 것이다. 그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고난 받는 메시아다. 요셉이 22년 동안 엄청난 고난을 받았던 것처럼 요셉의 자손으로 오는 메시아 역시 고난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 받는 종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기서도 메시아가 찔림을 받는다고 표현된다. 탈무드에 보면 스가랴서에서 찔림 받는 사람이 바로 요셉의 자손 메시아이며, 그는 죽지만 다시 부활할 것이라고 말한다.그런데 우리는 이 고난 받는 종으로 오신 메시아의 모습이 초림하신 예수님에 의해 완벽히 나타난 것을 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버림 받고 은 20전에 팔린 것처럼 예수님도 그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버림 받고 은 30전에 팔렸다. 죽은 것처럼 여겨졌던 요셉이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도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고난을 통과한 요셉이 온 애굽을 통치하는 권세를 받은 것처럼 십자가를 통과한 예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만왕의 왕으로 권세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왜 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요셉의 자손 메시아로서의 면모가 있지만 그들의 원하는 메시아의 자격을 다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현대 유대교의 기틀을 세운 12세기 유대 철학자 람밤은 자신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를 이렇게 정의한다. “그는 유다 지파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다. 그가 유대인들을 토라의 길로 되돌릴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에 나가 싸울 것이다. 이 일 후에 그는 성전을 짓고, 모든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데려 올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그들이 기다리는 이상적인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묘사하는 이 두 메시아의 모습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분이다. 예수님은 이천 년 전 이스라엘과 열방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다. 이 때 예수님은 ‘요셉의 자손 메시아’로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메시아’로, 장차 모든 악의 세력을 심판하고 평화의 시대를 여는 메시아로 올 것이다.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그는 고통스런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는 죽기 위해 태어난 메시아였다. 유대인들에게 그러한 예수는 단지 실패한 메시아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정하신 위대한 승리와 영광은 그 고통스런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 골 2:13-15,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십자가에서 우리를 정죄하던 문서가 소멸되었다. 십자가에서 세상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무력화되었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는 사해지고 하나님의 승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죄와 불의, 차별을 무너뜨리는 능력이 된 것이다. 진정한 승리와 구원이 세상의 권력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엡 2:13-14,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십자가에서 서로 원수 되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화해를 이루는 길이 열렸다.하나님은 이 일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가능하게 하셨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일이 언제 가능하게 될까?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이 찌른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임을 알고 통곡하게 될 때이다. 요셉의 형제 중 유다는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에게 가까이 나아간다. 이번 주 토라포션의 제목이 ‘바이가쉬 (ויגש)’인데, 이는 ‘그리고 그가 가까이 가다’란 뜻이다. 유다가 요셉에게 가까이 갔을 때 그는 결국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노예로 팔아버렸던 요셉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모든 형제들과 함께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경멸했던 예수께 가까이 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거부했던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임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때 그들은 통곡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버린 동족 유대인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은 그 모든 고난이 자신에게 허락되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기 위해서 작정하셨기 때문임을 알고 계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형제인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깨닫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들과 입을 맞추며 끌어 안고 통곡할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서 그분의 고난과 죽음이 가져다 준 승리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창에 찔려 피 흘리신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그 분 앞에서 그분의 찔림이 나의 죄 때문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 때 우리는 통곡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통곡하며 울 수 있을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화해하지 못할 관계는 없게 된다. 우리가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값없이 용서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형제 화해는 마시아흐 벤 요세프, 그분이 흘리신 피를 통해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 이 ‘바이가쉬’의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그 분께 가까이 가서 만왕의 왕 되신 그분이 나를 용서하고 더욱 사랑하기를 작정하고 기다리고 계신 분임을 발견하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그리하여 그분을 통해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관계가 정리되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예수님은 장차 ‘마시아흐 벤 다비드’, 다윗의 자손 메시아로 오실 것이다. 바라기는 그분의 영광스런 대관식을 함께 기다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란다. 그 날이 오기까지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며 진정한 화해의 기쁨을 누리며 사는 자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