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7월 15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6 믿음의 여정
“모세와 아론의 인도로 대오를 갖추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들이 행진한 대로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민 33:1-2)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당황하는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다. 그것이 불의의 사고이거나 실패의 경험일 수 있다. 그러한 경험은 우리 삶에 아픈 기억이 되고, 우리는 평생 그 아픈 기억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유대인들에게 홀로코스트는 너무도 아픈 기억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아픈 기억을 잊지 않고 기념하기 위해 곳곳에 기념관을 세웠다. 야드바쉠도 그 중 하나인데, 그곳에 있는 욥의 동상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망각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포로가 되게 하고, 기억은 우리를 자유인이 되게 할 것이다.” 유대인들을 자유인이 되기 위해 그들에겐 너무도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광야 40년의 시간을 끝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평지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제 가나안 땅 바로 코 앞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모세에게 광야 40년의 노정을 기록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왜 과거의 여정을 기록하게 하셨을까? 기록은 기억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기억하기 원하셨다. 이 기억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오늘 그것을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진을 쳤던 마흔 두 개의 여정들이 나온다. 애굽 라암셋을 떠나 여리고 맞은 편 모압평지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여정은 단순히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노예로 살던 애굽 땅에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것이 목표였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 년의 여정은 실패의 시간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직선 거리로 가고 싶었을 것이다. 힘든 광야는 그저 최대한 빨리 통과하는 한 지점이 되길 바랬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역시 선형적이고 목표 지향적인 삶의 방식에 익숙하다. 우리는 어떠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지점에 얼마나 빨리 도달하느냐에 따라 성공을 측정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우회로나 광야가 없고, 오직 풍요로운 가나안에 빨리 도달하길 기도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걸어서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왜 그들은 광야에서 그토록 긴 시간을 보내야 했던 걸까? .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신 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는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만드는 장소였다. 거기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 훈련이 있었고, 철저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순종 훈련이 있었다. 그것을 위해 40년의 시간이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광야의 목적이 또 있다. 호 2:14-17,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광야는 우리 안의 우상이 제거되는 시간이다. 우리의 자아가 죽고, 탐욕이 죽고, 노예 근성이 처리되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광야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는 거룩한 신부로 세워지는 시간인 것이다.
모세는 그가 죽기 전 광야 1세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정을 기록해야 했다. 민 33:2,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들이 행진한 대로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여기서 노정은 히브리어로 ‘마싸(מסע)’다. 마싸는 나싸(נסע)에서 온 말인데, 나사는 ‘장막 말뚝을 뽑다’란 뜻이다. 그래서 마싸는 ‘장막 말뚝을 뽑는 곳, 즉 ‘출발지 또는 여정’이란 뜻이 있다. 민수기 33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었던 지명이 모두 마흔 두 개가 나온다. 이름 모를 광야에 머물면서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삶의 노정, 마싸가 곧 그곳의 지명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노정에서는 기억하기도 싫은 아픈 역사가 있었다. 기브롯 핫다아와에서는 음식 때문에 욕심을 품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시내산에서는 금송아지 우상숭배로 인해 삼천 명이 죽임을 당한다. 호르마에서는 고라의 반역으로 만 사천 칠백 명의 백성이 염병으로 죽게 된다. 싯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여자들과 음행에 빠지면서 이만 사천 명이 염병으로 죽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집단적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광야에서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역사는 불신의 역사였고, 배역의 역사였다. 집단적 죽음을 경험한 고통의 역사였다. 모세는 그가 죽기 전 광야 1세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노정을 하나 하나 기록해야 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돌아보는 것이 왜 그들에게 필요했을까?
뇌과학자 한나 모니어는 이렇게 말한다.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는 능력이 아니라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이다.” 즉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두고 있었던 미래는 무엇이었나? 그들의 미래는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이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광야 2세대를 하나님이 준비하신 미래로 이끄시기 원하셨다. 그래서 그들의 과거의 노정을 돌아보고 정리하게 하신 것이다.
