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5월 20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8 사랑의 도약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민 1:2)
우리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다. 사랑스런 사람을 사랑하는 건 쉽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쉽다. 그러나 우리는 내 스타일이 아닌 사람을 사랑하는 게 쉽지 않다. 나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을 사랑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다. 사랑은 또한 변하기 쉽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안 좋은 과거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뒷걸음질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연약함을 계속 보게 된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던 나의 감정은 서서히 식고 만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도약이 필요하다. 우리가 도약할 수 있는 사랑은 무엇일까? 오늘 말씀을 함께 살펴보며 그것을 찾게 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이번 주부터 민수기서 토라포션이 시작되었다. 민수기서는 히브리어로 ‘바미드바르(במדבר)’’이다. ‘광야에서’라는 뜻이다. 광야는 잠시 머물면 너무도 멋진 곳이다. 그러나 광야에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광야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곳이다. 만약 내가 거기에 혼자 있다면 두려움밖에는 느낄 것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광야는 ‘사랑의 도약’을 위해 필요한 장소로 나온다.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여기서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 마음이 측정되는 장소로 나온다. 풍요로운 환경에서 나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쉽다. 그러나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 환경에서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믿음과 사랑의 도약이 있어야만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며 따라갈 수 있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떠나는 여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약 일 년 만에 가나안으로 향하는 본격적인 광야 여정을 시작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여정에 앞서서 모세에게 백성들의 수를 세라고 지시하신다. 민 1:1-2,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백성의 수를 세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이제 지파별로 진을 이루어 광야를 통과해야 했다. 그런데 랍비 라시는 토라에서 숫자를 세는 행위는 하나님의 사랑의 몸짓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소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수를 세셨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수를 셀 때 사용한 표현이 “쎄우 엣 로쉬 (שאו את ראש)”라는 표현이다. ‘머리를 들게 하다’란 뜻이다. 히브리어에 다른 표현도 많은데 왜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까? 간단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군중으로 보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를 들게 하라고 명령하심으로 각각의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 하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로 카운트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오순절에 시내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세워졌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받은 그날을 하나님과 결혼한 날로 여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것을 낭만적인 언어로 표현한다. 렘 2:2,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우리 중에 결혼한 신부는 이런 맹세를 했을 것이다. “내 삶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신랑을 따라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 한 복판에서 어디든지 하나님을 따라갈 것이라고 맹세했던 것이다.
그러나 짧은 신혼의 낭만은 40년이라는 긴 광야 생활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셨을까? 왜 가나안 땅으로 바로 인도하지 않으셨을까? 광야라는 히브리어 ‘미드바르(מדבר)’는 ‘말하다’라는 ‘메다벨(מדבר)’과 발음만 다르지 같은 단어다. 성경에서 광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으로 묘사된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바람난 아내로 표현하신다. 호 2: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여기서 ‘거친 들’이 히브리어로 ‘미드바르(מדבר)’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데려가서 거기서 말로 타이르고 위로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광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소인 것이다. 호 2:15-16,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광야에서 타이르고,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바알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회복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호세아 선지자는 그들이 하나님을 내 남편, 이쉬(אישי)라 일컫고, 내 바알(בעל)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다. 이쉬나 바알은 히브리어로 모두 ‘남편’이라는 뜻이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신을 남편처럼 따랐다. 바알이 누구인가? 폭풍과 비를 주관하는 신으로 성공과 쾌락을 약속하는 신이다. 가나안 땅에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공과 쾌락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남편처럼 따랐다. 그러나 광야라는 거친 환경 속에 그들이 다시 놓였을 때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만이 나의 유일한 남편’이라는 신부의 고백을 회복하게 된다. 패망과 포로라는 거친 광야를 만나면서 그들은 하나님만이 나의 ‘이쉬’라는 고백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광야는 이처럼 당신의 백성을 순전한 신부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발동되는 곳이다. 신랑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고백한다. 호 2:19-20,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광야의 시간은 물론 쉽지 않다. 그러나 광야의 시간은 우리가 얼마나 세상 신인 바알에게 마음을 빼앗겼는지 점검하게 되는 시간이다. 세상으로 향하던 나의 욕망이 사그라지고, 원래 남편인 하나님과 맺었던 서약을 다시 기억하게 되는 시간이다. 