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48 기쁨의 완성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10월 7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8 기쁨의 완성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 23:34)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 있다. 성경은 그것을 ‘여호와의 절기’라고 말한다. 히브리어로는 ‘모에드(מועד)’인데, ‘정해진 때’라는 뜻이다. 절기는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공휴일이 아니다. 절기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정하신 하나님의 시간이다. 예수님은 일년 중 어느 때라도 십자가에 달리실 수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유월절에 일어났다.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사망의 세력이 넘어갔던 구약의 유월절과 같은 시간에 일어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어느 때라도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실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아가신 뒤 삼일 후에 부활하게 된다. 이 날은 구약에서 초실절을 지키는 날이었다. 이로써 예수님은 모든 죽은 자들이 다시 사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성령의 오심도 일년 중 어느 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오순절, 하늘 아버지가 약속한 것을 선물로 주시는 때에 일어난 것이다.

이제 오늘이면 초막절이 끝난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초막절을 지키라고 하셨을까? 오늘은 초막절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초막은 히브리어로 ‘수콧(סכות)’이다. 23:42-43,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초막절을 통해 기억하길 원하셨다. 그래서 초막절은 일주일 동안 초막에 살면서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분임을 자녀들과 함께 기념하는 날이다.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불만을 만들어내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남들이 소유한 것을 내가 소유하지 못했을 때 슬픔을 느낀다. 그러면서 너무도 쉽게 감사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허름한 초막 안에 누우면 내가 남들보다 더 갖고 덜 갖은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광야와 같은 시절도 이러한 장막을 치고 통과했음을 기억하게 된다. 그래서 초막절은 다른 사람과 나의 삶을 비교했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감사와 기쁨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다시 붙잡게 되는 시간인 것이다.

초막은 임시로 거주하기 위해 짓는 것이다. 하나님이 움직이라 하시면 바로 말뚝을 뽑고, 삶의 재배치를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초막의 삶인 것이다. 이 초막 안에서 인본주의는 발동될 수 없다. 하나님의 절대기준, 신본주의만 남게 된다. 초막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내가 움직이겠다’는 절대 신뢰의 상징인 것이다. 초막은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나를 가장 많이 사랑하시는 분이 이끄시는 곳이면 내가 어디든 따라가며 장막을 펴겠다는 사랑의 응답인 것이다.

아가서의 신랑은 신부에게 이런 고백을 한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4) 이런 프로포즈에 신부가 신랑을 따라 어디든 나설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렬하고, 많은 물도 죽음같이 강렬한 사랑을 끄지 못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 사랑이 이랬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동일하다. 지금도 하나님은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 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우리 역시 하나님과 함께 어디든 가겠노라고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성전이 있었던 시절 제사장들은 초막절 기간 동안 매일 다윗성 아래 있는 실로암 연못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물을 길어 성전 제단에 붓는 의식을 행했다. ‘심핫 베이트 하쇼에바(שמחת בית השואבה)’라는 의식이었다. ‘물을 길어오는 집의 기쁨’라는 뜻이다. 기우제 같은 이 행사를 그들은 왜 했을까? 그것은 이 초막절 기간에 하나님께서 그 해에 내리실 비의 양을 결정한다고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성전 뜰에서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물을 붓는 의식을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유대 문헌 미쉬나를 보면 ‘물 붓는 의식에서 기쁨을 보지 못한 사람은 평생 동안 기쁨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이 초막절 기간에 특히 기뻐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신성한 영이 기뻐하는 마음 위에 임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초막절 기간 특히 마지막 날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함께 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모였다. 사람들은 손에 횃불을 들고 수금과 비파와 심벌즈와 나팔을 불며 춤추고 노래했다고 한다. 대제사장이 실로암에서 길어온 물을 제단 위에 부을 때 백성들은 성전을 향해 서서 이렇게 함께 외쳤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으며 우리의 눈은 주를 향하나이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께서 성전 뜰에 등장 하신 것이다.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어제가 ‘호산나 라바’였다. 큰 구원의 날, 예수님이 등장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히브리 이름, 예수아는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사야서에는 이런 예언이 있다. 12:2-3,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히브리어 단어를 문자 그대로 읽으면 이렇다. ‘힌네 엘 예수아티,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너희가 기쁨으로 예슈아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이 예언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예수님의 이 선포에 제사장들은 놀랐을 것이다.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 ‘생수의 강’이 바로 성령이라고 말한다. 7: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자, 이것이 바로 초막절의 본질적인 약속인 것이다. ‘초막절에 너희가 간절히 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목이 마르도록 구원을 기다리는 너희에게 내가 성령을 부어주겠다’는 주님의 약속인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으로 초대하는 이사야서 55장을 인용하셨다.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러한 초청은 요한계시록 22장에도 나온다.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물이 없으면 목이 마르다. 성령이 없으면 우리의 영이 곤고해진다. 구원은 성령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기쁨은 우리 마음에 성령이 임해야 완성되는 것이다. 인생의 광야를 지나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봄의 절기는 예수님이 오셔서 그 의미를 완성하셨다. 그렇다면 가을 절기인 나팔절과 대속죄일, 초막절은 그 의미가 어떻게 완성될까?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 장차 영원히 거할 하나님의 장막이 있음을 말한다.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예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 모든 고통이 끝나는 때가 올 것이다. 이 초막절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해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유대 신년에 나팔이 울리는 것처럼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울릴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을 결정하는 대심판의 날이 있게 될 것이다. 그 심판이 끝난 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한 장막 아래 살게 되는  때가 오는 것이다. 따라서 가을 절기는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완성하실 절기인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완성될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다. 초막절을 통해 우리가 회복해야 할 믿음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초막에 머문다 해도 ‘주님 한 분이면 된다’는 고백이다. 하나님 한 분을 따라 어디든 가겠다는 우리의 결단이다. 하나님은 구원이 필요한 메마른 우리 삶에 성령의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되길 원하신다. 그리하여 우리의 심령이 사랑으로 불붙기 원하신다. 그 사랑은 우리의 이성과 감정을 초월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불붙어야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이다. 바라기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져 진정한 기쁨을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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