한나 모니어는 우리가 과거를 회상하는 과정을 통해 기억의 원래 버전이 아니라 변화된 버전을 저장하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기억할 내용들을 살펴보는 동안에 그 내용은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기록된다는 것이다. 모압평지에 살아남은 광야 2세대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부모 세대의 아픈 역사를 기억해야 했다. 이들은 부모 세대의 반역과 불신, 그로 인한 죽음을 광야에서 지켜보았다. 그들은 염병으로 죽어가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깊은 아픔과 상처를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택한 장자 민족으로 너무도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광야 40년의 시간을 지나왔다. 그들이 지나온 노정마다 부끄럽고 아픈 기억들이 베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들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지를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고통스럽고 아팠던 기억을 재평가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들은 광야를 단순히 고통스럽고 아픈 시간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광야의 시간을 이해해야 했다. 과거가 정리돼야 미래가 소망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노정 속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들어가는 가나안은 그리 소망스러운 곳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나 원망을 간직한 채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준비하신 가나안 땅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그들은 반드시 그들의 과거를 하나님의 버전으로 다시 기억해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기억을 위한 시간이었다. 불신으로 사는 삶과 믿음으로 사는 삶의 차이를 그들은 광야에서 경험했다. 인생의 광야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라 간 사람에게만 가나안은 의미 있는 곳이 되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어도 그곳에서 하나님을 놓치면 또 다시 광야가 시작되고 만다. 따라서 광야의 노정은 그냥 빨리 벗어나야 하는 한 지점이 아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남들보다 빨리 도달하는 것이 우리 인생 여정의 최종 목적도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중심으로 광야를 이동했듯이, 우리 역시 광야의 노정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동하며 언약 백성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광야에서 하나님만 순종하는 백성을 만드는 것이었다. 세상의 영광과 제국의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유로운 백성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가나안 땅에서도 다른 신에게 절하지 않는 거룩한 백성을 만드는 것이었다. 신 8: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광야의 노정에서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는 자가 된다면 그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된다. 그래서 광야의 노정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미래를 잘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광야를 믿음의 눈으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미래는 소망스러울 수 없다. 과거의 아픔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풍요로운 가나안이 주어져도 그것은 의미가 없게 된다.
우리 중에 광야가 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 각자 인생의 광야에서 겪었던 고통과 아픔은 시퍼렇게 우리의 기억속에 살아있다. 그러나 우리는 광야의 시간을 단순히 고통으로 기억해선 안된다. 반드시 믿음의 눈으로 그 고통스런 기억을 재해석해야 한다. 우리의 인생이 어느 지점에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해도 그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고통과 상처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포로로 끌려간 민족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다음과 같이 애가를 불렀다. 애 3:19-23,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진노 중에라도 마침내 복을 주려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이 겪은 고통스런 기억을 재구성한다. 그는 그의 고초와 재난과 쑥과 담즙을 기억하고 처음엔 낙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아픈 기억을 다시 꺼낸다. ‘내 마음에 담아 두었다’는 것은 그것을 회상했다는 말이다. 과거의 기억을 꺼내 보며 그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히 무궁하시다는 사실에 다시 소망을 갖는다. 주님의 성실하신 사랑에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당한 고초와 재난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살리고 회복시키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주목하길 바란다.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면, 과거 광야의 노정에서 겪었던 우리의 아픈 기억들은 치유될 수 있다. 믿음이 있다면 고통스러운 기억은 단지 고통에 머물지 않고, 미래의 소망을 위한 재료로 사용될 수 있다.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 시작되는 우리의 노정에서 다시 말뚝을 뽑고 가나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바라기는 과거 여러분이 지나왔던 광야의 노정을 믿음의 눈으로 재평가 할 수 있길 바란다. 그 광야에서 있었던 아픈 기억들이 치유 되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여러분의 아픈 기억의 순간이 오히려 여러분의 부르심이자, 간증이자, 미래 비전이 되길 바란다. 오늘도 여러분이 시작하는 삶의 노정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소망스런 미래를 맞이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