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1월 7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2 확실한 시작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창 50:26)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창세기의 마지막 토라포션이다. 천지창조로 시작된 창세기의 이야기는 요셉을 애굽에서 입관했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장면이 있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아브라함은 새로운 삶의 여정을 떠났다. 하나님은 그의 손자 야곱에게도 동일한 약속을 하셨다.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야곱 역시 이 말씀을 따라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창세기는 여전히 성취되지 않은 약속을 남긴 채 요셉이 애굽에서 관에 넣어지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영화 스토리에 익숙한 사람에겐 뭔가 아쉬운 결말이다. 우리의 삶에도 늘 아쉬운 결말들이 있다. 우리는 많은 기대 속에서 한 해를 시작한다. 그러나 한 해의 마지막에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여전히 성취되지 않은 목표들이 있다. 아직 완료되지 않은 작업들이 있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의 기대들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또 한 해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 오늘 창세기의 결론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먼저 주목할 이야기는 야곱이 임종 전에 한 행동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의 제목은 ‘봐예히(ויחי)’다. “그리고 그가 살았다”라는 뜻이다. 야곱은 그의 인생 마지막 17년을 애굽에서 살았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 것이 없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요셉은 야곱이 위독하다는 말에 급히 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 때 야곱은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말한다. 창 48:3-4,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야곱은 이 말을 왜 요셉에게 하고 있는 걸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지만, 그 언약에 대한 소망이 다음 세대를 통해 계속 이어져야 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겠다고 말한다. 창 48:5-6,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굳이 자신의 아들로 삼으려 한 이유가 뭘까?
야곱은 자신의 가족과 후손들이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기까지 긴 시간을 그곳에 머물게 될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후손들이 큰 민족을 이루었을 때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살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요셉의 자녀들이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태어나 애굽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자랐다. 그들의 어머니는 ‘아스낫’이라는 애굽 여인이었다. 따라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그런 어머니 밑에서 결코 유대인으로 자라날 수 없었던 것이다. 야곱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애굽에서 태어났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자신의 후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어와 문화가 다른 그들을 자신의 다른 아들들이나 그들의 자녀들이나 곱게 받아줄 리 만무했다. 야곱은 자신의 후손들이 서로를 용납할 만한 조건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가 생각해 낸 것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아들이 되면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상속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야곱은 이 두 손자에게 ‘너희는 내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들이 자신의 아들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후에 요셉을 대신하여 열 두 지파의 일원으로 온전히 자리매김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야곱이 축복할 때 그의 오른손을 차남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이다. 오른손은 능력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요셉은 당연히 장자 므낫세에게 오른손이 얹혀지기를 기대했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오른손을 들어 다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야곱은 이렇게 반응한다. 창 48:19,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야곱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다. 그는 출생의 순서보다 하나님의 주권이 더 높이 있음을 알았다.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했고, 인간의 상식이 아니라 그 섭리에 따라 그들을 축복한다. 이 야곱의 축복대로 차남이었던 에브라임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을 이끄는 장자지파가 된다. 여호수아가 이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고, 성막은 에브라임 지파 땅인 실로에 세워진다. 그리하여 에브라임 지파는 전체 이스라엘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야곱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기는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야곱은 이어서 자신의 아들들을 축복하기 위해 그들을 불러 모은다. 창 49:1,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후일에 당할 일’이 뭘까? 그것은 야곱의 자녀들이 미래에 맞이하게 될 그들의 운명일 것이다. 그런데 야곱은 2절에서 이렇게 또 말한다. 창 49:2,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2절에서는 ‘후일에 당할 일’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 이유를 랍비 라시는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야곱은 후일에 당할 일을 밝히려고 시도했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그에게서 물러갔다. 그래서 그는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야곱은 미래를 내다보고 그것을 알리려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이것이 유대인 영성의 근본적인 특징이라고 말한다. 즉 유대인들은 인간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선택으로 미래를 만든다고 믿는다. 인생의 대본은 아직 작성되지 않았고, 미래는 결정된 것이 아니라 열려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나는 이들의 믿음에 동의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운명을 믿었다. 그들은 신전에서 내려진 신탁에 귀를 기울였다. 신탁을 들은 사람은 그 신탁이 예견한 일을 피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애를 쓰면 쓸수록 그들의 행동은 오히려 그들에게 선언된 운명을 앞당기는 원인이 된다. 여기서 고대 그리스의 비극(tragedy)이 탄생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는 비극이란 단어가 없다고 한다. 그것은 그들이 운명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운명을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대표적인 예가 히스기야 왕이다. 그가 병들었을 때 그는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예언의 말을 듣는다. 왕하 20:1,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죽음을 맞이하라는 것이 그에게 운명처럼 떨어진 신탁이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기도한다. 왕하 20: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진정한 기도는 운명을 바꾼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의 생명은 15년 더 연장된다. 유대인들은 이처럼 숙명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노벨상을 수상했거나 성공한 유대인들 중에는 학교에서 문제아였거나, 그들은 아무 것도 되지 못할 것이란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었다.
요셉 역시 자신의 운명을 바꾼 사람이었다. 그의 인생은 구덩이에 던져졌고, 감옥에 갇혔었다. 그의 운명은 비극으로 끝날 가능성이 너무도 컸다. 그러나 혹독한 운명에서 그를 지켜준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많은 사건들을 자신의 감정에 따라 반응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해결되도록 믿음으로 반응했다. 그는 자신들에게 복수를 할까 봐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창 50:19-21,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기에 과거에 대한 원망과 미래에 대한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형제들을 용서하며 온 가족을 화해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창세기의 마지막은 이처럼 가족 안에서 용서와 화해를 이루는 이야기다. 야곱은 그의 손자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했고, 그것은 가족들 안에 서로를 용납하게 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요셉은 그를 노예로 팔았던 형제들을 용서했고, 이것은 열 두 아들들이 장차 열 두 지파가 되는 기초가 되었다. 가족이 세워졌기에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주목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의 결론은 관계의 회복이다. 성공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이것은 결코 화려한 결말이 아니다. 그러나 관계가 회복되었기에 출애굽이 시작될 수 있었다. 이처럼 관계가 회복될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 따라서 관계의 회복은 우리 인생의 다음 여정을 위한 가장 확실한 시작의 기초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기 원한다 뭔가 더 확실한 미래를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특히 연초가 되면 운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운명을 의지하는 사람은 숙명론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인생을 선택하거나 변화시키려는 의지 대신 주어진 운명에 묶여 사는 것이다. 그런 운명을 바꿔보려고 굿을 하거나 부적을 사서 붙이기도 한다. 이러한 숙명론은 불신앙이다. 지금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이끄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미래의 일에 관심을 가지며 운명과 예측에 주목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고, 그 방향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손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어야 한다. 우리에게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다. 우리가 계획하고 기대했던 일들이 틀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섭리일 수 있다. 새해가 되었어도 여전히 도달하지 못한 목표와 넘어야 할 산이 나를 가로막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의 대본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운명은 없다. 우리는 실패할 운명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은 성공하도록 예정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선택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새해에 많은 덕담을 하는데, 지난 주 한 지인이 페이스북에 이런 글귀를 올렸다. “Our hope is not in the new year, but in the one who makes all things new” 우리의 소망은 ‘새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주목하며 그분의 섭리를 따르는 사람만이 소망스런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주목하는 사람은 감정에 따라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다. 끊임없이 용서하고 용납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다. 바라기는 지금 내게 주어진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며, 새해 가장 확실한 시작의 기초를 세워가는 우리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