이 광야에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네게 장가 들겠다’는 하나님의 거친 고백을 듣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경험한 제자들 역시 그들의 인생에 광야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였지만 그들이 따랐던 분이 사라진 세상이 마치 광야처럼 막막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남긴 채 하늘로 올라가셨다. 이 말씀대로 오순절이 시작되는 날,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다. 구약의 오순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토라를 받고 하나님의 신부로 세워졌다면, 신약의 오순절,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주님의 신부인 교회로 세워지게 된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제자들은 그들의 인생에서 광야와 가나안이라는 경계선이 사라진다. 그들에겐 더 이상 광야도 없었고, 가나안도 없었다. 그들의 마음엔 신랑 되신 주님을 향한 불붙는 사랑만 있었다. 그 사랑에 두려움이 없었기에 그들은 주님을 위해 어디든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오순절은 사랑의 도약이 일어났던 절기였다. 사랑의 도약이 있었던 사람들은 광야와 같은 두려운 현실을 넘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가나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광야에서 붙잡아야 할 것은 두려움이란 감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 인생의 광야에서 따라야 할 것은 우리의 이성이 아니다. 성령이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어야 우리는 광야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도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우리는 너무도 쉽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다.그것은 내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에 대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완벽하지 않고, 죄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을 거라 쉽게 단정한다. 내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기에 하나님도 나같은 사람을 별로 사랑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이고 본성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을 아셨다. 그러나 그런 우리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다.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자격이 안 돼도 하나님의 사랑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랑하기 위해 지어졌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연결되어야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DNA가 깨어나는 것이다.
며칠 전 가이 리치 감독의 ‘더 커버넌트’란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존 킨리라는 상사다. 그는 탈레반의 폭발물 수색 임무를 수행하다가 탈레반에게 생포된다. 그러나 그는 그의 현지 통역사의 도움으로 탈출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총상을 입었기에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미군 공군 기지까지 가기에는 곳곳에 있는 탈레반 검문소를 피해야 했다. 그리하여 통역사 아메드는 수레를 얻어서 산길로 주인공 존을 운반한다. 자기가 살려면 얼마든지 그를 버리고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모든 위험을 감수한 끝에 무사히 기지에 이르게 된다. 후에 본국에 송환되어 회복된 존은 그 통역사가 베푼 충성된 사랑을 잊지 못한다. 그런데 그 통역사는 탈레반에 의해 수배 명령이 떨어져 도망 다니는 상황이었다. 존 킨리는 그와 그의 가족이 안전히 미국에 올 수 있게 하기 위해 자원해서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도 통역사와 그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탈레반이 있는 마을로 들어간다. 그가 받았던 사랑 때문에 그 역시 목숨 건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느 때 목숨을 건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나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 목숨 건 사랑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이다. 바울은 말한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죽음도 두렵지 않은 사랑을 하려면 우리는 사랑의 주체를 만나야 한다.성경은 하나님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사랑의 도약을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보다 먼저 하신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 관계를 넘어서는 사랑이다.이 사랑이 있어야 우리는 연약한 사람도 먼저 사랑할 수 있다. 이 사랑이 있어야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있다. 이 사랑이 있어야 우리는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두려움이 많아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성공의 신을 모두가 따르는 이 시대에 변함없이 하나님 한 분을 선택하고 따르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 시대에 그러한 이웃을 끝까지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두려움이 많아지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말한다. 두려움 없는 사랑을 위해선 사랑의 도약이 필요하다. 신랑에게 사랑을 서약하는 신부는 신랑을 따라 어디든지 가려 할 것이다. 그 사랑에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핍박과 혼돈의 시대에 우리가 이 신부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불붙지 않는다면, 우리는 두려움 앞에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주님을 사랑하는 신부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오순절, 구약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를 받았다. 오순절, 신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받았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은 인생의 거친 광야를 지나가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따라서 인생 광야를 온전히 통과하려면 반드시 말씀과 성령의 인도가 있어야 한다. 말씀과 성령은 광야와 같은 현실을 하나님 나라로 바꾼다. 죽음과 같은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바꾼다. 그리하여 변함없는 사랑으로 광야에서도 주님을 따를 수 있게 한다. 하나님 나라 신부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특권을 가진 자이다. 사랑하는 자와 함께 한다면 우리는 광야에 있든, 가나안에 있든, 그 환경이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번 주 금요일이 오순절이다. 바라기는 이 절기에 우리 역시 하나님의 선물인 말씀과 성령을 받기 원한다. 그리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신부로 거듭나게 되길 바란다. 이것을 통해 두려움이 많은 이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이웃을 향해 사랑의 도약을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