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21 시간의 장막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3월 18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1 시간의 장막

너는 첫째 초하루에 성막 회막을 세우고” ( 40:2)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세속적인’ 이란 뜻의 영어 단어 Profane은 라틴어 profanum에서 온 것이다. ‘pro’는 ‘~앞에서’라는 뜻이고, ‘fanum’은 ‘신전’을 뜻한다. 신전 앞, 즉 신전의 바깥은 세속적인 공간이라는 의미다. 교회 문 밖만 나가도 우리는 거룩하지 않은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신전 바깥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거룩하지 않은 세상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거룩하지 않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며 살 수 있을까? 오늘 그 비결을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성막이 완성되는 장면이 나온다. 출애굽기 40장 33절은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고 기록한다. 히브리어로는 ‘봐예칼 모쉐 엣 하믈라카 (ויכל משה את המלאכה)’라고 표현했다. 이 표현은 창세기에도 나오는 표현이다. 2: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봐예칼 엘로힘 바욤 하쉬비이 멜라크토 (ויכל אלהים ביום השביעי מלאכתו)’ 모세가 성막의 역사를 마친 것은 하나님이 창조의 역사를 마친 것과 비견되는 일로 묘사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인류를 위한 집으로 세상을 만드셨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위한 거처로 성막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유사점은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 그 차이의 본질에 대해 말해준다.

히브리어로 거룩한 것은 코데쉬(כדש)고, 세속적인 것은 홀(חל)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세속적인 공간에 어떻게 존재하실 수 있을까?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인데, 어떻게 유한한 세상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유대 철학자들의 오랜 질문이었다. 이삭 루리아라는 랍비는 우주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제한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자기 제한을 히브리어로는 찜쭘(צמצום)이라고 한다. 그는 이 찜쭘(צמצום)이 물리적인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홀(חל)이라는 것이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홀(חל)과 반대 방향으로 만들어진 것이 코데쉬(כדש)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도록 우리가 비워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것 역시 우리의 자기제한, 즉 찜쭘(צמצום)의 결과라는 것이다. 우리는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나의 생각과  욕망을 내려놓게 된다. 그것이 우리의 자기 제한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나의 뜻을 무효화할 때 우리는 거룩한 것을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홀(חל)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위해 만드신 공간이라면, 코데쉬(כדש)는 우리 인류가 하나님을 위해 만드는 공간인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공간 모두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즉, 찜쭘(צמצום)이란 자기제한의 행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공간으로 성막을 완성한다. 하나님은 이 성막을 출애굽한지 1년 만에 세우게 하신다. 40:2, “너는 첫째 초하루에 성막 회막을 세우고히브리어로는 ‘타킴 엣 미쉬칸 오헬 모에드 (תקים את משכן אהל מועד)’라고 표현되어 있다. 미쉬칸은 하나님이 거하실 성막을 말한다. 이는 또한 ‘오헬 모에드(אהל מועד)’라고 묘사된다. ‘오헬’은 장막이란 뜻이고, ‘모에드’는 ‘정해진 시간(appointed time)’이란 뜻이다. 즉 성막은 다름 아니라 ‘시간의 장막’인 것이다. 같은 시간을 살기 위해 하나님은 성막이라는 공간을 만들라고 하신 것이다. 같은 시간을 살 때 우리는 같은 목적을 갖게 된다. 예배도 같은 시간 안에 있어야 같은 목적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시간을 살기 위하여 성막을 세우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은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시간을 마주하기 위해서이다. 성경은 공간보다 시간을 더 중요하게 본다. 창세기에서는 ‘거룩하다’란 단어 ‘카도쉬’가 한 번 사용되었는데, 그것이 시간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하나님은 안식일이라는 시간을 거룩하게 하셨다. 아브라함 헤셀은 ‘안식’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안식일은 생존을 위해 벌이던 잔혹한 싸움을 그치고, 개인적 갈등이든 사회적 갈등이든 모든 갈등 행위를 멈추는 날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 평화를 이루고, 사람의 내면에 평화를 이루는 날이다. 영혼과 육체를 되살아나게 하며, 최고의 우상인 돈으로부터 독립하는 날이다. 안식일은 긴장으로부터 탈출하는 , 진창 같은 삶에서 해방되어 시간 속에 있는 영원을 맛보는 날이다.”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은 시간이 인간 실존의 핵심임을 알게 하셨다. 시간은 공유의 대상이고, 공간은 소유의 대상이다. 시간의 영역에서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가 중요하다. 안식일은 사회적 지위와 무관한 날이다.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이날은 본연의 자신이 되는 복에 참여하는 날이다. 시간의 영역에서는 지배가 아니라 나눔이, 정복이 아니라 조화가 목표가 된다. 로마인들은 공간을 위해 살았다. 그들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공간을 넓히고 그 공간에 위대한 건축물들을 세웠다. 사람들은 그들이 세운 제국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봤고, 로마인들은 공간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확인했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그들이 믿었던 칼에 의해 무너졌고 역사속에서 사라졌다. 반면 유대인들은 시간을 위해 살았다. 나라 없이 떠돌던 유배지에서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에드, 즉 안식일과 절기를 지켰다. 사람들은 그들을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봤지만 그들은 시간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확인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을 위해 살았던 그들은 변변한 땅도 없었지만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40: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 만든 공간을 영광으로 채우신다. 하나님의 영광은 자기를 위해 일하지 않고 자기 시간을 포기하는 곳에서 나타났다. 성막은 인간이 자신의 스케쥴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건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다. 40:36-37,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이동하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성막 위로 구름이 떠오르면 신속히 성막을 해체하고 그 구름을 따라 이동해야 했다. 여기서 ‘나아갔다’는 히브리어로 나싸(נסע)인데, 이는 ‘장막 말뚝을 뽑다’란 뜻이다. 그들이 진을 쳤던 여정은 ‘나싸’의 명사형인 ‘마싸’로 표현되는데, 이는 ‘장막 말뚝을 뽑는 곳’이란 뜻이다. 이들은 진을 쳤던 곳에서 새로운 여행을 다시 시작했다. 그들은 잠시 머물 때에도 곧 장막의 말뚝을 뽑고 이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공간을 정복하고 그 공간에 자신의 소유를 쌓거나, 멋진 집을 짓는데,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삶의 방식이자 정체성이 되었다. 그들이 광야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안식일을 지키며 거룩한 시간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안식일에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자기 제한, 찜쭘을 모방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자신들의 뜻을 내려놓았다. 하나님은 이처럼 시간을 구별하여 자신을 제한 하는 자에게 영광으로 나타나셨다. 그들을 거룩과 생명으로 옷 입혀 주셨다.

