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4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서 강해 4 전망 좋은 사람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삼상 7:5-6)
지난 주간 파리 14구의 아파트와 은행 건물 곳곳에 약 60개의 다윗의 별이 파란색 스프레이 페인트로 칠해졌다. 여기에 유대인들이 살고 있음을 알리는 표시였다. 전쟁은 가자지역에서 발발했는데, 이제 세계 곳곳에서 이스라엘 편이냐, 팔레스타인 편이냐 하는 편가르기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진짜 전쟁이 시작된 것 같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반유대주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너는 누구 편이냐”라는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쟁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저께 유창이 친구 이타이를 만났는데, 다음 주에 입대한다고 한다. 전쟁통에 자녀를 군대로 보내는 부모들의 마음이 어떨까? 이스라엘은 나라로 건국된 바로 그 다음 날부터 전쟁을 맞이 했다. 성경 역사 속에서도 이스라엘은 무수한 전쟁을 치렀다. 오늘 사무엘상 본문에서도 블레셋과의 전쟁이 나온다. 이스라엘이 치렀던 이 전쟁의 본질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오늘 이 전쟁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전망을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삼상 7: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지난 주 우리는 엘리 대제사장의 가문이 심판을 받아 몰락하고,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워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때 하나님의 언약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가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리고 20년의 시간이 지난다.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언약궤를 찾아 오지 못했고, 여전히 블레셋의 위협에 시달렸다. 그러나 한가지 변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모하다’라는 히브리어는 ‘나하 (נהה)’인데, 이는 ‘신음하다, 애통하다’란 뜻이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블레셋이란 존재 때문에 신음했다. 이것은 블레셋이 주는 고통에서 나온 수동적인 애통함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임재 때문에 슬퍼했다. 다시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그것이 없는 현실을 슬퍼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은 소망이 담겨진 적극적인 애통이었다.
그들은 오랜 기간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았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었다. 그러다가 블레셋과의 전쟁에 패했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빼앗겼다. 그들은 하나님 없는 삶이 고통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나님 없이 마음대로 살던 사람들에게 언약궤 없는 20년의 세월이 고통이라는 자각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것은 20년이란 시간에 그 비밀이 있다. 그 20년 동안 소년이었던 사무엘은 이제 어른이 되어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20년간 기도와 말씀으로 자신을 준비했다. 그리고 선지자 학교를 세워 하나님 나라를 이어갈 말씀의 종들을 양성했다. 시대는 어두웠지만 그는 꾸준히 하나님께 받은 말씀들을 선포했다. 사무엘의 말씀 선포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왜 고통가운데 있는지 그 원인들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고통가운데서 다시 하나님을 갈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무엘은 온 백성에게 이렇게 선포한다. 삼상 7:3,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음했던 진짜 이유를 알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블레셋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고통 당한 것은 바알과 아스다롯이라는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었다.블레셋 족속에 의해 고통받게 된 것은 단지 그 결과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행해야 할 전쟁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이 아니었다. 진짜 전쟁은 그들의 마음을 지키는 전쟁이었다.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끊어내야 하는 전쟁이었다.
바알은 당시 가나안에서 비를 주관하며 땅의 풍요를 책임지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아스다롯은 바알의 아내로 다산을 책임지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이 두 신이 고대 가나안 사람들에게 약속한 것은 실질적인 풍요였다. 당시 사람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이 성행위를 할 때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고 믿었다. 비는 풍요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자극하기 위해 성전에서 신전 창녀들과 성행위를 했던 것이다. 그것이 당시 가나안 땅의 종교였고 대세 문화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했었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라는 유일 신앙이 그들 마음 속에 자리잡기도 전에 그들은 가나안에서 너무도 감각적인 신이 숭배되고 있음을 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제 삶 속에서 바알과 아스다롯이 더 매력적이고, 자신들에게 실질적인 유익을 주는 신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쩌면 당시 농경사회에서 땅의 풍요를 담당하는 신을 섬기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들다는 판단을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번째 조항을 삶에서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여호와 한 분만을 섬겨야 하는 그들의 신앙을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줄 다른 우상에 대한 신앙과 섞어 버린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습관처럼 안식일도 지키고, 절기도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일상에서는 대세를 따랐다. 아마도 여호와만 섬기는 것은 고지식해 보였을 지 모른다. 그들은 그 시대 사람들 모두가 섬기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게 더 합리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교회 문을 나서고 나서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 자녀 교육의 현장에서 우리는 시대의 대세를 따르고 있진 않은가? 사랑은 섞일 수 없는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선택이고 사랑은 선택한 사람에 대한 충성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사랑이 그랬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보호의 손길을 거두셨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20년 동안 블레셋에게 시달리며 신음해야 했던 진짜 이유였다.
