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32 믿음의 정탐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6월 17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2 믿음의 정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13:1-2)

정호승 시인의 ‘여행’이란 시가 있다.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雪山)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雪山)뿐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오지를 향해 여행을 떠나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오지가 어디 나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곳이다. 그곳을 향해 떠나는 여행에는 독수리들이 자신의 심장을 쪼아 먹을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다. 즉 사랑에는 고통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감수하는 게 여행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향한 여행 중이었다. 그들은 브엘세바에서 약 80km 떨어진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한다. 이제 삼 일 정도 열심히 걸으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가나안 땅을 살펴보길 원했다. 그래서 정탐꾼을 보내게 된다. 이 정탐의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해야 했다. 한 번의 정탐이 250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을 결정한 것이다. 오늘은 이들이 떠난 정탐 여정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펴보며 교훈을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13: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지파 중에서 지휘관 사람씩 보내라이 본문에 따르면 가나안 정탐은 하나님의 명령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신명기 말씀을 보면 그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요구였음을 알 수 있다. 1:22, “너희가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여기서 ‘정탐하다’는 히브리어로 ‘하파르(חפר)’다. ‘탐지하여 찾아내다’는 뜻이다. 그들은 앞으로 있게 될 전쟁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 땅의 상황을 정탐꾼을 보내 먼저 파악하길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2절에서 표현된 것처럼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시는 땅이었다. 정탐이 필요하지 않은 땅이었던 것이다. 민수기서 13장에는 정탐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정탐’은 몰래 살펴서 알아내는 행위이다. 그런데 민수기서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단어는 ‘투르(תור)’다. ‘투르’는 ‘탐험하다. 보다’란 뜻이다. ‘여행객’이란  뜻의 히브리어 ‘타얄(תיר)’이 ‘투르’에서 온 말이다. 여행객들은 아름답고 장엄하고 영감을 주는 곳을 간다. 하나님은 열 두 명의 정탐군을 보내면서 그 땅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 땅에 매료되라고 그들을 보내신 것이다. 탈무드는 남자가 여자를 먼저 만나보지 않고 결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가르친다. 만나본 뒤 사랑이 싹트고나서 결혼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의 땅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 땅을 본 적이 없었다. 정탐꾼을 먼저 보낸 것은 그 땅을 가보고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랑에 빠지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랑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게 된다. 정탐꾼의 사명은 그 땅을 보고, 그 땅에 매료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땅을 얻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싸워야 한다고 백성들에게 보고해야 하는 것이었다. 단기 선교나 전도여행도 마찬가지다. 단기 선교 가서 사역만 열심히 하다가 지쳐서 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에게 그 나라에 다시 가라면 별로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선교를 가면 그 땅의 좋은 것을 보며 즐겨야 한다. 그곳의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 땅과 사랑에 빠져야 한다. 그래야 그 땅에 다시 가고 싶고, 그 땅을 위해 두려움 없이 헌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탐꾼들이 헤브론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거인을 보게 된다.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 열 명의 정탐꾼들은 이 거인들을 보고 두려움에 빠진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13:32-33,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헤브론은 어떤 땅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처음 약속하신 곳이다. 그곳은 아브라함이 이미 값을 치루고 소유권을 확정했던 땅이다. 그리고 그곳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여전히 묻혀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열 명의 정탐꾼들에게 헤브론은 거인이 사는 땅으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엔 아낙 자손만 크게 보였다. 그들에게 가나안은 약속의 땅, 풍성한 과일이 있는 땅이 아니라 두려움의 땅으로만 여겨졌던 것이다.

가나안이 전쟁터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풍성함이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 그리고 아낙 자손도 있었다. 아낙 자손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낙 자손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있는 사람에게 아낙 자손은 단지 그들의 밥이 되는 것이다. 결혼도, 사람과의 관계도 전쟁터인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 사람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지만 그 사람 안에 살고 있는 아낙 자손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아낙 자손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하나님 안에서의 언약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나안 정탐꾼들의 두려움의 보고는 삽시간에 전염되었다. 온 회중이 밤새 통곡하며 울부짖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고 그들을 인도해내신 하나님까지 원망했다. 14: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두려움은 그동안의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게 만든다. 그들의 결론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불안에 사로잡힐 때 사람들이 쉽게 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익숙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거짓 안전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종이었고, 고된 노역으로 시달리며 못살겠다고 부르짖었던 것을 망각한 것이다.

