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9월 30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7 믿음의 그늘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23:42-43)
오늘부터 초막절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해 초막절마다 일주일 동안 초막에서 살라고 명령하셨다. 유대인들은 이 명령을 오늘날까지 지키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일주일이 아니라 40년을 초막에서 살았다. 그들이 통과해야 했던 광야는 힘든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지 않았다면 하루라도 버틸 수 없는 곳이 광야였다. 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 지 알 수 없었다. 자고 일어나서 또 다시 마주하는 현실은 메마른 광야 뿐이었다. 그들은 지속되는 불안정의 시기를 매일 경험해야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고통스런 광야를 기억하는 초막절을 ‘즈만 심핫테이누(זמן שמחתינו)라고 부른다. ‘우리 기쁨의 절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초막절을 통해 진정한 기쁨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초막절이 어렵고 힘든 환경과 상관 없이 다시 기쁨을 회복하게 하는 시간이라고 믿었다. 이들이 어떻게 그러한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을까? 오늘은 초막절의 의미를 함께 살펴보며 우리의 삶에서도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초막이 상징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것이다. 예측 불가능한 현실과 함께 지내는 것이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도 그냥 초막 하나 치고 살다가 구름이 이동하면 그것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다. 유대인들만큼 세대를 거쳐 위기와 불확실성을 많이 경험해 본 민족이 없다. 집을 잃고, 나라를 잃고, 거친 광야로 내몰려본 경험을 이처럼 많이 해 본 민족이 없다. 성전은 파괴되었고, 파괴된 성전은 곧바로 다시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초막은 파괴되어도 내일 다시 세울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 초막이 주는 위안이 있다. 초막 속에 고된 몸을 누이며, 초막 지붕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며, 땅의 현실이 아니라 다시 하늘의 하나님을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수카(초막)를 만들 때 가장 신경 쓰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지붕이다. 지붕은 그 사이로 밤 하늘의 별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낮에는 햇빛보다 더 많은 그늘을 제공할 수 있도록 충분히 덮여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늘보다도 햇빛이 더 많이 들어오는 수카는 부적절한 것이라고 그들은 여긴다. 따라서 랍비 야곱 아셀 싱클레어는 ‘수카의 본질은 그늘이다, 즉, 그림자다’라고 말한다. 그림자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림자가 거기 있으려면 뭔가가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무언가의 실체를 볼 수 없지만 그림자 때문에 그 실체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초막에 앉는 것은 믿음의 그림자에 앉는 것이라고 여긴다. 수카에 앉아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실체를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심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랍비 야곱 아셀 싱클레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튼튼한 집을 짓더라도, 그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초막에 앉은 사람 위에 드리워진 믿음의 그림자는 두께 3미터의 콘크리트 지붕보다 더 강합니다. 믿음의 그늘에 사는 나라는 존재가 지금 여기 너머, 인간이 태양빛 속에서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 너머로 확장된다고 선포합니다. 믿음의 그림자 속에 사는 나라는 믿음의 그림자인 수카의 그늘에서 그 믿음을 끌어냅니다.” 결국 광야에서 그들이 지었던 수카는 그 그늘 밑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그들을 이끌었던 것이다.
