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4월 22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4 말의 변화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레 13:3)
“험담을 일삼는 자는 시리아 땅에 있으면서도 로마에 있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예루살렘 탈무드에 나오는 말이다. 말은 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말에는 그런 위력이 있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나병환자를 다루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유대 랍비들은 이 악성피부병이 생긴 이유를 나쁜 말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성경에서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다가 나병에 걸린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나병 환자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혹 우리 영혼에 나병과 같은 상처는 없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레 13:2-3,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여기서 ‘나병’은 히브리어로 ‘짜라아트(צרעת)’다. 그런데 짜라아트는 오늘날 ‘한센병’이라고 부르는 나병과는 다른 것이다. 성경에는 옷과 집안의 벽에 피는 곰팡이도 ‘짜라아트’라고 표현된다. 따라서 짜라아트는 곰팡이균으로 인한 악성 피부병이라고 보는 게 좋다. 당시짜라아트의 증상을 점검하고 그 사람이 부정한지 정한지를 선언하는 것은 의사의 일이 아니었다. 제사장의 일이었다. 정한지 부정한지는 의료적 판단기준이 아니라 종교적 판단기준이기 때문이었다.
레 13:45-46,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자신이 나병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은 스스로 옷을 찢고 입을 가리며 자신이 부정한 자임을 알려야 했다. 그리고 병이 낫기까지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했다. 공동체와는 완전 격리되는 것이다. 여기서 ‘부정하다’는 말은 ‘불결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영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부정하다’라는 말, ‘타메(טמא)’는 종교적인 의미로 더럽혀지고 부패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 랍비들은 이 악성피부병의 주된 원인을 ‘라숀 하라(לשון הרע)’ 때문이라고 본다. ‘라숀 하라’는 ‘evil tongue, bad speech, 사악한 혀, 나쁜 말’이라는 뜻이다.
유대 랍비들은 ‘라숀 하라’가 우상숭배, 간음, 살인이라는 죄, 셋을 합친 것보다 더 나쁘다고 말한다. 그것은 동시에 세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나쁜 말이 말하는 사람 자신과 비방의 대상이 되는 사람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옆에서 듣는 사람까지 죽인다고 본 것이다. 미리암도 모세에 대해 나쁘게 말하다가 나병에 걸린다.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를 흔드는 것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결국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진영 밖으로 격리 조치된다. 그녀는 부정하게 되었고, 그 부정은 전염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공동체로부터 격리된다. 그리고 나병이 나을 때까지 진 밖에서 살아야 했다. 이처럼 짜라아트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부정한 사람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그리고 공동체와는 격리 되어 살아야 했다. 혼자 있는 그 시간은 참회의 시간이 되었고, 자신이 부정해진 죄에서 돌이켜 정결함을 얻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구약시대 라숀 하라로 인해 생긴 나병에 대해 왜 이런 회복의 절차가 필요했을까? 그것은 그만큼 말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빛이 있으라” 말씀 하시니 빛이 있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유대 경전인 탈굼은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번역한다. 하나님은 말하는 존재가 된 사람들과 언어를 통해 소통하셨다. 성경에서 이처럼 언어 자체는 거룩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를 입히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라숀 하라는 사소한 범죄가 아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을 취하여 거룩하지 않은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라숀 하라는 말하는 존재를 만드신 하나님께 대한 모독인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약 3:6,8,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혀를 다루기 힘든 이유가 뭘까? 그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해 타락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라숀 하라’는 에덴동산에서, 뱀에 의해 저질러졌다. 뱀은 간교한 말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했다. 뱀은 아담과 하와를 교묘하게 속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했다. 뱀의 교활한 말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부정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깨어지고 서로에게 있었던 친밀함도 파괴된다.
바울은 말한다.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와 사망이 합법적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성경은 사탄을 ‘참소하는 자’(계 12:10)라고 말한다. 사탄의 참소로 인해 우리 인간 관계 안에 부조화가 시작되었다. 서로를 오해 하고 미워하며 싸우게 되었다. 혀의 타락이 우리 인간 문제의 모든 근원인 것이다. 사탄의 참소와 그 영향 아래 나쁜 말을 하게 되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는 깊은 영적 상처를 받게 되었다. 우리가 지금도 아파하고 있는 영혼의 상처는 혀를 길들이지 못한 부모님을 통해 생겼을 수 있다. 또한 혀를 길들이지 못한 친구나 동료들을 통해서 생겼을 수 있다. 우리는 말을 통해 생긴 우리 영혼의 상처에 대해 슬퍼하고 애도해야 한다.
