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1월 21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4 하나님의 설득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출 7:6)
우리는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설득을 당하며 살아간다. 누군가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싶을 때 우리는 설득을 시도한다. 그런데 저항하는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버섯을 싫어하는 유창이에게 버섯이 얼마나 몸에 좋은 음식인지 아무리 설명해도 잘 설득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저항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설득하실까?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좀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 모세가 나온다. 저항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설득하셨을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애굽이라는 현실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곳을 빠져나오는 데는 엄청난 힘의 전환이 필요했다. 당대 최강의 제국과 그 제국의 권력자 바로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백성을 보내라’는 모세의 말에 바로는 그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응징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가중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신음했다. 그들은 길에서 모세와 아론을 발견하고서 그들에게 따진다. “너희 때문에 바로가 우리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어. 너희가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고 있어.” 이런 백성들의 반응에 모세가 당황했다. 그는 곧바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소연한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화가 난 모세에게 하나님이 설득을 시도하신다. 출애굽의 계획을 그에게 알리신다. 출 6:1,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누르고 있는 바로의 손보다도 하나님의 손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말씀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여호와’라고 자신을 알리신다. ‘여호와’는 행동하시는 하나님,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은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모세에게 과거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를 위해 행동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실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출 6:6-7,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여기서 출애굽이라는 구원 계획을 실행하시려는 하나님의 행동이 네 개의 동사로 나타난다. 첫번째는 ‘빼내다’이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했다. 그들은 탄식하며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 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다. 기억하시는 하나님이 이제 행동하기 시작하셨다. 우리의 인생과 역사의 희망은 이처럼 기억하시는 하나님께 있다.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은 사람을 노예로 살게 하는 시스템을 상징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무거운 짐을 벗어나지 못한다. 노동의 짐, 죄의 짐 밑에서 그냥 신음하며 산다. 이런 시스템에 잘 적응하며 사는 사람들, 맷집이 강한 사람들이 문제다. 차라리 힘들다고 탄식하며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이 행동하실 텐데, 하나님 앞에서는 약한 게 은혜다.
하나님의 행동을 나타내는 두번째 동사는 ‘건지다’이다.지난 주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예배하는 자’,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인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건지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안락한 삶을 제공해주시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건지다’라는 동사 ‘호쩰티’는 ‘나짤’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나짤(נצל)’은 ‘구출하다, 해방하다, 분리하다’라는 뜻이다. ‘헤이(ה)’가 붙어서 ‘분리시키다’라는 사역의 의미가 있다. 애굽에서 빼낸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애굽의 잔재들이 남아 있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분리해 내셔야 했다. 출애굽하여 광야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이 올 때마다 애굽을 그리워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려 했다. 구원 받은 성도들도 힘든 일이 닥치면 옛 생활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구원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옛 생활의 잔재를 처리하지 못하여 옛 생활을 왔다 갔다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옛 생활에서 완전히 빠져 나와야 우리는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동을 나타내는 세번째 동사는 ‘속량하다’이다. ‘속량하다’는 히브리어로 ‘가알티’다. 이는 ‘가알(גאל)’에서 온 말인데, ‘되사다, 기업을 무르다’란 뜻이다. 이것은 원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한다. 이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되 사기 위해 어린양이 죽임을 당해야 했다.
하나님의 행동을 나타내는 네번째 동사는 ‘삼다(take)’이다. 히브리어로는 라카흐(לקח)라는 동사가 씌였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취하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의 소유된 백성으로 취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네 가지 동사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갈망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갈망을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셨다. 그런데 그분의 갈망은 백성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출 6: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가혹한 노역으로 인해 마음이 상해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음의 상함’은 히브리어로 ‘미코체르 루아흐’이다. ‘루아흐’가 마음인데, 원래 ‘숨,’ 또는 ‘영’이란 뜻이다. ‘미코체르’는 ‘코체르’에서 온 말인데, 잘려져서 짧아진 상태를 말한다. 마음의 상함은 곧, 숨이 짧아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힘든 일을 만날 때 우리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때가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별 문제 없이 넘어갈 일도 그렇지 못할 때 마음이 상하며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생긴다. 애굽 제국의 학대가 가중됨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좌절한다. 그들은 출애굽에 대한 기대로 처음엔 기뻐했다. 그러나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오는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그들은 마음이 상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긴 호흡으로 상황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통 너머 예비된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지 못할 때 우리의 마음이 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출 6:11,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 모세가 어찌했을까? 그는 저항한다.출 6:12, “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모세는 정말 말을 잘 못했던 것 같다. 평상시 언변 때문에 낮아진 자존감이 상황과 다른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더 낮아진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쉽게 마음이 상한다. 다른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반응할 때 금새 자존감이 떨어진다. 그러면서 우리는 내 안에서 안 될 이유를 찾는다.
