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6월 10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1 절망의 치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민 11:23)
‘희망을 품지 않은 자는 절망도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길 희망했던 모세는 광야 한복판에서 절망한다. 그가 절망한 이유는 뭘까? 그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오늘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본문의 상황은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은 후 1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동안 성막이 완성되었다. 성막 안 메노라의 불도 밝혀졌다. 하나님은 은나팔을 만들어서 행진할 때 그것을 크게 불라고 명령하셨다.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올랐을 때, 그 은나팔이 울려 퍼졌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쪽 지파부터 대오를 이루며 행진을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면 열흘 안으로 가나안 땅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수기 11장에 들어와서 분위기가 급반전 된다. 본격적인 행진이 시작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잠복해 있던 진짜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인 듯 싶다. 결혼 웨딩마치가 울렸다고 해서, 같이 살 집을 마련했다고 해서 행복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진짜 문제는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모른다. 오늘 토라포션은 광야 여정에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진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첫번째 드러난 문제은 ‘원망’이었다. 시내 광야에서 바란 광야까지 오면서 백성들은 지쳤다. 그들은 광야의 상황을 참지 못하고 악한 말로 원망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원망에 불로 심판하셨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부르짖었고,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그 불이 꺼지게 된다.
두번째 드러난 문제는 탐욕이었다. 민 11: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살던 사람들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 나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기에 그 길을 따라 나선 사람들이다. 그런데 광야 길이 고생스럽자 그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욕심을 품게 된다. 그들의 탐욕은 전염력이 강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이들의 영향 때문에 울며 불평을 하기 시작한다. 광야에서 고기를 먹고 싶다는 것이었다. 애굽에서는 값없이 생선, 오이, 수박, 부추, 파와 마늘을 먹었는데 이제는 만나 밖에 먹을 게 없어서 기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모세는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듣게 된다. 자기를 따라 나선 사람들이 행복해야 지도자도 행복한 법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모세는 절망에 빠진다. 그들은 내일의 희망을 바라보지 못하고 오늘의 불편함만 생각했다. 이런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야하는 지도자 모세의 입장에서는 정말 힘 빠지고, 낙담 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도 위기는 여러차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에서도 마실 물이 없어 원망했다. 그들은 신 광야에서도 먹을 것이 없어 원망했다. 금송아지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았고, 성막도 완성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어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모세가 다시 절망에 빠진 이유는 백성들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들은 또다시 음식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하는 옛 습관으로 되돌아갔다. 모세는 변화를 희망했으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백성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절망스러웠던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하소연 한다. 민 11:13-15,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여기서 그의 대사는 온통 ‘나’ 뿐이다. 그는 극심한 자기 연민에 빠진다. 이렇게 모세에게 번 아웃이 오자, 그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지도자에서 그저 일인칭 단수 ‘나’로 전락하고 만다. 모세는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성경에는 극심한 자기 연민과 절망에 빠져 죽음을 구했던 사람들이 나온다. 선지자 엘리야도 이런 탄식을 했다. 왕상 19:4,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예레미야도 그랬다. 렘 20:14, 18,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좋을 뻔하였나니…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죽고 싶다는 거다. 요나도 그랬다.욘 4: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이렇게 절망했다. 그들은 절망의 깊은 밤을 통과해야 했다. 그들은 희망했던 바를 이룰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부딪치자 절망에 빠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려면 많은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특히 유대인들을 인도하는 것은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들의 삶의 철학은 ‘후츠파’고, 그들의 삶을 바라보며 종종 튀어 나오는 단어는 ‘발라간’이다. 모세라는 위대한 지도자도 유대인들을 인도하다가 힘들어서 절망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명자들이 절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 그들이 받은 콜링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불가능한 일에 부름 받은 것이다. 모세는 노예였던 백성을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자유인으로 만들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빼낸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애굽의 잔재를 빼내는 것은 그에게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엘리야는 왕을 비판하는 부르심을 받았다. 칼을 가진 권력자를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해야만 하는 부르심이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는 것을 말해야 하는 부르심을 받았다. 망한다는 예언의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대중의 인기와 가장 상관없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요나는 원수의 나라에 회개의 복음을 전하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적국의 백성들도 아끼신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했다. 그리하여 이들 사명자들은 다 절망했다. 차라리 죽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러한 절망도 그들 부르심의 일부였다.