열 두 명의 정탐꾼 중에 두 사람 만이 믿음의 보고를 한다.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이들이 다른 정탐꾼들과 달랐던 점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여호수아의 경우를 보자. 13:16, “이는 모세가 땅을 정탐하러 보낸 자들의 이름이라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 불렀더라여호수아의 원래 이름은 ‘호세아’임을 알 수 있다. 모세는 왜 유독 한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불렀을까? 호세아(הושע)는 ‘구원자’란 뜻이다. 그런데 여호수아(יהושע)는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호세아라는 이름 앞에 요드(י)가 하나 더 붙은 것이다. 탈무드에 의하면 모세는 대부분의 정탐꾼들이 불안정하고 충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그는 호세아가 그들에게 휘둘릴까봐 우려했고, 그래서 그의 이름에 점 하나를 더했다고 한다. 요드(י)는 야훼의 첫 글자이기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문자다. 모세는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먼저 와야 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그의 이름 앞에 요드를 더했다는 것이다. 이름이 바뀌면서 여호수아의 정체성도 바뀌게 된다. 그는 이제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자가 되실 것이라는 새로운 전망을 갖게 된다. 또한 그는 정탐의 상황속에서 하나님이 자신보다 앞서 행하실 것을 기대하게 된다. 나의 삶에 하나님이 더해진 인생은 흔들리지 않는다. 나의 인생 여정에서 하나님이 앞서는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정탐할 수 있게 된다. 믿음으로 정탐해야 우리는 거인과 상황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갈렙이다. 그는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한다. 같이 정탐하고 왔는데 무슨 차이였을까? 물론 갈렙도 헤브론에서 거인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랍비들이 갈렙은 헤브론과 연결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헤브론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또한 헤브론은 요셉이 형들을 찾으러 떠났던 곳이다. 그러다가 그가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즉 헤브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 시작점이었다. 갈렙은 조상들이 묻혀 있는 곳, 모든 일의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가기 원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의미를 발견할 때 두려움을 넘어선다. 의미 있는 것을 이루기 위해 두려움과 싸우는 것이다. 갈렙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보고했다. 그는 그 땅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헤브론에서 그 땅을 반드시 취해야 하는 의미를 발견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외쳤다. 그리고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 그는 여전히 거인들이 살고 있는 그 산지를 자신에게 달라고 자원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세상을 위험으로 가득한 곳으로 본다. 자기 힘만으로 그러한 위험들을 통제하고 정복하려 하니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똑같이 세상을 정탐해도, 그곳이 위험으로 가득하다고 보지 않는다. 갈렙의 자신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영어로 자신감은 ‘confidence’다. 이것은 라틴어에서 온 말인데, ‘함께(con) 믿음(fide)을 갖다’란 뜻이다. 갈렙은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쳤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께 있었다. 하나님과 함께 믿음을 공유했기에 갈렙은 자신감이 있었다. 우리 인생의 여정에도 하나님과 같은 믿음을 공유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감을 갖게 된다. 그래야 우리는 상황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번 토라포션은 이 말씀으로 끝난다. 15:37-3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귀의 술에 더하라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유대인들의 옷을 자세히 보면 셔츠 끝에 실 가닥이 달려있다. ‘찌찌트(ציצת)’라고 불리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청색은 히브리어로 ‘트켈렛’이다. 왜 청색일까? 광야에서 언약궤를 이동할 때 최종적으로 그 위에 덮는 것이 순청색 보자기였다. 따라서 순청색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동했던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옷에 달려있는 청색 끈을 바라보며 그들과 함께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투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한다. 찌찌트를 다는 목적을 설명하면서 모세는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베 로 타투르 아하레이 레바브켐 (ולא תתרו אחרי לבבכם).’ 이 말을 직역하면 ‘너희의 마음을 따라 정탐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이다. 오늘 토라포션의 정탐이야기는 찌찌트를 보며 너희 마음대로, 너희 눈이 보는 대로 정탐하지 말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경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을 놓쳤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들의 불안한 마음을 따라 상황을 해석하고, 눈으로 본 현상에 마음을 빼앗겨 스스로 좌절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광야 1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에 품는 것을 통해 상황을 인식하고 감지한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본 것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 만을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쉽다.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하다. 겉으로 드러난 표면의 현상만 보는 것은 우리를 전진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것으로 현상을 해석한다면 우리는 불안한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나안 정탐 이야기는 너무도 슬픈 사건이다. 믿음이 없어 한 세대가 멸망해버린 이야기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믿음의 세대가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이 사라지는 이 시대에 다른 전부를 놓치더라도 우리는 이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가나안을 정탐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이 있었기에 그 믿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수된 것이다. 이 믿음의 정탐은 우리와 우리 다음 세대에도 이어져야 한다.

세상에는 우리가 아직 내딛지 않은 인생의 여정들이 많이 있다. 누군가는 대학이나 군대를 가야 하고, 누군가는 직장이나 배우자를 찾고 있고, 누군가는 자녀가 태어나길 기다리고 있고, 누군가는 태어난 자녀가 어서 자라길 기다리고 있다. 세상은 아직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 많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을 믿음으로 정탐할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은 다음 세대에 믿음의 보고를 하며 하늘의 구원과 안식을 나누어 줄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두려운 상황들을 계속 만나게 될 것이다. 사회의 불안은 어제보다 오늘 더 커져갈 것이다. 우리가 과거로 돌아간다고 안전한 것이다. 더 높은 성을 쌓는다고 안전한 것이 아니다. 믿음의 사람은 과거지향적이 될 수 없다. 믿음의 사람은 높은 성 안에 숨어 안전을 추구하지 않는다. 갈렙처럼 믿음으로 정탐할 수 있는 사람만이 거인들이 있는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다. 이 여정 중에 독수리가 우리의 심장을 쪼아 먹을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 낯선 오지와 추운 설산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낙 자손이라는 거인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거기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거기서 의미와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을 수 있길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정탐하는 여행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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