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7월 29일 설교 이익환 목사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
누군가의 한숨
그 무거운 숨을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을까요
당신의 한숨
그 깊일 이해할 순 없겠지만 괜찮아요
내가 안아줄게요
정말 수고했어요
승구가 동전 노래방에서 열창한 이하이의 ‘한숨’이란 노래다. 가사가 참 따뜻해 위로가 되는 노래였다. 우리는 누군가의 한숨을 들을 때가 있다. 우리가 한숨 질 때도 있다. 위로 받고 위로해야 할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세상인 것 같다. 유대력으로 이번 주는 샤밧 나하무(נחמו)이다. ‘위로의 안식일’이란 뜻이다. 지난 주가 티샤 베아브, 성전이 두 번 파괴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슬픈 날이었기에 유대인들은 이번 주부터 유대력으로 새해가 오기까지 7주간 선지자들의 위로의 말씀을 읽는다. 그 첫번째 말씀이 이사야서 40장 말씀이다. 사 40:1-2,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히브리어로는 “나하무, 나하무 암미(נחמו נחמו עמי)”로 시작되는데, 직역하면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이다. ‘나하무’란 동사가 두 번 반복된 것은 성전이 두 번 파괴된 것에 대해 두 번의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유대인들은 해석한다. 여러분은 힘들 때 누구에게 위로를 받는가? 무엇을 통해 위로를 얻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한 위로를 통해 역사의 비극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민족이 되었을까? 오늘 말씀을 함께 살펴보며 진정한 위로의 근원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시간이 되고자 한다.
이번 주 토라포션은 모세의 기도로 시작된다. 신 3:23-25,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모세의 심정이 느껴진다. 모세는 광야 40년간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단강 앞까지 인도했다. 하나님이 그의 조상들에게 약속했던 땅을 코 앞에 두고 모세는 얼마나 그 땅에 들어가고 싶었을까? 그런데 모세는 그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신 3: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참 슬프다. 모세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거절이었다. 모세가 얼마나 서운했을까? 유대인들은 모세가 거절 당한 이 이야기를 위로의 안식일, 샤밧 나하무에 읽는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그들에게 위로가 될까?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그에게 마지막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마지막 사명이 뭘까? 신 4: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여기서 ‘이제’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히브리어로 ‘앗타(עתה)’인데 ‘이제부터는’ 이란 뜻이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 기도가 거부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들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을 가르치는데 온 힘을 쏟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부여하신 그의 마지막 사명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모세오경, 토라인 것이다.
모세는 이제 유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남긴다.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다”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누 아도나이 에하드(שמע ישראל יהוה אלהינו יהוה אחד)” 이 말은 유대인들이 자녀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말이다. 또한 이 말은 유대인들이 죽기 직전 암송하는 말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지금도 매일 하루 두번씩 이 말씀을 암송한다. 유대인들의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들의 전 인생을 지배하는 가르침이 바로 ‘쉐마’인 것이다. 모세는 비록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쉐마’의 가르침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성전은 파괴되고 사라져도 쉐마신앙은 유대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게 되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이 파괴되어 포로로 살아야 하는 비극 속에서도 쉐마를 암송하며 위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도 하루 두 번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누 아도나이 에하드”라고 외쳤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다” 이것은 포로 중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자신들은 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위로하다’란 말의 히브리어는 ‘나함(נחם)’이다. 그런데 이 말에는 ‘한 숨 쉬다’라는 뜻이 있다. 큰 상실을 경험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내 상황과 처지 때문에 같이 한 숨 쉬는 모습에서 위로를 얻는다. 성경에서 ‘나함’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쓰인 곳은 창세기 5장 28-29절이다.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안위하다’는 말이 바로 ‘나함’이다. 노아는 ‘안식’이란 뜻인데, 그는 수고롭게 일하는 당대의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다. 사람들이 조롱했지만 그는 그런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결국은 같은 시대를 사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노아의 삶을 통해 보게 된다. 삶의 환경이 나아졌다고 위로 받을 수 있는게 아니다. 위로는 환경이 바뀌었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서 들려올 때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쉐마 이스라엘’, ‘들으라 이스라엘’이라고 다음 세대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말한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세상은 변하고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우리를 살리는 소망의 말씀이 되기에 우리가 거기서 위로를 얻는 것이다.
오늘도 세상은 성공과 번영을 위해 계속해서 우상들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우상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을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며 그 분의 말씀 듣기를 구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는 가나안 땅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다음 세대들이 여호와가 유일한 신인 것을 고백하길 원했다. 왜냐하면 바알은 인간의 갈망을 결코 채워줄 수 없는, 그 땅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우상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여러분의 매일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욕망을 따라 만들어내고 섬기는 우상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이라는 분명한 선포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단지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시는 삶을 살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들음을 통해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를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를 얻는 자는 강하다. 세상이 그를 흔들 수 없다. 왜냐하면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자가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위로하다’란 말의 헬라어는 ‘파라칼레오(παραχαλεω)’다. 이 말은 파라(παρα)와 칼레오(καλεω)가 합쳐진 말입니다. 파라(παρα)는 “곁으로”라는 뜻이고, 칼레오(καλεω)는 “부르다” 란 뜻이다. 이 두 말을 합친 파라칼레오는 “곁으로 부르다”라는 뜻이다. 위로는 결국 곁으로 가까이 불렀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보혜사’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예수님은 세상에 남겨지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14:16, 2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여기서 보혜사, 즉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는 ‘돕기 위해 곁으로 부름을 받은 자’란 뜻이다. 보혜사는 우리 옆에서 우리의 사정을 다 알고 도와줄 수 있는 분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결국 우리를 돕고 위로하시기 위함이다. 사방이 막혔어도 보혜사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위로를 얻고 다시 소망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쉽지 않은 세상을 우린 살고 있다. 지금 이 시대를 상징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각자도생 (各自圖生)’이다. ‘각자 살 길을 스스로 도모한다’는 뜻이다. 내일이 불안한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너도 나도 각자의 살 길을 찾느라 분주하다. 이러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하루 하루의 위로다. 위로 없이 생존을 위해 하루 하루를 버티며 사는 것이다. 위로 없이 살 때 나오는 것이 한 숨이다. 한 숨이 나올 때 우리가 구할 것은 근원적인 위로여야 한다.
사람의 위로는 아픈 마음을 달래주고, 기분을 전환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의 위로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얻어야 한다.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의 막힌 숨을 트이게 하여 죽을 것 같은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능력인 것이다. 우리는 또한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경험해야 한다. 세상의 물질이나 환경으로부터 얻게 되는 위로는 잠깐 뿐이다.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만이 진정한 위로가 되는 것이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쉐마의 가르침을 남겼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산다는 것이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 세대는 모세 없이도 쉐마의 말씀을 붙들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 사라진 뒤에도 쉐마의 말씀을 가지고 하루 두번씩 기도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포로기 속에서도 위로와 소망을 얻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오늘날 얻지 못하는 위로가 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한 위로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의 위로는 오직 그분의 말씀을 믿는 자가 얻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서 위로를 얻는가?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의 신앙을 대신할 수 없다. 좋은 교회 다니는 것이 여러분의 신앙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결국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위로를 얻게 되는 것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는 위로의 근원이 되길 바란다. 성령님의 이끄심이 여러분에게 끝까지 주님의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위로의 근원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통하여 이 시대 한 숨 짓는 우리 이웃들을 위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