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44 불멸의 비결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9월 9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4 불멸의 비결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 31:12)

우리는 우리의 삶이 영원하길 바란다. 우리는 죽어서도 나의 다음 세대에게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을 가진 필멸의 존재다. 태어나서 자라고, 나이를 먹고, 언젠가는 죽게 된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모세의 마지막 장면이 나온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담담히 말한다. 31:2, “이제 나이 백이십 세라 내가 이상 출입하지 못하겠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모세는 ‘나이라는 한계’와 ‘자신은 요단을 건너지 못한다는 한계’에 부딪힌다. 한계에 부딪힌 모세에게 하나님은 두 가지 명령을 내리신다. 이 두 계명에서 우리는 불멸의 존재가 되는 비밀을 배우게 된다. 오늘은 그것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지도자 모세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가 사라진 뒤의 이스라엘을 생각하셔야 했다. 그래서 두 가지 명령을 내리신다. 유대인들은 토라의 계명이 모두 613개라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리신 마지막 두 가지 명령이 바로 612번째와 613번째 계명인 것이다. 612번 째 계명은 이렇다. 31:12, “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7년마다 백성들을 모아 토라를 공개적으로 낭독하라는 계명이다. ‘핰헬(הקהל)’의 법이라고 하는데, 핰헬은 ‘모으라’란 뜻이다. ‘모으다’란 뜻인 ‘카할(קהל)’의 명령형이다. 이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매 7년마다 한 곳에 모여 토라를 함께 읽어야 했다. 랍비 람밤은 “온 나라가 함께 모여 지도자가 토라를 읽는 것을 들을 때, 그 경험은 시내산에서의 계시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온 민족이 모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다음 세대를 위한 계시 체험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핰헬의 계명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여러 세대를 거쳐서도 멸하지 않는 비결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것은 토라가 그저 두루마리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님을 통해 성경책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가 지키고 따라야 할 언약의 말씀으로 각자의 마음에 새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서 토라를 함께 읽으며 언약을 갱신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여호수아 때 그러한 일이 있었다. 24:25, “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였더라 요시아 왕의 개혁도 공개적인 말씀 낭독을 통해 이루어진다. 왕하 23:2-3,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왕이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느헤미야의 개혁도 말씀의 낭독을 통해 이루어진다. 8:1, 8-9,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낭독하는 것을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우는지라 이처럼 함께 모여 토라의 말씀을 읽고 언약을 새롭게 함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은 멸망의 길에서 돌이켜 다시 자신들의 사명에 헌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핰헬의 명령을 지킴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다시 새로움을 유지하고 불멸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성경을 읽다가 가슴이 뛰어본 적이 있는가? 울어본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이 없었다면 지금이 성경을 열어야 할 때이다. 우리는 성경을 주기적으로 읽으며 우리 영혼의 새로움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613번 째 토라의 마지막 계명은 이렇다. 3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토라의 내용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라는 것이다. 노래는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노래는 우리가 부를 때 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 계명은 토라를 각 세대마다 새롭게 하는 의무에 관한 것이다. 감정과 열정을 담아 토라의 내용을 노래로 부르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도 가르치며 전달하라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를 예견하며 다음과 같은 예언을 남긴다. 31:20,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언약을 어기리니 이 말씀의 예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의 원인은 궁핍이 아니었다. 풍요였다. 그들의 멸망의 원인은 고난이 아니었다. 안락함이었다. 모세는 이어서 말한다. 31:21-22,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그러므로 모세가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쳤더라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증인이 될 노래를 남겼다. 노래는 기억에 오래 남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모세가 남긴 노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노래가 되었다. 그들이 이 노래를 기억하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분의 뜻을 다 이루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612, 613번째 계명은 모두 ‘연속성’에 관한 계명이다. 하나님은 이 두 계명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불멸의 비결을 가르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 멸망하지 않고, 신앙의 새로움을 영속화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먼저는 ‘핰헬의 법칙’, 즉 공동체가 정기적으로 모여 토라를 낭독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토라의 계시는 그 집회에 참여하는 세대마다 새롭게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모세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도 이 ‘핰헬’의 명령을 따르면서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세가 요단을 건너지 못하고 120의 나이로 죽었어도, 그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 남아 불멸하게 된 것이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말했다. 29:14-15, “내가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있는 자와 오늘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이니그가 백성들에게 세운 언약은 당시 모압 땅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 그들과 함께 있지 아니한 다음 세대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 말은 어느 세대이든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설 때 그들은 언약 안에서 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육신으로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굳게 설 때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그들과 함께 서게 되는 것이다.

이어서 하나님이 가르치신 불멸의 비결은 토라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나의 노래, 나의 신앙 고백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노래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내 인생이 여기까지’라는 한계를 직면할 때 우리는 절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한계에 직면한 모세에게 그 한계를 뛰어넘어 불멸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끝까지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렇게 선포했다.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우리 육신은 소멸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불멸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에 동참해야 한다. 내 한계 앞에 멈춰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는 세대를 통해 계속해서 하실 일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못다한 일을 다음 세대를 통해 계속 이루어 가신다. 그리하여 믿음의 세대를 일으키는 것은 나의 한계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불멸에 동참하는 비결인 것이다.  

이제 다음 주는 유대력으로 신년이다. 그리고 신년 이후 대속죄일까지 열흘 간의 경외의 날들이 이어진다. 유대인들은 이 기간 본격적으로 참회한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기 위해서다. 그래서 자기가 어떤 사람에게 잘못한 일이 생각나면 그 사람을 찾아가 직접 용서를 구하기도 한다. 구제비도 많이 낸다. 욤 키푸르가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라고 믿기에 그 날이 오기 전에 회개하는 것이다. 그들도 불멸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옛 언약이 아니라 새 언약에 대해 말씀하셨다. 31:31-33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언약을 맺으리라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백성이 것이라이 새 언약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언약을 지킬 수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새 언약을 완성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모세가 전한 언약이 아니라 예수님이 전한 새 언약 위에 서야 우리는 불멸하게 되는 것이다.욤 키푸르의 진정한 의미도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최후 심판을 행하실 때 완성되는 것이다. 20:12, 15, “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자나 작은 자나 보좌 앞에 있는데 책들이 있고 다른 책이 펴졌으니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고 영원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은 사실 인간의 모든 두려움 중에 가장 핵심적인 두려움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이 두려움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셨다. 9:27-28,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님 때문에 결국 우리는 죄의 사함을 받고, 영원히 사는 불멸의 소망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욤 키푸르는 더이상 짐승의 피를 의지하거나 자신의 선행을 의지하는 날이 아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불멸의 확신을 얻는 날이 되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불안한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생존에 대한 염려가 끊이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종종 마주치는 것은 나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 너머 영원을 이끄시는 분이다. 사람들은 불안할수록 나 자신의 커리어와 능력을 의지하려 한다. 그러나 시대가 불안 할 때 우리가 의지할 유일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언약이다. 예수님은 약속하셨다.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약속을 믿고, 이 언약 위에 서야 우리의 삶은 불멸의 목적을 이루게 된다.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이 하실 영원한 일에 주목할 자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 그것이 소멸하는 세상에서 불멸하는 유일한 삶인 것이다. 바라기는 불멸을 약속하신 주님의 언약 안에서 영원한 것을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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