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6월 3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0 임을 위한 행진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 6:27)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광야를 행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기 원하셨다. 그래서 아론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도를 하게 하셨다. 민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유명한 제사장의 축복 기도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중요한 절기나 회당예배의 마지막에 이 기도를 선포한다. 또한 샤밧 저녁 자녀들을 축복할 때도 사용한다. 이제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를 행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은혜와 평강 주시는 축복이 필요했을 것이다. 광야와 같은 삶을 사는 우리들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지켜주시고, 은혜와 평강 주시길 바라는 것은 당연한 바램 일 것이다. 그런데 이 기도를 자세히 보면 단순히 복을 구하라는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문에서 포인트는 ‘축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있다. 그것이 왜 그런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축복할 때 명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그 축복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민 6: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그런데 히브리 원문은 ‘베싸무 엣 셰미 알 브네이 이스라엘(ושמו את שמי על בני ישראל)’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내 이름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두라’는 것이다. 기도하는 대상 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올려 두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이름은 그 존재의 권위와 명예가 담겨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둔다는 것은 이제 이 백성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둔 자로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살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축복과 보호를 약속하시는 것이다.
이 기도문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이다. 민 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복이 있는 인생과 그렇지 않은 인생은 차이가 있다. 복이 없는 인생은 통계와 산술에 근거하여 산다. 그러나 복이 있는 인생은 하나님 나라의 경제를 산다. 예수님께서 벳세다 빈들에 가셨을 때 많은 무리들이 먹지도 못한 채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계산하기 시작했다. 빌립은 각 사람이 조금씩 먹으려 해도 200데나리온, 즉 노동자의 200일 품삯에 해당하는 돈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한다. 안드레는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많은 사람이 먹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축사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나눠주셨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손에 떡이 얼마가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축복하셨는가가 중요한 것이었다. 우리의 소유,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 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인생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 손에 있는 떡으로는 한정된 사람만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축복하시면 기적이 일어난다. 이백 만이 넘는 백성이 광야를 행진하는 것은 산술적으로 견적이 나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식탁을 베푸시고 날마다 초자연적인 축복을 허락하셨다. 이런 하나님이 축복이 있어야 광야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또한 ‘하나님은 너를 지키기 원하신다’는 내용이 있다. ‘지킨다’는 뜻의 히브리어 ‘샤마르(שמר)’는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다’라는 말이다. 목자는 자기 양을 지키기 위해 저녁에는 가시로 된 울타리를 쳤다. 그리하여 늑대나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양을 보호했다. 축복은 보호받아야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의 울타리를 스스로 걷어 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가 없다면 적들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켜주심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아야 한다. 신 32:9-10,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하나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지켜주시는 은혜가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통과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이르러서도 하나님의 축복은 이어졌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이 축복하신 풍성한 수확을 누렸다. 그러나 축복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축복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둔화시키는 작용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주셨다. 신 8:11-14,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번영을 누리면서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잃어버린다. 번영이라는 가치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섬기려는 열정도 희미해지게 된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축복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저주로 변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시길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축복의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이다. 민 6: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기서 ‘얼굴을 비춘다’는 것은 ‘호의를 베푼다’는 뜻이다. 반면 ‘얼굴을 숨긴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한다. 신 31:18,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하나님은 언제 그의 백성들을 향한 얼굴을 숨기시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그 백성들로 인해 더럽혀 질 때이다.겔 36: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를 지킨 자에게 허락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둔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은혜의 낯빛을 거두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기를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축복의 내용은 하나님의 평강주심이다. 민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여기서 ‘얼굴을 들다’는 히브리 관용 표현이다. ‘편을 들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신다는 뜻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시 118:6-7,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실 때 우리는 두려움 없이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문제나 감당이 안 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머리를 드시면 게임은 끝난다.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실 때 돌파가 일어나고 평화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드사 평강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사셨던 분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이러한 기도를 드리셨다. 요 17:4-6,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예수님의 삶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사역의 전부이자 본질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사셨고,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장 높은 이름을 주셨다. 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바울 역시 예수님의 이름을 그의 삶에 두고, 그 이름을 위해 사는 삶을 살았다. 롬 1:5-6,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그는 철저히 자신의 명예를 위해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바울은 오직 ‘그의 이름을 위하여’ 살았다. 그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빌 1:20)는 열정으로 살았다. 내 이름을 높이기 위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두고, 그분의 명예를 위해 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부르심인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름을 위해 사는 자인가, ‘그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자인가?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이름을 둔 자로 만드셨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명예와 직결되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영광이었지만, 또한 큰 책임이 따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사장은 날마다 그들을 축복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했던 것이다. 우리 역시 우리 가슴에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진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인생 광야에서 가나안 땅을 향하여 행진 하는 사람들이다. 주님을 위한 우리의 행진에 이 제사장의 축복 기도가 들려지길 바란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