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37 두려움 없는 사랑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7월 22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7 두려움 없는 사랑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 1:32-33)

다음 주 목요일은 유대력으로 아브월 9일, ‘티샤 베아브(תשעה באב)’이다. 탈무드에 의하면 아브월 9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결정이 내려진 날이다. 매년 유대인들은 티샤 베아브에 신명기 1장 부분을 읽게 되는데, 여기에는 가나안 정탐 사건과 그로 인한 백성들의 원망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이 티샤 베아브는 성전이 파괴된 날이기도 하다. BC 586년 첫번째 성전이 이 날 파괴되었고, 공교롭게도 두번째 성전 역시 AD 70년 아브월 9일에 무너졌다. 유대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사건이 모두 이 날에 일어난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 날을 기념하며 금식한다. 회당에서는 평소보다 촛불을 희미하게 밝히고, 모임이 끝나고서는 불을 완전히 꺼버린다. 유대 민족이 직면했던 캄캄했던 암흑을 기억하는 것이다. 티샤 베아브가 시작되기 직전의 안식일은 ‘샤밧 하존(שבת חזון)’이라고 불리는데, 오늘이 바로 샤밧 하존이다. ‘계시의 안식일’이란 뜻이다. 유대 민족이 당한 가장 어두운 역사의 비애를 기억하는 이 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계시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19,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 산을 떠나 너희가 보았던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아모리 족속의 산지 길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때에이스라엘 민족이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것은 출애굽하고 2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을 떠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왔다. 광야를 두려움으로 맞이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까지 별 큰 문제없이 오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제 그들에게 ‘올라 가서 가나안을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진격했다면 그들은 광야 생활을 2년 만에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정탐꾼을 보내자고 모세에게 요청한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을 정탐한 뒤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거기서 거인 아낙자손을 보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삶에서 ‘두려움’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라고 말한다. 사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부분의 상황은 실제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이 가짜 감정에 휘둘렸다. 정탐꾼들의 보고를 통해 백성들의 두려움은 커졌고, 그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원망으로 발전했다. 모세는 그러한 그들의 태도를 이렇게 묘사한다. 1:26-27,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그들은 두려운 대상에 시선을 빼앗겨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두려움은 그동안 키워왔던 그들의 믿음을 무너뜨렸다. 하나님을 오해하게 했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이끄시는 가나안을 바라보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한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허락하신 가장 영광스런 모험을 포기하고 차라리 과거 노예시절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모세는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1:29-31,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미래가 불확실 할 때 우리는 두려워한다. 위험이 예상될 때 우리는 불안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그분과 함께 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그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을 나와 불확실한 미래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애굽 군대와 친히 싸우신 분이다. 광야에서 지친 자녀들을 안고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이르게 하신 그들의 아버지이셨다. 그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가득한 광야에서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칠 곳을 찾으신 분이셨다. 모세는 이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했다. 이 사랑의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기에 너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 여호수아와 갈렙 역시 이 사랑의 하나님을 신뢰했다.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넘어섰다. 그들은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 14:9)”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함으로 두려움을 넘어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들지 못했다. 두려움이라는 가짜 감정에 휘둘려 그들의 현실을 원망과 절망으로 채웠다. 하나님은 그런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언하셨다. 14:22-23, “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선언이 티샤 베아브, 아브월 9일에 있었다고 말한다. 티샤 베아브는 그들이 사랑의 하나님보다 두려움을 선택한 결과 맞이한 슬픈 역사의 날이다. 그들은 두려움이라는 거짓 감정에 휘둘려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함께 지나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지 못했다. 그들이 연약하고 힘들 때 그들을 안고 가신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은 광야에서도 장막 칠 자리를 먼저 찾아주신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도 그러하실 것이라고 믿지 못했다. 그들은 두려움을 이기는 사랑을 붙잡지 못한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의 인생에서 두려움을 다 제거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두려운 곳으로 이끄실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 두려운 상황 속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 것이다.

샤밧 하존에 토라와 함께 읽는 선지서 말씀이 이사야서이다. 1:21-23,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씀은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의 도덕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거기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은에 비금속을 섞어 팔았고, 포도주에 물을 타서 팔았다. 그들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며 살았다. 정치인들은 뇌물을 좋아했고, 자신의 직분과 권력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데 사용했다. 이와 같은 부정과 부패는 사회 구성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사람들을 냉소적으로 만든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분열을 일으킨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며 산다면 평소에 성실히 살던 사람들도 왜 나만 공동의 선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도 공의와 정의의 길을 버리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국가는 망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예루살렘의 운명은 이들의 종교적 열심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삶에서 정의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회에 도덕성이 사라지고, 경제와 정치가 오직 자기 이익에 의해 좌우될 때, 서로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고 공동체도 함께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이러한 이사야의 선포 후, 약 120년 후에 멸망했다. 랍비 아브라함 이삭 쿡은 성전이 파괴된 것은 ‘근거 없는 증오’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정의가 사라지면, 그 사회에는 근거 없는 증오가 일어난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멸망으로 가는 길인 것이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의 공의를 버리고서라도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걸까? 그것은 인간의 깊은 자기 불안감과 두려움 때문이다. 편법으로라도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안전지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존재가 불안할 때 사람들은 안전지대를 찾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지켜줄 대상을 찾는다. 그것이 돈일 수 있고, 권력일 수 있다. 사람들은 불안한 현실을 살면서 하나님의 공의보다는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여겨지는 자기 이익에 집착하는 것이다.

지난 3년 진행된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 사회와 공동체를 많이 바꿔 놓았다. 불안한 상황을 겪으며 우리 사회에는 근거 없는 증오가 커졌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안전지대를 찾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를 추구하기 보다는 나부터 살고 보려고 모두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사회로 가는듯 하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하시는 분이다. 광야에서도 우리 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크고 두려운 광야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는 우리의 유익보다도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공의를 먼저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랍비 아브라함 이삭 쿡은 말한다. “만약 우리와 세상이 근거 없는 증오로 인해 파괴되었다면, 우리는 근거 없는 사랑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와 함께하는 세상을 재건할 수 있습니다.” (“If we were destroyed, and the world with us, due to baseless hatred, then we shall rebuild ourselves, and the world with us, with baseless love.”)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가 주변의 모르는 사람들에게 조차 근거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에게 근거 없는 사랑을 하라고 부름 받은 자들이다. 이 근거 없는 사랑이 근거 없는 증오를 덮을 때, 그 사회는 멸망으로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움에 지배되면 우리는 이웃을 향한 사랑을 축소한다. 사랑보단 자기 생존을 위한 삶을 지향하게 된다. 아브월 9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랑보다 두려움을 선택했기에 역사의 아픔을 경험한 날이다. 우리는 이 날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지금 여러분은 환경이 주는 두려움 때문에 근거 없는 증오를 키우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여러분은 공의가 사라지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근거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 믿음의 사람은 크고 두려운 광야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가는 사람이다. 바라기는 두려움이란 감정에 지배되는 삶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의 정의를 행하고, 근거 없는 사랑을 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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