나쁜 말로 인해 생긴 상처는 구약시대 짜라아트와 같은 영적 질병인 것이다. 나쁜 말로 인해 우리는 영적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사탄은 교묘한 말을 사용하여 세상에 사망을 선물했다. 우리 인류는 이 나쁜 말로 인해 영적인 사망을 경험하고 있다. 그 말과 참소에 의해 오염되면서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구약 시대 나병환자처럼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치고 있는 듯 하다.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영혼이 그처럼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말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들은 사회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스스로 격리되는 것이다. 슬픈 일이다.
레위기 14장에는 악성피부병 환자들을 다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이 소개된다. 제사장이 진영 밖에 있는 환자를 진찰하고 그 환부가 나았으면 우슬초로 흐르는 물에 새의 피를 찍어 일곱 번 뿌린다. 그리고 ‘정하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7일을 더 장막 밖에 머물게 한다. 이어서 8일 째 되는 날 속건제를 드리게 한다. 속건제는 해를 끼친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제사이다. ‘라숀 하라’로 인해 다른 사람과 공동체에 해를 입힌 것에 대해 보상하는 제사인 것이다. 격리되었던 환자는 속건제를 드리며 완전히 죄사함을 얻게 된다. 그리고 다시 공동체로 복귀하게 된다. 따라서 악성 피부병에 대한 규례는 그들을 격리하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배제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을 다시 공동체로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 잠시 격리와 참회의 시간을 허용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한 나병 환자를 만나셨다. 그는 예수께 나아와 절하며 말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에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 그러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게 된다. 구약시대에는 나병 환자와 접촉하는 사람은 그 역시 부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은 철저한 격리를 통해 부정한 자와의 접촉을 차단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상종하지 않았던 나병 환자에게 먼저 다가가셨다. 예수님은 그 부정한 자와 접촉했음에도 그의 거룩이 훼손되지 않고 오히려 부정결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부정함을 아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정함을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악한 말로 더럽혀진 우리를 정결케 하시며, 그리하여 우리를 ‘정하다’ 선언하시며 공동체로 되돌려보내실 수 있는 분이시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 피 흘리시며, 죽음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셨다. 그 사실을 믿고 주님의 보혈을 우리 마음에 뿌릴 때 우리는 모든 부정에서부터 정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가만 보면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이 부정함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 ‘나는 부정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나 권위자로부터 ‘라숀 하라’, 자신에 대한 나쁜 말을 들어왔던 사람들은 낮은 자존감으로 신음하며 자기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긴다. 살아오면서 주변 친구들에게 왕따나 놀림을 받았던 사람들 역시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평가와 비판의 말을 들으며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기게 된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나는 부정하다’라는 느낌을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하신 대제사장 예수님을 통해 “너는 정하다”는 선언을 받아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이상 사망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우리를 부정하게 했던 모든 나쁜 말과 사망의 영향력을 끊어내야 한다. 성경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계 12:10-11,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사탄의 참소, 라숀 하라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어린 양의 피의 능력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던 나병 환자처럼 예수님께 나아가 요청해야 한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부정하게 여기는 부분에 손을 대어 고치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 분을 통해 정함을 얻어야 한다. 그분에게 나의 부정함을 고백하며 “너는 정하게 되었다”는 그분의 선언을 들어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혀의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혀의 폭력으로 상처받은 사람은 혀의 폭력을 휘두를 위험이 높다. 보고 들은 게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혀의 변화가 필요하다. 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사람들의 혀에 나타났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120명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게 되었다. 바벨탑으로 나뉘어졌던 언어가 하나로 통일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세상이 성령 안에서 서로 소통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우리의 혀가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 그것이 방언이다. 방언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혀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다. 육이 아니다. 우리의 이성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이 아니다. 오직 영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영의 인도하심에 따라 말할 때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가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오순절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오순절에 이루어졌다. 우리는 우리의 혀를 길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혀는 변화가 필요하다. 혀의 변화를 경험한 오순절의 역사가 나에게도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말로서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로써 세상을 창조하셨다. 우리도 말로써 하나님의 킹덤을 창조해 나아가야 한다. 성령을 통해 말의 변화를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변화된 말을 통해 우리의 삶을 새롭게 창조해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