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서 강해 3 영광의 무게

2023년 10월 28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서 강해 3 영광의 무게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삼상 4:22)

며칠 전 아내와 장을 보러 마트에 갔다. 평상시 많은 사람들로 붐비던 곳이었는데, 너무도 한산했다. 가끔씩 우리와 인사를 나누던 유대인 계산원 아줌마가 우리를 발견하고 무척 반가와 하셨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지금의 상황으로 인해 몹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분은 “왜 우리에게 이러한 일이 벌어졌는지, 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이 질문은 아마도 지금 이 땅에 있는 유대인들이 동일하게 하고 있는 질문일 것이다.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 군대가 언약궤를 앞세우고 전쟁에 임했는데 참패하는 사건이 나온다. “어떻게 여호와의 궤가 우리와 함께 있었는데도 대패했을까? 여호와는 블레셋의 신들보다 약한 존재인가?” 이러한 질문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기원전 586년, 바벨론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무너졌을 때도 이런 맥락의 질문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이 있는데, 왜 예루살렘이 무너졌을까?”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이러한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들을 수도 없이 겪었다. 홀로코스트를 겪으며 많은 유대인들이 무신론자가 되었다. “내가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이들에게 던져진 신학적 난제를 푸는 열쇠는 무엇일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블레셋과의 전투를 살펴보며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삼상 4:1-2,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블레셋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당시 정복하지 못한 민족이었다. 여호수아 13장에는 정복하지 못한 블레셋 사람의 다섯 통치자들의 땅을 소개한다. 13:3, “블레셋 사람의 다섯 통치자들의 땅 곧 가사 족속과 아스돗 족속과 아스글론 족속과 가드 족속과 에그론 족속과…” 여기 나오는 다섯 지역은 블레셋의 대표 도시들이다. 정복하지 못한 블레셋은 두고 두고 이스라엘의 골칫거리가 된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는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을 치른다. 결과는 패배였다. 이스라엘의 전사자는 사천 명 가량이었다.

삼상 4: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이스라엘 진영에서패배에 대한 대책회의가 열렸다. 결론은 언약궤를 앞세워 전쟁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언약궤와 함께 했던 승리의 추억이 있었다. 그래서 언약궤를 앞세우면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실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들이 착각한 것이 있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언약궤를 앞세웠던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 하나님은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패배했는지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다. 그리고 패배를 자초했던 진짜 이유를 제거해야 했다. 그러한 과정 없이 그들은 단지 부적처럼 언약궤를 앞세워 승리하려 했던 것이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 사람들은 오히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게 된다. 그 결과 이스라엘 보병 삼만명이 죽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긴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한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에게 무조건 승리를 보장해주는 분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군대가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웠는데도 어째서 패배했을까? 이들에게 던져진 이 신학적 난제를 푸는 열쇠는 가장 먼저 그 패배의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이 희귀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다. 백성들을 영적으로 이끌어야 할 대제사장은 분별력이 없었고, 그 아들들은 제사장의 직위를 남용하며 악을 행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엘리 대제사장에게 당신의 계획을 말씀하셨다. 삼상 2:34-35,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하나님은 엘리의 가문을 끝내기로 작정하셨다. 따라서 블레셋과의 전쟁은 타락한 제사장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사시대를 끝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전쟁이었다. 그 전쟁의 배후에는 이제 혼돈과 불순종의 시대를 끝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패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승리만이 하나님의 뜻이라 단정했다. 패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오직 승리만을 위해 언약궤를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것은 우상숭배였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자기들이 위기를 당하거나 필요할 때 그들의 일을 처리해 주는 대상에 불과했다. 종교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될 때, 개인은 맹목적인 우상숭배자가 되고 그 사회는 타락하게 된다. 이 사건을 바라보며 우리는 지금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지 질문해야 한다. 하나님은 내가 십자가 목걸이를 했다고 무조건 복을 주시고 승리를 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맹목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언약궤를 잃어버렸다. 그것은 그들에게 민족혼을 빼앗긴 것과 같은 큰 상실이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탄식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는다. ‘이-카보드 (אי כבוד)’)’는 ‘영광이 없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민족에게 언약궤를 주셨을까? 하나님이 의도하신 언약궤의 본질은 무엇일까? 언약궤 안에는 세가지 물건이 담겨 있었다.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십계명이 적힌 두 돌판이다. ‘만나 항아리’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거부하고 불평했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론의 지팡이’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거부하고 스스로 지도자가 되려 했던 반역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두 돌판’은 금송아지 우상숭배 때문에 첫 번째 돌판이 깨어지고 두번 째로 주어진 것이다. 거기에는 끊임없이 거역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언약궤는 뿌리 깊은 인간의 죄성을 고발하는 상징물이다. 그러나 해마다 이 언약궤에 희생제물의 피가 뿌려짐으로 인간의 죄가 덮여졌다. 언약궤의 뚜껑을 시은좌, mercy seat이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진 자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언약궤는 인간의 무능과 죄성을 고발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는 상징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 언약궤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늘 기억하길 원하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언약궤는 예수 그리스도가 감당하신 십자가의 모형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인간의 죄를 덮고,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다.