하나님은 상심한 모세에게 다른 방법으로 설득하신다. 갑자기 족보가 등장한다. 12지파가 다 나오는 것이 아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지파만 나온다. 특히 레위 지파에서 태어난 아론과 모세의 족보가 자세히 소개된다. 출 6:26-27,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내보내라 말한 사람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 무슨 말인가? 출애굽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지도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모세와 아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족보까지 나열하시며 모세와 아론이 오래 전부터 예비된 인물임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강력한 설득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여전히 설득되지 않은 듯 하다. 그는 다시 바로에게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이렇게 반응한다.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 당시 신과 같은 존재인 바로를 생각하니 그는 또다시 기가 죽은 것이다. 우리 역시 나에게 힘을 휘두를 수 있는 권력자 앞에서 스스로를 비하한다. 그러면서 안 될 이유를 찾는다.
하나님은 또다시 모세를 설득하신다. 출 7: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할지니라” 이제 모세는 입이 둔하다는 핑계를 더 이상 댈 수가 없게 된다. 하나님은 바로를 대언자로 붙여주겠다는 것과 함께 파격적인 제안을 하신다. 그것은 모세를 바로에게 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출 7:3-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열 가지 재앙을 통해 모세는 바로에게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해진다는 것을 심장이 무거워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10장 1절에서 바로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시겠다고 했을 때, ‘무겁게 하겠다’는 뜻의 동사 ‘카바드’를 사용하신다. 즉, ‘심장을 무겁게 하겠다’는 표현이다. 고대 이집트 ‘사자의 서(The Book of the Dead)’에 나오는 그림을 보면 죽은 자의 신인 아누비스가 죽은 사람의 심장을 저울에 달아보는 장면이 나온다. 죽은 자의 심장을 마아트의 깃털에 달아보는 것이다. 마아트는 ‘진실, 정의, 조화, 도덕’을 뜻하는 고대 이집트의 중심가치이다. 그런데 죽은 자의 심장이 깃털보다 가벼우면 그는 의인으로 오시리스가 있는 사후세계에 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죽은 자의 심장이 무거우면 그는 죄인으로 암무트라는 괴물이 그의 심장을 먹어버린다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겠다는 것은 그의 심장을 무겁게 하여 그를 신도, 의인도 아닌 심판의 대상인 죄인의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너의 대변자를 주겠다, 내가 바로를 처리하겠다…” 이러한 하나님의 설득으로 모세는 더이상 핑계 댈 것이 사라졌다. 그는 결국 하나님께 설득된 듯 하다. 출 7:6,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모세는 이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출애굽의 지도자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출애굽도 계획하신다. 우리를 빼내시고, 건지시고, 속량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이러한 출애굽의 역사를 위해 때로 우리를 설득하신다. 그러나 출애굽은 인간의 상식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 과정이 쉬운 것도 아니다. 나 한 사람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상황과 환경에 눌리면 꿈도 꿀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에 상처 받으면 주저앉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왕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길 원하신다. 그것을 위해 우리 인생의 출애굽을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출애굽의 도구로 우리를 어떠한 영역에서 각각 리더십으로 부르시고 세우시는 분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이런 저런 이유로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은가? 출애굽의 과정이 어려울 수 있다. 최후 승리를 바라보지 못하면 낙담할 수 있다. 루아흐, 영이 충만하지 못하거나 숨이 짧으면 환경과 상황 때문에 마음이 상할 수 있다. 원수 마귀는 우리가 애굽에 머물러 제국의 시스템 아래 그저 살아가기를 기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출애굽 하여 당신의 소유된 백성으로 살아가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우리를 지금도 설득하시는 분이시다. 바라기는 세상의 시스템을 섬기며 노예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출애굽 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