리더들에게 절망은 그들이 리더이기 때문에 감당해야만 하는 리더십의 일부이다. 변하지 않는 팔로워를 보며 리더는 절망한다. 자신의 말은 허공을 울리는 반면,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사람들을 볼 때 리더는 절망한다. 그들이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무력감을 느끼면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있다. 그들이 사람들의 인기에서 멀어지면서 그들 안에 시작되는 것은 ‘나’라는 일인칭 주어의 소멸이다.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직면하며, 내 자신이 강한 존재가 아님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나’라는 자의식이 소멸되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 하나님의 위로가 찾아온다. 그리하여 자아가 소멸되고 하나님의 위로가 찾아 온 그 자리에는 오직 한 가지만 남게 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그 사람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그것만 남게 된다. 이 시점에서 새로운 위대함이 탄생한다. 이제 그에겐 ‘나’란 사람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내가 인기가 있고 없고, 사람들이 내 말을 잘 따르고 안 따르고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과 그 일에 나를 부르신 하나님 한 분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절망을 어떻게 치유하셨을까? 먼저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와 함께 백성의 짐을 나누어 감당할 70 명의 장로를 세우라고 지시하신다. 이것은 자기 연민에 빠진 모세를 위한 하나님의 멘탈 케어였다. 모세는 하나님께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라고 호소했었다. ‘나 혼자’는 히브리어로 ‘레바디(לבדי)’다. 사람들이 절망할 때 빠지는 감정이 바로 ‘나는 혼자’라는 자기 연민이다. 하나님은 이 ‘레바디’에 대한 처방으로 70명의 사람들을 세우라고 하신다. 함께 마음의 짐을 나누어 지며, 자신을 도와 줄 수 있는 동역자를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칠십 명의 장로들에게 모세에게 임한 영을 임하게 하신다. 모세는 이제 같은 영으로, 같은 것을 말하는 70명의 동역자들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이 칠십 명의 사람을 통해 ‘혼자’라는 모세의 절망을 치유하신 것이다.
모세에게는 지팡이가 있었다. 모세는 그것으로 홍해를 갈랐다. 그러나 광야에서 그 지팡이는 기적의 도구가 되지 못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민 11: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모세가 절망했을 때 그는 사고의 한계에 빠지게 된다. 그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대응한다. 민 11:21-22,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모세는 산술적 계산에 갇혀버린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해도 일이 해결될 것 같지 않을 때 사람들은 절망에 빠진다. 하나님은 사고의 한계에 빠진 모세에게 “하야드 아도나이 티크짤 (היד יהוה תקצר),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고 반문하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게 하심으로 그의 사고의 지평을 확장하신다. 문제가 드러나는 것은 사실 문제가 아니다.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가지 않는 것이 문제다. 우리 인간은 언제든 한계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그 한계 상황 앞에 절망할 수 있다. 절망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절망은 우리 인간의 조건이다. 그래서 절망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절망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주시며 그 한계 상황을 돌파하게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손을 바라보는 것이 절망을 치유하는 해법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명자들의 삶을 쉽게 만들어 주시지 않는다. 그것은 그 사명 자체가 인간의 본성을 뒤집어야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명자들은 오직 고독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얻는다. 사명자들이 힘든 건 단지 고난이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다. 고난 중에 위로를 경험하지 못해서이다. 그래서 바울은 위로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다. 고후 1: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여기 있는 여러분 한 분 한 분, 각자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가정에서 엄마가 되는 사명일 수 있고, 직장에서 리더가 되는 사명일 수도 있다. 여러분이 그것을 다 이루기까지 고난은 결코 여러분을 비껴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명자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사람의 위로와 하나님의 위로 모두 필요하다. 그것이 있어야 고난을 견딘다. 그것이 있어야 절망을 극복하게 된다. 그 절망의 밤을 통과해야 ‘나’란 사람이 소멸되고, 하나님의 부르심만 남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인기 여부에 관계 없이, 나의 연약함에 상관 없이, 그리고 고난의 크기에 상관 없이 하나님이 부르신 일에 계속해서 나의 삶을 헌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라기는 ‘나 혼자’라는 절망을 치유하게 되길 바란다. 결코 짧지 않은 하나님의 손을 바라볼 수 있길 바란다. 그리하여 약속된 가나안을 희망하며 계속해서 전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