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4월 1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2 희생의 비밀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레 9:23-24)
지난 주부터 레위기가 시작됐다. 히브리 성경의 레위기서 제목은 ‘봐이크라(ויקרא)’이다. ‘그리고 그가 불렀다’란 뜻이다. 출애굽기의 마지막에서 성막이 완공되었지만 하나님이 부르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성막 안으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런데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성막에서 모세를 부르셨다. 그 때 모세는 비로소 성막 안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오도록 초대하시는 분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과 하나됨을 느낄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발견하고,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레위기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초대하는 책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서 레위기서는 희생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소개한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 되는 도구가 될까? 오늘은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다. 레 1: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제물을 드려야 했다. 죄 있는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면 죽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죄에 대해 경계하시고, 그 죄를 심판하셔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셨다. 불완전함이 우리 인간 조건임을 이해하셨다. 그래서 실수하고 죄를 반복하는 인간이 그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주셨다. 그것이 구약의 희생제사였다. 죄인인 인간을 대신해서 다른 짐승이 피 흘리며 죽게 하신 것이다. 그 속죄의 제사로 인해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였고, 은혜였다.
2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히브리어로 ‘코르반(קורבן)’이다. 그런데 이것은 ‘카라브(קרב)’라는 동사에서 온 단어다. 카라브는 ‘가까이 가다’는 뜻이다. 따라서 희생 예물인 코르반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수단인 것이다. 왜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우리의 잃어버린 영혼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손상된 우리의 심령이 치유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또한 죄로 인해 파괴된 관계들이 다시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 예물을 드리며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것이 ‘구약의 예배’였다.
희생 제물은 히브리어로 ‘제바흐(זבח)’다. 이것은 ‘가축을 죽여서 드리는 제물’을 뜻한다. 이 희생 제물의 특징은 자신의 소유 중 가장 가치 있고 흠 없는 것을 드리는 것이다. ‘희생(犧牲)’이란 단어에서 희(犧) 자는 소 우(⽜)와 양 양(⽺)과 빼어 날 수(秀), 그리고 창 과(⼽)로 이루어져 있다. 희생 제사를 지낼 때 소(⽜)나 양(⽺) 중에서도 빼어난(秀) 놈을 창(⼽)으로 잡아 제단에 바친다는 뜻이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들의 소유는 주로 가축이나 곡식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기르는 가축 중에 가장 흠 없는 것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기꺼이 희생할 때 가능한 것이다.
희생 제물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제물로 드려지는 짐승이 피를 쏟으며 죽는다는 것이다. 제물의 희생을 통해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이다.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것은 구약 시대 가축의 희생이 결국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직접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셨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피의 효력을 이렇게 말한다. 히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기꺼이 희생 제물이 되신 것이다.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에, 피를 흘려 죽을 생명을 구원한다는 원칙을 하나님이신 그분이 스스로 지키신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희생 제물은 결국 하나님 자신의 죽음과 희생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희생할 수 있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하는 희생을 힘들어하지 않는다. 하늘의 별도 따다가 주고 싶은 열정이 있다. 행복한 부부는 끊임없이 서로를 위해 희생한다. 부모 역시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말할 수 없는 희생을 감당한다. 우리는 사랑의 부르심이 있는 곳에서 희생할 수 있는 것이다.
희생이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깊은 결속이다. 레 9:22,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 아론은 백성들이 가져온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내려온다. 레 9:23-24,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하나님은 그들이 드린 제물을 받으시고,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난다. 온 백성은 경외감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생제사를 통해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백성으로 세워진다.
우리 역시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시간과 물질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과의 깊은 결속이 일어난다. 이것은 우리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시간과 물질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할 때 그 사람과의 깊은 결속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시간이나 물질을 가지고 기꺼이 서로에게 희생할 때 부부 안에, 가족 안에, 그리고 공동체 안에 깊은 결속이 일어나는 것이다. 구약 시대 하나님이 희생 제물을 요구하신 것은 인간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깊은 결속을 위해서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 인간이 생명의 능력을 얻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레위기가 소개하는 희생 제물, 코르바놋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도구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희생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나의 시간, 나의 소유를 하나님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대가없이 내어준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희생하는 것을 싫어한다. 세상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을 위해 산다. 남을 위해 희생하기 보다는 내가 살려고 오히려 희생 제물을 찾는다. 이런 세상에서 자발적으로 희생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고, 손해 보는 삶으로 여겨진다. 희생이라는 가치를 발견하고 거기에 동의하기까지 희생의 삶을 사는 건 어려운 일이다. 지금 세상에서는 ‘편안한 삶’이 우리 시대를 뒤덮고 있는 가치다. 편안한 삶을 보장받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모든 것을 투자한다. 그러나 자신이 희생해야 하는 자리에는 좀처럼 있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희생하는 것이 정말 손해보는 삶일까?
성경은 우리에게 희생적인 사랑을 하라고 권면한다.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여기서 희생제물은 헬라어로 ‘뒤시안(θυσιαν)’이다. 히브리어로 ‘제바흐’와 같은 표현이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산 제물’ 역시 헬라어 ‘뒤시안’으로 표현되어 있다. 제물은 죽임 당해 피 흘리는 것인데,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희생하는 삶을 감당하라는 의미로 적용할 수 있다. 희생은 결속을 위한 것이다. 희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결속을 이룬다. 점점 개인주의화되는 사회 속에서도 희생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공동체는 깊은 결속을 이룰 수 있게 된다. 구약 시대 하나님은 ‘희생’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제사장을 위임하여 세우셨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도 희생이라는 가치를 실현해 낼 제사장들을 세우기 원하신다. 그것은 희생이 하나님과의 결속을 이루고, 사람들 사이의 깊은 결속을 이루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또 이렇게 권면한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우리는 시대의 조류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려야 하는 시간을 앞두고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셨다. 죄인의 대표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처형되는 것은 예수님도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신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기도를 통해 분별하시고, 기꺼이 희생의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결국 예수님의 희생은 그 피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깊은 결속을 이루게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은 그 피로 구원받은 자들이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게 함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더 깊은 결속을 이루게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셨다.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희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러나 희생은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들이 정작 원하는 행복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여기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의 깊은 결속, 사람들과의 깊은 결속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결속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희생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희생이라는 가치를 발견하고 거기에 헌신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그 사랑에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희생의 비밀을 알기 때문이다. 희생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희생을 희생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희생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가장 높은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고 말씀하셨다. 자기 십자가라는 희생은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가장 영광스러운 사명이자 부르심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희생 예물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수단이다. 바라기는 하나님께 가장 귀한 시간과 물질을 드림으로 하나님과 더 깊은 결속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시간과 물질을 나누며 더 깊은 결속을 이룰 수 있길 바란다. 나의 희생을 통해 가족과 이웃, 공동체와 교회가 온전히 세워진다면 그것 만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없을 것이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희생의 소명을 감당함으로 더 깊은 결속의 기쁨을 심고 거두는 우리의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