언약궤를 잃고 영광이 떠난 상황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학적 위기에 빠졌다. “하나님의 영광은 빼앗겼고, 하나님의 자비를 느낄 수 없는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신학적 난제를 푸는 두번째 열쇠는 역설적이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과 자비를 주목하는 것이다. 삼상 4: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여기서 ‘빼앗겼다’라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닐칵흐 (נלקח)’이다. ‘보내지다’란  뜻인데, 뭔가의 목적을 갖고 그 이동이 허락된 뉘앙스가 있다. 궤가 빼앗기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은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기다. 그러나 사무엘서 저자는 언약궤가 자발적으로 이스라엘을 떠난 것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그들이 처한 위기가 하나님이 더 큰 역사를 이루시는 능동적 섭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나에게 고난과 위기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여야 다시 새 일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블레셋은 빼앗은 언약궤를 당시 블레셋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 아스돗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그것을 다곤 신전에 둔다. 자신들이 섬기는 다곤신이 여호와보다 세다는 것을 드러내기 원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아침에 보니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려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다시 세운다. 그러나 그 다음날 보니 이번엔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아 있었다. 본문에서 ‘끊어지다’는 표현은 히브리 동사 ‘카랏트 (כרת)’를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자르다’란 뜻이다. 고대 전쟁에서 포로를 처형할 때 목과 손을 자르는 관습이 있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를 포로로 잡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다곤신이 여호와께 포로로 잡혀 목과 손이 잘려 나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호와의 손’이다. 삼상 5:6,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 ‘여호와의 손이 엄중해졌다’는 표현으로 히브리 동사 ‘카바드 (כבד)’를 사용했다. 카바드는 ‘무겁다, 영화롭게 하다’란 뜻이다. 영광이라는 단어 ‘카보드’가 여기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게’로 표현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손이 영광의 무게로 나타나자 아스돗을 심판하는 도구가 되었다. 다급한 아스돗 사람들이 블레셋 방백을 모으고 의논한 끝에 여호와의 궤를 가드로 옮긴다. 가드는 골리앗의 고향이었다. 거인 족속들이 사는 곳이라 자신감이 넘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삼상 5:9, “그것을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역시 이곳에서도 여호와의 손이 나타나 그들을 심판한다. 그러자 그들은 또 다시 궤를 에그론으로 옮긴다. 에그론은 블레셋 전체를 아우르는 최고의 신 바알세붑이 있던 곳이다. 그곳 상황은 어땠을까? 삼상 5:11-12,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여기서도 하나님의 손이 영광의 무게로 나타나 그들을 심판한다. 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패배했지만 하나님은 패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의 패배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오히려 블레셋 진영에서 쉴 새 없이 그들을 공격하며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이처럼 패배하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에 주목할 때 우리는 신학적 위기 상황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찾게 된다.

에스겔서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가는 환상이 나온다. 이 환상은 예루살렘이 심판으로 멸망 받을 것에 대한 싸인이다. 멸망은 가혹한 것이다. 멸망은 아픈 것이다. 그러나 멸망을 통해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해진다. 죄에서 돌이키며 다시 하나님을 찾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이스라엘 민족을 흩으신 후에 행하실 새 일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스라엘 가운데 우상을 제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영을 주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11:19-20,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에스겔 43장에는 떠나갔던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환상이 나온다. 그런데 영광이 회복되는 전제가 있다. 43:8-9, “그들이그 행하는 가증한 일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노하여 멸망시켰거니와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거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 가운데에 영원히 살리라하나님의 영광은 언약궤가 있는 곳이라고 무조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며 우상과 악을 제거하는 백성가운데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내가 교회를 다닌다고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시지 않는다. 내가 순종하는 삶을 살 때 그분의 임재와 영광을 나타내신다.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가시는 것이다. 언약궤를 앞세웠던 이스라엘을 철저히 망하게 하신 것은 사실 하나님의 심판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고자 그들을 패배가운데서 연단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하길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승리에 관심이 있지 않았다. 그들이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것에 더 관심이 있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택한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기 원하신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가운데 펼쳐 가길 원하신다.

