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8월 5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9 듣는 마음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신 7:12)
한자 ‘들을 청(聽)’자를 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어떻게 경청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알 수 있다. 왼쪽 부수에는 귀 이(耳)와 임금 왕(王) 자가 있다. 임금, 즉 리더는 듣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른쪽 위 부수에는 열 십(十)자와 눈 목(目)자가 있다. 경청할 때 열 개의 눈으로 보듯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른쪽 아래 부수에는 한 일(一)과 마음 심(心)자가 있다. 이것은 나뉘어지지 않은 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남편이 아내의 말을 이렇게 경청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밥상의 반찬이 달라질 것이다. 남자가 여자 친구가 말할 때 핸드폰을 보지 않고, 열개의 눈을 뜨고 경청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여자친구의 마음을 얻을 것이다.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 서양 사람들은 무언가 이해할 때 “I see”라고 말한다. 뭔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보는 감각을 중요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을 중요시 한다. 유대교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긴 형상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지 않도록 하셨다. 대신 그 분의 음성을 듣도록 하셨다. 신명기에서는 ‘들으라, 쉐마’라는 말이 92번 사용되었다. 구약 성경에서 듣는 것은 깊은 영적 행위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위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백성들에게 왜 쉐마를 반복적으로 명령했을까? 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일까? 오늘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순종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어야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아브라함은 어느 날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창 12:1-2,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이어지는 구절에서 성경은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표현한다. 모세 역시 떨기나무 사이에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소리를 들으며 모세는 하나님께 설득되어 간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신이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고 변명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 위해 왜 말을 잘 못하는 모세와 같은 사람을 선택하셨을까? 그것은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 어쩌면 듣는 것을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말 잘하는 리더를 찾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출애굽 당시 하나님이 찾으셨던 리더는 듣는 리더, 듣고 순종할 수 있는 리더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보는 것에 좌우되어 어떠한 것을 선택한다. 도시의 화려함에 매료되었던 롯은 곧 멸망할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예배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였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선택했다.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을 이어 왕이 될 사람을 찾는 킹메이커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쉽게 매료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여러분이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한다.
한국에서 유난히 ‘MZ세대’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요즘 젊은 세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MZ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환경을 접하며 태어난다. 그래서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고 다루는데 매우 익숙하다는 특징이 있다. MZ세대는 한마디로 ‘보는 것에 익숙한 세대’이며, ‘보는 것으로 인해 행동을 옮기는 세대’라 할 수 있다. 마케팅 전문가에 따르면, 대도시에 사는 사람은 하루에 5000번 광고에 노출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본 것을 소비하기 위해 노동하는 삶을 반복한다. 여즘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부르심에 이끌리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좋게 보여지는 삶을 사는데 더 관심을 쏟게 되는 것이다. MZ세대의 대화는 문자나 이메일, 인스타그램과 같이 보는 것으로 대체되고 있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것에 이끌리는 세대, 여기에 이 세대의 위기가 있다. 그들은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에는 기꺼이 순종한다. 그러나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리에는 좀처럼 순종하지 않는다. 아니 듣는 감각이 무뎌져 하나님께서 불러도 듣지 못하는 것이 이 세대의 위기인 것이다.
듣는 것이 중요한 두번째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번영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법도를 듣고 지키라고 강조한다. 신 7:12,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인애를 얻는 조건은 한 가지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듣고 지키는 것이었다. 세상의 다른 제국들처럼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워 힘을 가진 나라가 되는 것은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이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의가 다른 민족보다 뛰어나서도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다른 제국들과 비교해 볼 때 너무도 작고 보잘 것 없는 민족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작은 나라를 강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신 11:23, 25,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차지할 것인즉…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그런데 작은 이스라엘이 강자로 남을 수 있는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에게 주신 모든 규례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신 8:11-14,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모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 진정한 시험은 광야에서가 아니라 가나안에서 있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워야 할 전쟁은 가난과 광야의 고난이 아니었다. 진짜 전쟁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누리게 될 풍요였다. 이스라엘이 번성하느냐 멸망하느냐는 풍요의 때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풍요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잠재우는 늪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공이 하나님의 손을 놓고 혼자 달려가는 경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풍요의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장만하고, 소유가 다 풍부한데,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산다면 그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길인 것이다. 모세는 말한다. 신 8:20,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멸망의 조건은 그들이 다른 제국보다 약해서가 아니라 오직 한가지,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 때문이라고 모세는 말한다.
듣는 것이 중요한 세번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예배이기 때문이다.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의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들의 삶이여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정의가 보이지 않을 때 선지자를 보내신다. 선지자는 한마디로 그 세대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는 메세지를 들려 주는 사람이었다. 선지자는 히브리어로 ‘나비’인데, 이는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말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아모스도 선지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이렇게 예언했다. 암 8:11-1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아모스는 그가 있었던 시대의 문제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에 청년 세대가 비틀거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라 비틀어져 사회에 정의가 실행되지 않기에 청년들이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청년들이 비틀거리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아 사회 안에 정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모스는 남유다의 예언자였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해 예언했다. 북이스라엘이 어떤 사회였나? 여로보암이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우상을 섬기게 했던 사회였다. 보이는 우상을 따라간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다. 그 시대가 만든, 보이는 우상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비틀거릴 수 밖에 없다. 선지자의 말이 교회와 사회에 울려 퍼지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힘을 잃고 휘청거릴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생명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역대하 기자는 말한다.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하나님은 우상에게 빼앗긴 우리의 눈이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향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질 때 우리의 메마른 삶에 단비가 내리고, 생명의 싹이 움트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듣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기에 모세는 이렇게 외쳤다. 신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듣는 것은 겸손할 때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인생의 주인인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듣는 것은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높음을 인정할 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세상의 논리나 상식을 뛰어 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여러분이 믿음의 사람이 되길 축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되길 축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한 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만 나는 죽어도 예수님이 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일천번제를 마쳤을 때 하나님은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 솔로몬은 이렇게 말한다.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구했다. ‘듣는 마음’은 히브리어로 ‘레브 쇼메아(לב שמע)’다. 솔로몬은 인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듣는 마음, 즉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마음을 구했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듣는 마음’을 구해야 한다.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을 위해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들려주시고 싶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 말씀이 있어야 갈등이 끝나고, 기갈이 끝나는 것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요한계시록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기록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의 말도 경청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보는 것에 길들여지는 이 세대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여 그 분의 인애를 경험하게 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