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1월 14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3 다스림의 권세를 회복하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오늘부터 출애굽기를 시작한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대위임 명령이 나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명령이다. 출애굽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출 1: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그들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애굽 온 땅에 충만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루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다스림의 영역이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였기에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우리 인생도 먹고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수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다스림의 영역을 회복하지 못한 채 우리는 무언 가에 묶여 살아갈 수 있다. 자유를 갈망하나, 애굽의 세력이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열어 가실 미래를 살기 보다는 과거에 머물러 살게 된다. 그런 우리에게 출애굽이 필요하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다스림의 영역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오늘 그것을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누구의 지배를 받는가’ 그것이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 바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바로는 최고의 신으로 숭배되는 태양신 레의 아들이었다. 그는 지상에서 신의 대리자였다. 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고 만물을 통치하는 권력자였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 묘사하는 바로의 특징이 있다. 먼저 그는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는 고대 이집트 통치자를 가리키는 통칭이지 이름이 아니다. 출애굽 당시의 바로는 ‘요셉을 알리 못하는 새 왕 (출 1:8)’으로 묘사된다. ‘알지 못한다’가 히브리어로 ‘로 야다(לא ידע)’이다. 그 왕은 또 모세에게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출 5:2)’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로 야다(לא ידע)’란 표현이 사용되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당시 바로의 특징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속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온통 자신이 그들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것이었다. 출 1:13-14,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자신들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관심조차 없는 왕 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노동은 고된 노역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일, 노동은 히브리어로 ‘아보다(עבדה)’인데, ‘종살이 하다, 노동하다’라는 뜻의 동사 ‘아바드(עבד)’에서 온 말이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몰랐던 바로와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상황을 아시는 자로 묘사된다. 출 2:24-25,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다’라는 표현에서 ‘야다(ידע)’라는 동사가 씌였다. ‘하나님이 그들을 아셨다’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듣고, 기억하고, 보고,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탄식하고 있는 어려움도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보고, 아시는 분이시다. 우리 인생에 고통받는 지점을 아시고, 거기서 출애굽 해야 할 필요를 먼저 보시는 분이시다. 우리 인생의 희망은 이처럼 우리를 먼저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와 맞서기를 주저하는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출 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은 여기서 출애굽의 목적을 말씀해 주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출애굽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지 정치적인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을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압제 아래 신음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은 ‘일하라’는 것이었다. 히브리어로 ‘일하다’는 ‘아바드(עבד)’다.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가치를 그들이 만들어내는 노동의 양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그들을 놓아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바로의 밑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해야 할 일은 아바드, 고된 노동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이 애굽에 머물며 고된 노동으로 신음해야 할 존재가 아님을 아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가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노동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예배하는 존재였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인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구절에서 사용된 ‘섬기다’라는 단어 역시 히브리어로 ‘아바드(עבד)’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노동하는(아바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아바드)’ 자로 만들기 원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의 권력자 밑에서 노동만 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한 분을 섬기며 예배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출애굽기에서 묘사된 하나님은 바로와 달리 이름을 가진 자로 묘사된다.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에흐예 아쉘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라고 자신을 소개하신다. 영어로는 “I am who I am,” 한국어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지 않은 번역이다. ‘에흐예 아쉘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는 헬라어로 ‘ego eimi ho on’으로 번역된다. ‘스스로 있는 자’, ‘존재의 근원’을 뜻한다. 그러나 이렇게 번역하면 하나님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하나님이 된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미래시제로 번역한다. “I will be what I will be,” 즉, ‘나는 미래 시제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내가 어떤 하나님인지는 앞으로 내가 하게 될 행동을 통해서 알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행동하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 수 없었다. 하나님은 지금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시며 도전하신 것이다. “내가 이전에 너희가 본 적 없는 일을 행할거야. 노예 제도?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 아니야. 애굽 제국? 그것은 난공불락의 성이 아니란다. 너희가 비록 힘없고 작은 민족일지라도 너희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면 너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했던 건 이렇게 자신를 알리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행동할 때 그들은 더이상 다스림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며 이 땅을 다스리는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는 이처럼 바로와 하나님을 비교하며 너희는 지금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너희는 누구와 함께 너희의 미래를 살아갈 것인지를 묻고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관념 속에 머물러 있는 분이 아니다. 고통받는 백성들의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현실을 바로 잡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제국이 아무리 강력해도 그것을 흔들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유대인들은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늘 자신들의 미래에 행동하실 하나님을 바라봤다. 유대 민족만큼 많은 고난을 경험한 민족도 없을 것이다. 그들을 전멸하겠다고 덤벼든 시도들도 많았다. 앗수르, 바벨론, 로마 제국이 그랬다. 페르시아의 하만이 그랬고, 히틀러가 그랬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고통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을 위해 장차 행동하실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을 멸절시키려던 제국은 다 사라졌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렘 31:35-36, “낮에는 해를 주셔서 빛을 밝혀 주시고, 밤에는 달과 별들이 빛을 밝히도록 정하여 놓으시고, 바다를 뒤흔들어 파도가 소리 치게 하시는 분, 그 이름은 만군의 주이시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정해진 질서가 내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언제까지나 한 민족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하나님은 지금의 역사 속에서도 이 약속을 지키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분이 열어 가실 미래를 살아가기 원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어려움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애굽에 그저 머물며 한숨 짓고 살아 선 안된다. 환경과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절망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과거 우리를 인도하신 분이시지만, 지금 우리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 가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필요하다면 우리를 압제하는 권력도 바꾸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일을 행하기 원하신다. 그 하나님께 믿음을 두기 바란다. 그 하나님과 미래를 준비하기 바란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가 누구에게 속했는지, 그 소속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 속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미래를 책임 지실 하나님께 속해 있다. 다스림의 권세는 세상의 주권자가 주는 것이 아니다.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고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다스림의 권세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을 경외하며 그 분을 섬기는 데서 나온다. 하나님 한 분을 예배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 바로 다스림의 권세인 것이다. 바라기는 2023년 새해에 여러분의 직장과 가정, 학교에서 출애굽의 역사를 경험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과거 내게 익숙한 자리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이 이끌어 내실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게 되길 바란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한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청지기로 다스리는 권세를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