이처럼 안식일은 자기 제한의 시간이다. 안식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에 연결되는 시간이며, 하나님의 목적으로 빚어지는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의 장막을 세워야 한다. 시간의 장막을 세울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며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우리 삶 속에 시작되는 것이다. 아브라함 헤셀은 또 말한다. 우리는 한 주에 엿새 동안 공간의 사물이 부리는 압제를 받으며 살지만, 안식일이 되면 시간 속의 거룩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 힘쓴다. 사람의 지배와 사물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길은, 공간 속에 있는 사물을 탐내지 않고 시간 속에 있는 영원한 보물을 탐내는 것이다. 한 주 내내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을 탐내는 것이다.”

거룩과 세속은 공간적인 면에서 분명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 세계에 모두 연결되어 계신다. 하나님은 일주일에 6일 우리가 일하며 창조할 수 있는 세속 공간인 ‘홀(חל)’을 만드셨다. 일곱째 날 우리는 우리가 그분의 창조물임을 인정하며 우리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을 위한 공간인 ‘코데쉬(כדש)’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시간의 장막을 세워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와 영광을 체험할 때 우리는 성전 밖의 세속 공간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는 나의 능력을 발휘하여 뭔가를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머무는 곳이 어디이든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시간의 장막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제한하며 하나님을 위한 시간의 장막을 세울 때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으로 우리를 입히신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해서도 자기 제한, 찜쭘을 행해야 한다. 결혼 생활에서도 자기 제한이 필요하다. 배우자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줄 때 우리는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제한은 다른 사람들이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며,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영광으로 우리의 삶을 채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의 장막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며 영원을 얻을 수 있게 하셨다. 공간을 지배하고 소유를 확장하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가 되지 않길 바란다. 요즘  Chat GPT가 화제다. Chat GPT가 뭐냐고 ChatGPT에게 물어봤다. 그러니까 이렇게 대답했다. “ChatGPT OpenAI에서 개발한 대규모 언어 모델 하나입니다. GPT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 약자이며, 인공지능 분야에서 자연어 이해와 생성에 사용되는 인공신경망 모델입니다. ChatGPT 이러한 GPT 모델을 사용하여 대화를 생성하고 이해할 있는 인공지능 챗봇입니다. (ChatGPT is one of the large-scale language models developed by OpenAI. GPT stands for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 which is an artificial neural network model used for natural language understanding and generation in the field of artificial intelligence. ChatGPT is an AI chatbot that uses such GPT models to generate and understand conversations.)” 많은 전문가들이 앞으로 Chat GPT가 구글을 대체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앞으로는 데이터를 많이 확보하는 자가 공간을 지배하고 소유를 확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 영원은 공간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시간의 장막 앞에 머문 자에게 허락되는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시간의 장막을 세우고, 그곳에서 거룩한 순간을 마주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세속 사회에서도 하나님의 거룩을 맛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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