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8월 26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2 혐오의 종말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신 23:7)
영화 ‘기생충’에는 주인공 가족들이 선을 넘는 장면이 여러차례 나온다. 가정부 문광이 사모님을 무리하게 깨우는 장면에서 선을 넘는다는 것을 표현했다. 문광이 해고되는 장면에서는 온 몸이 선을 넘어 있다. 선을 넘었기 때문에 해고되었다는 메세지다. 영화에서 기택은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 그것은 선을 중시하는 박 사장에게 고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 선을 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경계선을 침범하는 행위로 묘사된다. 특히 이선균 씨가 역할을 맡은 박 사장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계선을 넘어오는 걸 견디기 어려워 한다. 그는 송강호 씨가 역할을 맡은 김 기사를 운전사로 채용하고서 그에 대한 평가의 말을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은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 안 넘어. 그런데 냄새가 선을 넘지.” 냄새가 문제였다. 반지하에 사는 김 기사의 몸에는 독특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박 사장은 김 기사에게서 풍기는 냄새가 자못 불쾌하다. 김 기사의 냄새가 그에게 혐오감을 유발한다. 영화 ‘기생충’에서 불쾌한 냄새라는 장치는 계급을 분할하는 표지이자 혐오의 대상이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언젠가부터 혐오라는 단어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혐오 범죄도 늘어나고 있다. 혐오의 한자는 ‘싫어할 혐(嫌), 미워할 오(惡)’자다. 싫어서 미워하는 감정이 혐오다. 오늘 본문에는 ‘타아브(תעב)’라는 단어가 나온다. ‘몹시 싫어하다’란 뜻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몹시 싫어했던 대상들이 있었다. 에돔 사람과 애굽 사람들이었다. 왜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셨을까? 오늘은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에돔인과 애굽인은 한마디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사람들이다. 에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에서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왕의 대로를 이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것을 거절했다. 에돔은 에서의 후예다. 이스라엘과는 형제 관계였지만 그들은 냉정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 땅을 우회하기 위해 홍해까지 내려가야 했다. 네게브 광야를 지나가 본 적이 있는가? 홍해가 있는 에일랏까지 차로 가려면 광할한 네게브 광야를 지나야 한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마음이 상했다고 기록한다(민 21:4).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많이 죽게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 사람을 생각했을 때 증오심으로 이를 갈았을 것이다.
애굽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사람들인가? 모세 당시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아 무자비한 노동을 강요했다. 그들의 왕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강성해지자 대량학살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아들이 태어나거든 그 아이들을 나일 강에 던지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자 그런데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다음 세대를 향하여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평생을 증오해도 모자랄 것 같은데, 무슨 이유에서 였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유를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자유로워지려면 미움을 버려야 한다. 그들이 과거 그들의 원수들을 계속 미워했다면 어떤 결과가 따랐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몸은 애굽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그 마음 안에 있는 애굽을 빼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을 계속 미워했다면 그들은 정신적으로 여전히 증오라는 ㅇ마음의 사슬에 묶여 있었을 것이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다음 세대들이 과거에 묶여 살기를 원치 않았다. 자신들을 괴롭게 했던 자들에 대한 원망과 증오를 버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여전히 과거에 묶여 현재의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모세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그들이 네 형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에돔의 조상은 에서였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 땅을 통과하게 해달라는 요청이 거절당함으로 모욕을 받았지만, 그 일에 대하여 보복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에돔의 죄는 괘씸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 죄인인 에돔 사람들을 미워해선 안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괴로움을 당한 상황 속에서도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모세는 또한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말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땅에서 객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모세는 매 칠년마다 종을 자유케 하고, 그들을 놓아줄 때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후히 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그렇게 명령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 15:15,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 이러한 맥락의 명령은 이번 주 토라포션에서도 발견된다. 신 24:21-22,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특히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너희들이 종으로 어려움을 당해봤기 때문에 너희들은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을 박해했던 애굽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종으로 사는 것에 대한 고통이었다. 그들은 과거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복수의 칼을 갈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와 혐오 대신 그 때의 고통을 기억하며 다른 사람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정말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이제 과거의 피해자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것을 멈춰야 했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증오와 혐오를 포기해야 했다. 얼마든지 미워해도 될 이유가 있었지만 미워하려는 의지를 접어야 했다. 그래야만 약속의 땅에서 여전히 과거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미래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몽상가의 비현실적인 명령이 아니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명령이다… 미움을 미움으로 갚으면 미움만 늘어날 뿐이고, 별이 사라진 밤을 더 어둡게 만든다. 어둠을 몰아낼 수는 있는 것은 어둠이 아니다. 빛만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미움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미움이 아니다. 사랑만이 미움을 몰아낼 수 있다.”