영광이란 단어 ‘카보드’는 ‘카베드’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다. 카베드는 ‘무겁다’라는 뜻이다. 영광은 무거운 것이다. 고통과 고난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의 무게를 견딘 자에게 영광도 따라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중세 스콜라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한다. 그들은 사람이 세상에서 부자가 된 것은 하나님께 축복받은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들이 말하는 영광은 세상이 추구하는 영광과 다름이 없었다. 우리는 힘과 맹목적인 승리를 추구하는 ‘영광의 신학’이 아니라 인간의 무능과 죄악을 덮어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시는 분이다. 지금 세상은 번영을 추구하고 요즘 많은 교회들도 번영신학에 열광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나와 내 가정이  잘되고 성공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순종에 관심이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올 때, 떠나갔던 하나님의 영광도 우리의 삶에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것일까? 어째서 언론들은 하마스의 주장을 그대로 보도하면서 이번 전쟁의 본질을 흐리고 오히려 반유대주의를 부추기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요즘 우리가 제기하고 있는 신학적 난제다. 오늘날 하마스를 비롯한 극단적 무슬림 테러단체나 이를 지지하는 무슬림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사용한다. 중동 지역의 분쟁은 이스라엘이 국가로 존재할 때마다 지속되었던 현상이다. 역사상 여러 제국들은 이스라엘을 침략했고, 지금의 중동에 있는 여러 아랍 국가들 역시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길 원하고 있다. 그 이유가 뭘까? 성경에 이런 기록이 있다. 시편 83:4-5, “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성경은 이스라엘을 멸하고자 하는 동맹을 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증오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증오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 계획을 역사속에서 이루어 오셨고 앞으로도 이루어 가실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 사탄이다.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면 그것은 곧 사탄의 운명이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을 멸하고자 힘써 왔던 것이다. 사탄은 반유대주의를 일으켜 이스라엘 민족을 전멸하기 원했다. 페르시아의 하만이나, 독일의 히틀러, 또한 지금의 이란 등 이스라엘을 완전하게 파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항상 실패했고,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런 약속을 하셨기 때문이다. 33:24-26, “너는 이 백성이 나 여호와가 택한 유다와 이스라엘을 버렸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 그들은 내 백성을 멸시하며 이스라엘을 나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나 여호와는 밤과 낮의 질서와 우주의 법칙을 만들었다. 내가 행한 일이 이와 같이 확실한 것처럼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후손을 버리지 않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을 다스릴 자를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분명히 택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네 백성의 이전 상태를 회복시키고 그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이스라엘을 지우려했던 자들은 오히려 그들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하마스도 곧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살아 남았고, 앞으로도 살아 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을 향한 반유대주의는 더욱 거세질 것이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교회에 대한 박해도 따라 올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와 그 분이 일하시는 손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말한다.고후 4:17-18,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바울은 영광을 무거운 것으로 표현한다. 그에 비해 환난은 가벼운 것이다. 이 땅에서 주님께 순종하며 환난을 견딜 때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진다고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처럼 보이는 이가봇의 시대,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 혼돈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일하신다. 그분의 손은 엄중한 영광의 무게로 나타나 세상의 악을 심판하신다. 그분은 말씀이 희귀해진 시대에도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자들을 통해 새로운 부흥을 준비하고 진행하신다.

언약궤를 앞세웠는데도 패배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했는데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해와 기대 속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다. 혹 우리 중에 하나님이 나의 이해와 기대대로 일하시지 않았다고 실망한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께 화가 난 분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실망하고 화가 났을 때 정말 겸손히 다시 하나님께 엎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이해를 뛰어 넘는 하나님을 그 영광의 무게대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영광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이가봇의 시대’에도 겸손히 하나님의 영광에 주목하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