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2월 18일 설교 이익환 목사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출 24:7-8)
이번 주 토라포션의 제목은 미쉬파팀이다. ‘율례, 법규’라는 뜻이다. 토라에 나오는 미쉬파팀은 모두 613개이다. ‘하라’는 명령이 248개이고, ‘하지 말라’는 명령이 365개다. 토라에 나오는613개의 계명 중 53개가 이번 주 파라샤에 나온다. 전체 계명 중 11.5%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여기에 나오는 계명 중에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출 23:19)는 계명이 있다. 이스라엘 맥도날드에 치즈 버거가 없는 이유가 이 구절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오늘날도 이 계명을 지키는데 우리는 지키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토라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하나가 나온다. ‘나아쎄 베니쉬마(נעשה ונשמע)’라는 표현이다. 이 구절은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로 번역되었는데, 원문은 ‘우리가 행하겠다’와 ‘우리가 듣겠다’는 두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 듣는 것보다 행동하는 것을 앞세운 표현이다. 유대인들은 이 표현이 자신들의 신앙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 여기며 이 표현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나아쎄 베니쉬마’는 어떤 의미가 있는 표현일까? 랍비 아바는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토라의 계명을 지킬 때 확신을 느낄 때 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라는 뜻인 ‘나아쎄’가 ‘니쉬마’, 즉 ‘듣고 이해하겠다’라는 표현보다 먼저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이 자신들에게 합리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니까 따르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생각을 통해 우리 역시 배울 점이 있다. 그것은 ‘믿음은 이해하는 과정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것이다.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행함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는 민족이 되었다. 따라서 믿음은 그 대상을 신뢰하기 때문에 하루 하루 내딛는 도약이라 할 수 있다. 그 도약은 믿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도약이 의심과 합리적인 판단 끝에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더이상 믿음의 도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 지켜야 할 언약들을 온 백성 앞에 낭독하여 듣게 한다. 그러자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말한다. 모세는 이에 짐승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라고 선포한다. 그들이 한 언약은 피 언약이었던 것이다. 지키지 못하면 피 흘려 죽겠다는 맹세였다. 유대인들은 이 계명들을 잘 지켰을까?
오늘 본문의 미쉬파팀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계명을 보자. 출 21: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이것은 종에 관한 규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으로 살았다. 그들은 종으로 사는 게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동족을 종으로 영속화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자유케 하는 나라를 건설하라는 계명을 가장 먼저 받았다. 히브리인이 종이 되는 경우는 두 가지다. 도둑질하다가 걸려서 배상할 능력이 없을 때 종이 된다 (출 22:3). 또한 가난하게 되어 먹고 살 길이 막혔을 때 자발적으로 종이 된다 (레 25:39). 그들은 6년 동안 종으로 일하지만, 7년 째는 아무 조건 없이 자유의 몸으로 풀려나게 된다. 따라서 토라에 나오는 종의 제도는 새로운 삶을 위한 준비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종이 되어 먹고 살다가, 다시 재기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인 것이다. 이러한 제도 때문에 히브리 민족은 가난과 신분이 대물림 되지 않는다. 따라서 종의 제도는 영원한 속박을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유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였던 것이다. 자, 이 첫번째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지켜졌을까?
예레미야서를 보면 남유다가 멸망하는 시점인 약 900년 후에는 이 계명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렘 34:8-10,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한 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자유를 선포한 후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이 계약에 가담한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롭게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당시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노비를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심판의 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벨론 제국을 통한 심판이 두려워 그들은 순순히 계명을 따랐던 것이다. 자 그런데 이후 상황이 달라진다. 렘 34:11,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 그들의 마음이 변한다. 바벨론이 애굽 원군에 대응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철수하자, 그들의 마음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을 위반하고 풀어주었던 종들을 다시 노비로 삼는다. 뜻이 변했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과 자신들의 조상이 선언했던 언약을 잊었다는 말이다. 그들은 어쩌면 ‘우리가 행하겠나이다’보다 ‘우리가 듣겠나이다’를 앞세우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계명을 들어보고, 자신의 합리적인 판단을 앞세우다 보니까 노비를 풀어주는 게 너무도 아까웠던 것이다.
세상 나라에서는 종이 많아야 부자요 권력자였다. 돈과 권력의 힘을 맛본 부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쉽게 내어 놓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종을 풀어주는 것은 힘든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한 때는 종이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어 하나님의 구속과 자유를 함께 맛본 공동체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누구의 소유물로,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서로가 막아줄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족을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세워줘야 할 책임을 공유한 공동체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풀어줬던 노비를 다시 끌어다가 노비로 삼은 그들의 행동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렘 34:1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결국 유대인들은 미쉬파팀의 첫번째 법령을 지키지 않아 멸망을 선고 받게 된다. 이 계약은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시내산에서 짐승을 쪼개며 맺은 피 언약이었다. 지키지 않으면 그 짐승처럼 쪼개져 피 흘려도 좋다는 맹세였다. 결국 그들은 준행하겠다고 약속한 언약을 어김으로 피를 흘리며 바벨론의 종으로 끌려가고 만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율법의 의도와 상관없이 문자적으로 지키며 율법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는 율법주의를 비판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시대에 다 적용할 수 있는 법규를 주신 것이 아니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 나오는 53개의 법령들은 우리 시대에 그대로 지킬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법령들은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기본법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법령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상황에 맞게 적용하여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소명인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롬 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육신의 생각을 따를 때는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다. 오직 우리가 영이 이끄심을 따를 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온 종에 대한 규례를 현대를 사는 우리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안다. 어떤 임금이 만 달란트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준다. 그는 평생 벌어도 갚을 수 없는 액수를 탕감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난다. 그리고 그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독촉한다. 그가 갚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를 그냥 옥에 가둬버린다. 이 일이 임금의 귀에 들어 간다. 마 18:32-35,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용서 받은 자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가 죄 아래 팔려 죄의 노예가 되었지만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우리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죄의 대가를 갚을 능력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죄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우리가 용서 받고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너희가 값 없이 용서받은 것처럼 서로를 조건 없이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실천하며 살아야 할 법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남들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쉽게 용서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나에게 행한 모든 잘못은 그 사람이 나에게 갚아야 할 빚으로 생각한다. 그 빚을 받아낼 때까지 상대방을 마음의 옥에 가두어 둔다. 그리고 우리는 좀처럼 그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갚아야 할 죄의 대가를 탕감 받은 자들이다. 값없이 구원을 경험한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며, 서로를 자유케 해야 하는 것이다. 형제를 자유케 하지 못할 때 우리는 탐욕과 이기심과 분노의 종이 되고 만다. 그것은 스스로 멸망하는 길이다.
세상은 점점 공동체가 사라지고 있다. 승자들이 독식하고 서로를 착취하며,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 되고 있다. 세상에서 모든 다툼의 원인은 탐심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이 탐욕 사회 한 복판에서 공동체로 살아가길 원하신다. 서로의 빚을 탕감해 주고, 용서해주며 서로를 살려 주는 공동체가 되길 원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값없는 구원의 은혜가 강같이 흐르는 나라를 세우기 원하신다. 세상의 환경이 달라졌다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바꿔선 안 된다. 우리의 이해 타산을 계산해 보고 순종의 여부를 결정해선 안 된다. 손해를 보더라도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계명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합리적이지도 않고 손해 보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천국의 계산법은 다르다.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은 분명 위대한 비전이다. 그러나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작은 계명들 하나 하나를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더욱 소중한 일이다. 바라기는 서로를 종으로 만들어 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유를 선포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이 정하신 계명을 따라 사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