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1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서 강해 5 숨겨진 권력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삼상 8:19-20)
‘권력’은 누군가를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힘을 말한다. 어떤 공동체가 한 사람에게 공인된 힘을 실어주는 이유는 그 사람이 그 힘을 그 공동체를 위해 잘 사용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무엘은 ‘권력’의 좋은 예다. 사무엘의 ‘권력’을 통해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위협에서 벗어났고, 그가 사사로 있는 동안 이스라엘에는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그가 나이가 많아 다스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사무엘이 두 아들에게 사사직을 물려주어 브엘세바를 다스리게 했지만 그들은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블레셋과 다른 주변 민족들의 위협도 여전히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상황 때문에 불안했다. 더 강력한 권력자가 나타나 자신들의 상태를 변화시켜 주길 원했다. 그래서 구한 것이 왕이었다. 그동안 열 두 지파 동맹체였던 이스라엘은 이제 자신들을 이끌어줄 강력한 왕을 갖기 원했다. 왕을 세워 그에게 권력을 주고 그를 통해 안전과 번영을 이루기 원했다.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오늘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삼상 8:4-5,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이런 요청을 했을 때 사무엘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동안 그는 전국을 돌며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제 더 강력한 왕을 그들의 지도자로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사무엘은 백성들로부터 배신감과 거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삼상 8:7-8,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왕을 요구한 것이 왜 하나님을 버린 행위가 될까?
사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셨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특별한 계획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이었다. 출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동의했다. 이에 모세는 소를 잡아 그 피를 백성에게 뿌리며 이는 여호와의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라고 말한다. 그 때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따르는 하나님 나라 언약백성이 된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왕 되신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했다. 출 15:14-15, 17-18, “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이며 너무도 분명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강력한 왕이 없었음에도 세상 왕들을 정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나안 정복 당시 이미 경험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점점 모세가 노래했던 하나님을 잊어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보다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갔다. 그 결과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사라졌다. 하나님의 존재는 보이지 않았고, 대신 그들 눈에는 강력한 주변 나라의 왕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사무엘에게 나아와 눈에 보이는 왕을 구했다. 그들은 말했다.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모든 나라와 같이’ 되고자 했던 것,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주변의 찬란한 문명을 이룬 나라들을 보니 모두 왕이 있었다. 그러나 고대 근동에서 왕은 곧 신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 왕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권력으로 신화를 만들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것은 자신들의 번영과 안전을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겠다는 결단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시내산에서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포기하는 행위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날이 올 줄 아셨다. 그래서 이미 모세에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게 하셨다. 신 17: 14-15,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이어서 하나님은 이상적인 왕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 왕은 자신의 병마에 의지하지 않는 자이다. 아내를 많이 두거나 자신을 위해 은금을 많이 쌓지 않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고 읽으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는 자이다. 권력을 갖되 형제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겸손히 섬기는 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왕의 모습과 달리 왕의 제도가 갖고 있는 독소를 하나님은 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왕의 제도의 위험성을 설명하신다. 삼상 8:11, 15-18,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여기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가 있는데, ‘라카흐(לקח)’다. ‘to take, 취하다’란 뜻이다. ‘너희 아들들을 데려갈 것이다,’ ‘십일조를 거두어 갈 것이다,’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갈 것이다,’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갈 것이다’ 이런 표현에서 ‘라카흐’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한마디로 왕은 자신의 권력으로 ‘취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인 것이다.
왕의 제도는 한 국가를 효율적으로 이끌 수 있는 정치체계다. 그러나 거기에는 치명적인 독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왕에게 부여되는 절대 권력이다. 절대 권력을 맛본 왕은 그 권력을 유지하며 계속 그것을 휘두르기 원한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줄 수 있는 힘있고 가진 자를 위해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 권력은 정의와 공평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불의를 위한 도구, 약자와 가난한 자를 압제하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의 제도의 악영향에 대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왕을 요구한다. 삼상 8:19-20,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이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백성들의 요구대로 왕을 세우라고 하신다. 이스라엘은 왕을 요구함으로 이제 더이상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기를 포기했다. ‘다른 나라들과 같이’되는 것이 그들에겐 더 좋고 안전해 보였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기 보다, 보이는 왕의 권력과 그가 세운 병거와 문명을 더 신뢰한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의 허락으로 이스라엘에 왕들이 세워진다. 그러나 신명기 17장의 말씀대로 왕의 길을 간 왕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백성들은 왕 때문에 고통을 당했고, 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결국 다른 제국들에 의해 멸망을 당한다. 하나님께서는 왕들이 실패할 것을 아셨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왕의 제도를 허락하셨을까? 그것은 어쩌면 눈에 보이는 왕들이 얼마나 불완전한 자들인지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들이 가진 권력이 얼마나 힘이 없는 것인지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결국 이 땅에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참된 왕, 메시아가 와야 함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 땅에 오실 메시아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다. 사 9:6-7,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예수님은 이 약속의 말씀에 따라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의 통치를 시작하셨다. 그렇다면 지금 누가 그분의 통치를 받는 백성일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신 적이 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메시아, 곧 만왕의 왕으로 세상만사를 바로 잡을 절대적인 왕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칭찬하신다. 그리고 곧 이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막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베드로는 이 말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예수님께 항의한다. 자신이 기대했던 메시아, 만왕의 왕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악과 불의를 끝내고 세상만사를 바로 잡을 왕이 고난 받고 죽는다고?’ 어려서부터 오실 메시아에 대해 들어왔던 베드로로서는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면 그 권력을 나누어 갖기 원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가면서도 누가 더 크냐 싸웠던 것이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온 세상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분이 사용한 권력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기는 것이 진짜 권력임을 보여주기 원하셨던 것이다. 약육강식,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현대사회에서 섬김은 약자들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섬김은 큰 자들의 몫이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아낌없이 나누고 섬기는 자들을 통해 이 땅에 평화가 오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은 전쟁 중이다. 이스라엘에 더 강력한 정부가 들어서면 평화가 올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 불확실성이 커질 때 믿음으로 반응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안전장치를 구한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한 안전장치는 바로 왕이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리더십, 즉 주변 나라에서 모두 갖고 있는 왕의 제도가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를 결정하고 이끌어 가시는 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이 세상의 통치를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셨다.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을 다스리는 숨겨진 권력인 것이다. 바울은 그 분의 권력을 이렇게 묘사한다. 엡 1:20-22,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바울은 교회가 그분의 선한 권력이 세상 가운데 드러나는 통로임을 역설한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그 숨겨진 권력을 볼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의 눈이 열리길 기도했다.
여기 있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 왕의 백성들이다. 보이는 왕을 구하고 그 권력을 나누어 갖기 원하는 세상에서 영원하신 왕, 숨겨진 하나님을 따르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 숨겨진 권력을 따르는 자는 좁은 길을 가는 자이다. 그러한 사람은 내가 남들보다 더 높아지기 위해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권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숨겨진 권력을 따르는 자들을 통해 세상에는 평화가 오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눈이 열려 숨겨진 권력을 볼 수 있게 되길 기도한다. 그럴 때 권력은 선물이 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는 것이다. 바리기는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각자 있는 곳에서 숨겨진 권력이 되어 세상을 섬기며 평화를 가져올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