선지자 사무엘은 다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의 조건을 제시한다. 그것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전심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전심으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베콜 레바브켐 (בכל לבבכם)’을 직역하면 ‘너희들의 온 마음으로’이다. 유대인들에게 마음은 감정만이 아니다. 의지와 행동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는 단지 감정적인 후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행위의 변화를 말한다. 다음으로 사무엘은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라고 말한다. 당시 이스라엘은 집집마다 바알과 아스다롯 신상을 두고 섬겼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없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우상들을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제거하라고 지시한다. 이어서 사무엘은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나뉘지 않은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사무엘은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이라고 말한다.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을 따랐다. 그들은 자기들의 집에서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했고 여호와만 섬겼다. 이에 사무엘은 온 백성을 미스바로 소집한다. 그들은 거기서 온종일 금식하고 회개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그들의 잘못을 고백했다. 미스바는 히브리어로 ‘미츠페 (מצפה)’인데, ‘전망대’라는 뜻이다. 동사는 ‘고대하다, 기다리며 바라보다’는 뜻이다. 여전히 시대는 어두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에 모여 새로운 시대가 오길 기대하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를 맞이하기에 합당한 자로 자신을 준비하기 위해 철저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회개했다.
미스바는 어쩌면 사무엘 스스로 기도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전망을 얻었던 곳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든다. 사무엘은 어두운 시대를 탓하며 반역과 혁명을 꿈꾸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시대의 어둠을 밝힐 하나님의 계시와 전망을 구했던 사람이었다. 그 결과 그는 혼돈의 사사시대를 끝내고 왕정시대를 시작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이제 다윗과 같은 왕을 통해 메시아 시대를 예표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정 시대를 준비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전환기에 사무엘은 하나님의 전망을 구하는 자로 살았다. 그랬기에 그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로 전환하실 때 그 통로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이 움직였다. 미스바 근처 게바에 블레셋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백성들의 움직임을 파악했던 것이다. 그래서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선제 공격하기 위해 올라온다. 이 소식을 듣고 다급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간청한다. 삼상 7:8,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전쟁은 인간의 실존을 흔드는 것이다.전쟁 앞에 풍요와 번영은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했고, 사무엘은 그런 그들을 위해 어린 양을 잡아 번제를 드리며,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전쟁의 위기 속에서 사무엘은 다른 무엇보다도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예배와 기도에 응답하셨다. 큰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을 어지럽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망하는 그들을 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승리를 통해 자신들의 실존을 책임지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경험하게 된다.
당시 블레셋은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던 강력한 군대였다. 사무엘은 블레셋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투력을 향상시키거나 철로 된 무기를 개발하지 않았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문제가 하나님께 전심으로 돌아올 때 해결될 것을 알았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길 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임을 알았다. 그래서 회개하며 기도하기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의 기도는 블레셋의 위협 속에서 온 민족과 함께 오직 하나님만 구했던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사무엘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문제를 기도하며 분별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와 전망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는 시대를 전환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는 300년 넘게 진행된 사사 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이스라엘은 혼돈의 역사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된다. 그들이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 것이다. 히브리어 ‘에벤 하에젤 (אבן העזר)’은 ‘도움의 돌’이란 뜻이다. ‘에벤에셀’은 이처럼 회개하는 자,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자들에게 비로소 허락되는 경험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돈과 번영의 신, 맘몬이다. 하나님과 바알을 같이 섬겼던 사사 시대처럼 오늘날 우리 시대 역시 물질과 쾌락과 돈을 추구하는 시대다. 교회조차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성공과 부를 가져다 주신다고 가르치며 번영과 긍정의 신학을 설교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도했는데 성공과 부가 따라왔는가?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기대와 믿음 때문에 스스로 배신 당한 것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그것을 ‘긍정의 배신’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아무리 긍정적 사고와 태도로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일 수 밖에 없는 구조적 결함을 안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재물, 즉 맘몬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하나님 한 분보다 내게 번영과 성공을 가져다 주는 것에 눈 돌아가는 시대다. 그러나 우리가 내 실존의 삶에 도움을 주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한 조건은 한 가지다. 회개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이 시대 맘몬이라는 우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경험하기까지는 하나님의 전망을 구하며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준비했던 한 사람, 사무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망 좋은 사람이 시대를 전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은 전쟁 중이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 뿐만이 아니라 지금 온 세상 사람들의 실존을 흔들고 있다. 어쩌면 이 전쟁은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에 대한 싸인일 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더욱 기도의 전망대에 올라 하나님의 전망을 구해야 한다. 바라기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하나님의 경륜에 발 맞추어 다가올 시대를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