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9월 2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3 기쁨의 능력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신 26:11)
한자는 뜻글자이기에 글자를 잘 관찰하면 숨은 뜻을 발견할 수 있다. 기쁠 희(喜)자는 선생님[士]의 입에서[口]에서 나오는 말을 두 발[ㅛ]로 잘 실천하고, 그 결과를 남에게도 입으로[口] 전파하면 기쁨이 생긴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처럼 기쁨이란 감정은 좋은 일이 생기면 저절로 찾아오기도 있지만, 배움을 통하여 그 기쁨의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감정이다. 지금 여러분의 기쁨의 능력을 수치로 환산한다면 얼마나 될까? 오늘은 세가지 차원에서 기쁨의 능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기쁨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기쁨의 첫번째 차원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기뻐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신 26: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여기서 기쁨이라는 히브리어 명사 ‘씸하(שמחה)’가 ‘즐거워하라’는 명령형 동사로 쓰였다. 다른 신명기 말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 28:47-48,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 여기서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란 표현이 나온다. 히브리어 ‘씸하’가 ‘기쁨’이라는 명사로 사용되었다. 자 그런데 특이한 것은 ‘씸하’가 저주 계명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며, 그가 철 멍에로 너를 멸할 것이라’ 이 모든 저주가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바로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좀 황당하다. 기쁨 없이 사는 게 삶의 최선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기쁨을 잃고 산다고 그것이 저주받을 일이거나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과 즐거운 마음을 잃어버렸을 때 주리고, 헐벗고,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성경에서 ‘씸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씸하’는 성경에서 ‘기쁨, 즐거움, 행복’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씸하는 번역으로 옮길 수 없는 미묘한 의미가 있다. 기쁨, 즐거움, 행복은 모두 개인이 홀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런데 씸하는 개인적인 감정만이 아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공유된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며 느끼게 되는 감정이 바로 ‘씸하’인 것이다. 신명기 본문에서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것은 첫 소산을 드리는 즐거움에 아무도 예외 되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 받은 백성들의 사회적 책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을 개인적 차원에서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추구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놓친다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강력하게 경고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개인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 산다. 그런데 행복과 번영을 추구할수록 우리는 자신의 행복과 번영을 확장하는데 더욱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덜 가진 사람들이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된다. 사회가 그러한 방향으로 간다면 그 사회 내에서 ‘씸하’는 사라지게 된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누리는 기쁨과 행복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사회는 물질적으로 번영을 이루었을 지는 모르지만, 함께 망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신명기서는 그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씸하는 내가 얼마를 가졌는가에 따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많이 벌어서 많이 쓰기 때문에 커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과 나눌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바로 ‘씸하’인 것이다.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기쁨은 이처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기쁨의 두번째 차원은 ‘오늘’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전도서에는 ‘씸하’라는 말이 열 일곱 번 나온다. 그런데 전도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헛되다’라는 말이다. 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인생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탄식하는 전도서에서 ‘씸하’가 그렇게 많이 언급된 이유가 뭘까? 성경에 나오는 전도자는 모든 것을 가져본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인생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탄식한다. 여기서 ‘헛되다’의 히브리어는 ‘헤벨(הבל)’이다. 이는 ‘짧은 호흡’이란 뜻이다. 우주는 영원히 지속되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은 짧은 한숨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우리 삶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붙잡으려는 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헛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전도자의 결론은 이렇다. 전 3:12,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לשמוח)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전 3:22,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ישמח)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전 11:8,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ישמח)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 전도자가 말하는 기쁨은 내일에 있지 않다. ‘오늘’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축하하는 데 있다.
해마다 초막절이면 유대인들은 초막에서 일주일을 보낸다. 안락한 집을 놔두고, 바람과 추위와 비가 내릴지도 모르는 초막에서 그들은 생활한다. 그런데 그들은 그 시간을 ‘즈만 씸하테누’라고 부른다. ‘우리들의 기쁨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내일 그들의 삶에 어떠한 일이 펼쳐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 그들이 하나님이 초대하신 우주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주신 삶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처럼 ‘오늘’의 기쁨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오늘’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축원한다. 그런 사람은 내일 벌어질 일들 때문에 염려하지 않는다. 내 손에 지금 주어진 일을 내 몫으로 생각하며, 그 일을 즐겁게 감당할 것이다. 캄캄한 날들을 맞이 할 때도 있지만, 그 때에도 오늘의 감사와 기쁨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우리의 삶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태도인 것이다.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기쁨은 이처럼 ‘오늘’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기쁨의 세번째 차원은 ‘다시’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기쁨을 돕기 위해 이렇게 편지했다. 빌4:4-5,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한다. 감정을 명령한다는 게 좀 특이하다. ‘기뻐하라’는 명령을 따른다고 감정이 쉽게 달라질 수 있을까? 바울에 의하면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기쁨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기에 바울은 그것을 취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특별히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기쁨의 원천을 밖에서 찾는다. 돈, 명예, 외모 때문에 기뻐한다. 그런 것이 기쁨의 기초라면 그 기쁨은 외부 환경의 변화에 의해 쉽게 사라지고 만다. 돈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명예와 외모도 어느 순간에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가진 자, 나보다 능력이 많은 사람을 보면 내가 그동안 누려왔던 기쁨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질 수 있다. 바울은 유대인이었다. 율법의 의로 흠이 없던 바리새인이었다. 젊은 나이에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 되었다. 그의 출신과 그가 쌓아 올린 명예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기뻐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겼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그에게 가장 고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기쁨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울은 주님 안에서 최고의 기쁨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처럼 기쁨의 원천은 세상의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 안에 있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또 이렇게 권면했다.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 영혼은 무풍지대가 아니다. 순간 사이에 근심하고 염려할 일들이 밀려 온다. 기쁨은 주변의 상황 때문에 쉽게 빼앗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을 권했다. 기도해야 우리는 근심과 염려를 몰아낼 수 있다. 기도해야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 마음에 평강이 임할 때까지 하는 것이다. 기도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내야 우리는 상황과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그것과 상관없이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기쁨은 이처럼 기도를 통해 ‘다시’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코로나 이후 공동체가 많이 약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와 함께 누리는 기쁨인 ‘씸하’보다는 네플릭스, 유튜브, 컴퓨터 게임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기 몰입적인 것을 통해 기쁨을 추구하고 있다. 교회인 우리는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기쁨을 추구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세상과 함께 나누며 즐거워해야 할 사명이 있다. 우리는 외적 환경이 우리를 흔들지 못하도록 더욱 주안에서 굳건히 서야 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해야 한다. 기도와 간구를 통해 환경과 사람이 주는 염려로 인해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삶에서 ‘함께’ 기뻐하는 능력을 회복하게 되길 바란다. ‘오늘’을 기뻐하는 능력을 회복하길 바란다. ‘다시’ 기뻐하는 능력을 회복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나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기쁨, 씸하가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