초라한 초막의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그늘이 되었다는 말은 놀라운 간증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놓치고 있는 초막의 또 다른 본질이 있다. 그것은 초막이 미래에 나타날 거처를 생각하게 하는 한 모형이라는 것이다. 초막은 임시로 거주하기 위해 짓는 것이다. 한 자리에 눌러 살기 위해 짓는 집이 아니다. 이 초막에서 우리는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나그네길임을 알게 된다. 잠시 텐트 치고 지나가는 곳임을 알게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조상들이 다 이 땅에서는 ‘나그네’요, ‘본향을 찾는 자’로 살았다고 기록한다.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의 시선은 이 땅에 있지 않았다. 물론 발은 땅에 디디고 살았지만, 시선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본향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역시 초막에서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본향집이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고 허름한 초막은 믿음의 사람들에겐 ‘영원(eternity)’으로 이어지는 공간인 것이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매해 초막절을 지키지만 그들의 시선은 미래를 향하고 있지 않다. 장차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장막’에까지 이어지고 있지 않다. 초막은 과거에 고생하며 그것을 극복했던 곳으로만 기억되어선 안 된다. 미래에 우리가 영원히 거할 장막으로 연결돼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여기서 ‘우리의 장막 집’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을 가리킨다. 우리가 죽으면 벗고 가게 되는 우리 육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장막 집’을 헬라어로 ‘스케노스 (σκήνους)’로 표현한다. 스케노스는 ‘임시 거주지’라는 뜻이다. 우리 육신은 죽으면 벗어 놓고 가야하는 임시거주지이다. 바울은 이 땅에서의 삶이 잠시 머물다 가는 임시 거주지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이 임시 거주지가 무너지더라도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았다. 이것이 초막 속에서도 영원을 보는 자의 믿음이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초막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장차 믿는 자에게 펼쳐질 장막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계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의 장막이 펼쳐질 때 이제 우리 인생의 광야는 영원이 끝이 나게 된다. 그 끝이 바로 천국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볼 때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영원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결코 지금 현재의 삶을 무시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영원은 현재를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중요한 것은 영원의 관점에서 현재를 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원의 관점에서 현재를 봐야 우리는 현재의 상황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현실의 환란이나 어려움 때문에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다. 오히려 영원한 삶을 준비하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현재의 확실성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용기다. 믿음은 불안정과 위기 한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상황과 환경은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여정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초막 하나만 있어도 하나님을 따라 이동하는 삶에 기쁨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초막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유대인들은 초막에 살아보면서 우리 조상들도 이 초막으로 40년을 버텼는데 나도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초막은 불안과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을 오히려 길들이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도 언제 광야가 시작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코로나가 팬데믹이 될지 누가 상상했겠는가? 불안은 예고 없이 우리 삶에 들이닥치는 것이다. 나의 건강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우리의 경제 상황이 다음 달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러한 두려움이 찾아올 때 초막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상황이 불확실해도 살 수 있겠구나’란 생각을 하게 한다. 비록 우리 삶에 광야가 펼쳐진다 해도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고, 이끄시겠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초막 속에서 내일의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것이 오늘 내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지켜내는 비결인 것이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이렇게 말했다. “초막절은 불안정(insecurity)의 축제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더 크고 강한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되는 용기 때문에 공격 당하기에, 그들이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의 축제입니다. ‘믿음의 그늘 아래’에서 초막에 앉아있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안전의 전부입니다.” 이처럼 초막절은 안정속에서 기뻐하는 절기가 아니다. 불안정한 환경속에서도 믿음의 그늘에 앉아 그래도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기로 결심하는 절기인 것이다.
유대인들이 초막 속에서 기억하는 것은 그들을 힘들게 했던 환경이 아니다. 많은 어려움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다. 그들은 초막에서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웠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 안에 있다가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성막 위에 떠오르면 초막을 거둬 이동해야 했다. 그들이 만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그들이 누릴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의 임재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경험했던 그 영광과 임재를 초막절을 통해 계속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과 임재가 오늘 육신의 장막 속에 사는 우리에게도 일상의 체험이 되길 원하신다. 이 땅에서 우리는 나그네처럼 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영원한 것에 이어지길 원하신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뭘까? 그것은 예배이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믿음의 그늘에 앉게 된다. 예배는 광야와 같은 우리의 현실 속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끌어 오는 유일한 수단이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시 27:5-6,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은 환난 날 초막 속에서 자신을 비밀히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다짐한다.시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그는 왕이 되었어도 그가 구했던 변함없는 한 가지 일이 있었다. 그것은 주의 장막에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임재를 구하는 삶이었다. 그가 구했던 한 가지는 바로 예배였다. 이처럼 예배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전능자의 그늘에 앉게 되는 시간이다. 믿음의 그늘에 앉아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와 보호를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다가온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이 광야일지라도 그곳에서 노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절대 믿음을 회복하는 전능자의 그늘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불안한 세상 속에서도 기쁨으로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