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8월 12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0 축복의 선택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신 11:26-28)
우리 삶에는 축복과 저주라는 두 개의 원리가 작동한다. 우리는 축복 받은 사람의 인생이 형통하게 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우리는 또한 저주 받은 사람의 삶이 어떻게 꼬이는지도 종종 보게 된다. 우리 모두는 축복된 삶을 살기 원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저주의 굴레를 벋어나지 못한 채 불행한 인생을 운명처럼 여기며 살아 간다. 축복은 저주에서 벗어나야 시작된다. 우리는 어떻게 저주를 벗어나 축복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신 11:26,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이 구절은 한글 번역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르에(ראה)’라는 말로 시작한다. ‘르에’는 ‘보라, 주의를 기울이라’라는 명령이다. 축복과 저주는 어느 한 순간 우리가 얻게 되는 결과물이 아니다. 우리가 오늘이라는 매일의 순간에서 마주하는 선택인 것이다. 하나님이 축복 뿐만 아니라 저주도 우리 앞에 두셨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만 축복된 오늘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축복은 뭐고, 저주는 뭘까? 우리는 무언가 좋은 일이 내게 오는 것을 축복이라 생각한다. 또한 무언가 안 좋은 일이 내게 오는 것을 저주라고 생각한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축복과 저주의 정의는 좀 다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 나오는 모세의 말을 보자. 신 11:27-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히브리 본문을 직역하면 이렇다. “축복은 여호와의 명령을 듣는 것이다.” “저주는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않고 다른 신들을 따르는 것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축복과 저주는 우리가 단지 수동적으로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능동적인 선택을 통해 축복을 받을지, 저주를 받을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축복과 저주는 매일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운명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운명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느냐, 그 명령을 듣지 않고 우상을 따르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에 따라 축복을 받을 것인지, 저주를 받을 것인지의 여부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축복만 두시지 왜 저주도 두셨을까? 그것은 사랑의 관계가 ‘선택’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랑은 배타적이다. 하나님과의 사랑도 배타적이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다른 신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영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셨다. 그래서 사랑을 선택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원하신 것도 그러한 선택이었다.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아담은 생명 나무의 열매를 선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안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나무의 열매를 선택한다. 그것은 그가 뱀의 말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뱀의 말에 마음을 빼앗기자 그 열매가 그에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영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선택하지 않았다. 아담의 선택으로 인해 저주가 합법적으로 인간의 삶에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에 시작된 이 저주를 역전 시키기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이 땅의 풀어놓을 사람을 찾으셨다. 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창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아브라함의 복은 무엇을 받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복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으로 인해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길 축원한다.
하나님은 이후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 어떠한 축복이 부어지는지 보여주기 원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때 어떠한 저주가 따르게 되는지 보여주길 원하셨다. 그것을 통해 열방이 하나님 앞에 떨며 돌아오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키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라 당연히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저주를 받고 포로로 끌려갔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율법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 자체를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죄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정죄하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율법 앞에서 정죄 받는다. 즉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갈 3:10-11,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유대인들은 율법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다. 그러나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된 것이다.
에발산에 가면 여호수아 당시의 제단이 남아 있다. 수 8:30-31,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에발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언약을 갱신했을 때 저주를 선포한 산이다. 왜 제단이 축복을 선포한 그리심산에 있지 않고 저주를 선포한 에발산에 세워졌을까? 그것은 저주가 역전되기 위해서 희생의 피가 흘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죄와 저주를 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이 대신 속죄의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이 구약시대 하나님이 정하신 속죄의 원칙이었다.
이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생제사의 전문가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삶 따로, 예배 따로인 백성들의 삶을 축복하실 수 없었다. 하나님은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고 말씀하셨다. 또한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2)”고 책망하셨다. 그들이 저주받아 멸망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말씀의 성취인 것이다. 신 28:20-21,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혼란과 책망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마침내 너를 멸하실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가해진 저주를 역전시키시기 위해 궁극적인 해결책을 시작하셔야 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경은 우리를 향한 저주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받으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 받으신 사건은 우리가 저주에서 놓임 받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저주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저주 받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으셔야 했을까? 그것은 율법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시기 위함이다. ‘속량’은 ‘값을 치르고 사다’란 뜻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받으시고, 죽음으로 죄의 값을 치루심으로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받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이다.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 내가 받아야 할 수치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 내 죄로 인해 내가 당해야 할 고난을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신 것, 그것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복음이다. 이사야는 그 사실을 이렇게 예언했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 인생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때문에 소망이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는 우리의 인생…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죄에 대한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를 속량하셨기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롬 8:6-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을 따랐던 아담은 지식나무의 열매를 선택했다. 그것은 죽음과 악을 선택한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온 인류에게 저주를 연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담과 동일하게 마귀로부터 세번의 유혹을 받았을 때,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았다.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을 앞세워 육신의 생각을 자극하는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그리하여 온 인류가 저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복을 얻는 길을 여셨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삶에 축복을 여는 비결인 것이다.
바울은 이런 고백을 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축복의 비결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축복을 열었던 것처럼, 우리가 기꺼이 지는 십자가는 축복의 문을 여는 선택인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르는 것이 축복이다. 반대로 육신의 생각을 따라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이는 것이 저주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또한 성령의 조명을 따라 그 말씀을 이해하고,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한다. 축복은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축복은 내가 성전 마당을 밟았다고 오는 것도 아니다. 매일 매일 내 육신의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 그 자체가 축복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받으심으로 우리에게 향하는 모든 저주는 끊어졌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심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상속 받는 특권이 이방인인 나에게도 주어졌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아브라함처럼 존재 자체가 복인 사람들이 되었다. 사람이, 환경이, 사탄이 우리의 존재적인 부르심을 흔들 수 없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이 땅에 풀어 놓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