우리가 나를 괴롭게 한 형제나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역시 용서받은 자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리는 누가 나를 한 번만 괴롭혀도 쉽게 피의 보복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끊임없이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주인의 자비로 빚을 탕감 받는다. 그런데 그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를 옥에 가둔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이렇게 말한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그래서 그 주인은 그가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넘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용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용서받은 자라는 증거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권한다. 엡 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 중 상처 받고 싶은 사람은 없다. 상처를 주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관계 속에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경험한다. 상대방이 내 분노의 뇌관을 건드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 안에서 폭발하는 것이 있다. 악독과 분노다. 그 사람을 비방하고 싶고, 어떻게 해서라도 보복하고 싶은 악의가 올라온다. 이럴 때 바울의 처방은 간단하다. 그런 마음을 버리라는 것이다. 서로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용서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내가 남들보다 분노지수, 혐오지수가 높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천성이 그렇다고 그대로 살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바울의 권면대로 그런 마음들을 버릴 수 있다. 옛사람의 천성을 새사람의 성품으로 바꿔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용서받은 자임을 기억할 때 상대방을 용서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용서하는 자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경험하는 자들이 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6:14-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는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음으로 그 사람에게 내가 받은 상처를 되돌려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용서하지 않는 것이 보복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그가 용서할 때까지 평생 원망과 원한의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과거를 떠나 보내지 못하고, 자신을 피해자라고 정의하며 여전히 피해자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결국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을 늘 피해자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분노와 증오를 안고 사는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괴롭게 한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여러분을 괴롭게 했던 다른 사람들도 용서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누릴 가나안 땅에서 자유로운 미래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로 종에서 자유자가 되었다. 그들은 애굽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들을 괴롭혔는지를 기억하며 그들을 미워하라고 구속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종에서 해방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들도 다른 사람을 자유케 하라고 부름 받은 것이다.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를 괴롭게 할 수 있다. 내가 기도 응답으로 알고 들어간 직장에서 상사가 바로처럼 나를 노예로 부려먹을 수 있다. 그러나 미움과 증오는 부름 받은 자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혐오의 시대를 살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인터넷에서 무수한 혐오의 말들을 접한다. 증오 범죄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안전에 대한 경계심이 증폭됐다. 사회가 불안하다 보니 낯선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화되고, 그 경계선이 침범되는 것 같을 때 우리 안에 ‘혐오’라는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혐오는 우리 사회가 영적으로 얼마나 빈곤한가를 보여주는 지표다.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영혼은 존재적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존재가 불안한 영혼은 낯선 사람이 자신의 선을 넘을 때 혐오라는 반응을 선택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연결된 영혼은 존재적인 불안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한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 낯선 이방인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으로 섬겨야 할 대상임을 분명히 하셨다.
다른 사람들이 선을 넘어 내 경계로 들어올 수 있다. 이러할 때 우리는 혐오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계를 넘어 사랑과 자비로 서로를 대해야 한다. 혐오의 종말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전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었다. 이것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원하는 우리들의 조건이 되기를 바란다. 바라기는 우리의 미래 약속의 땅에 미움과 증오를 달고 들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과거에 고통받았던 기억이 우리를 아프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땅에서 혐오와 증오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용서가 흐르는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