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9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서 강해 9 아둘람의 시간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22:1-2)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찾고, 나의 존재를 기뻐하던 시간들이 바로 그런 순간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웃을 수 없는 시간도 마주하게 된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느껴질 때가 그러하다. 골리앗을 무찌른 다윗은 한 순간에 이스라엘의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이스라엘 여인들은 거리에 나와 “사울을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외치며 그를 환호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다윗은 그 날 이후 사울 왕의 시기를 받게 된다. 그를 죽이려는 사울로 인해 다윗은 도망자가 되어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0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다윗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다윗은 하루 아침에 “I’m something”에서 “I’m nothing”의 시기를 맞게 된다. 자신의 존재가 거부 당하는 시간은 너무도 괴롭고 힘든 시간이다. 다윗은 그 힘든 시기를 어떻게 통과했을까? 오늘 함께 살펴보며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해 다윗은 블레셋의 도시 가드로 도망간다. 일종의 정치적 망명이었다. 그러나 아기스 왕의 신하들이 그를 알아보고 경계한다. 그러자 다윗은 왕 앞에서 미친 척하는 연기까지 한다. 살아남으려는 절박함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는 미쳤다는 이유로 쫓겨난다. 그는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인적이 드문 아둘람 굴에 숨게 된다. 아둘람 굴 속에 누워 있는 다윗의 신세를 생각해 보라. ‘내 인생 이대로 끝나는 걸까?’ 그는 슬프고 불안했을 것이다. 자신을 향해 소고 치며 환호하던 여인들의 노래 소리가 아직도 그의 귓가에 쟁쟁했을 것이다. 그가 거둔 승리로 인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다.그렇게 사랑 받던 그가 지금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신세로 굴 안에 숨어 있는 것이다. 언제 끝날 지 기약도 없이 그의 인생은 깜깜한 굴 속에 갇혀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기 시작한다. 그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인생수업을 통해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경험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되기 위해 받아야 했던 수업이었던 것이다.
다윗이 굴에 있을 때 지은 시가 있다. 이것은 도망자로 쫓겨다니던 당시 그의 내면의 갈등을 잘 보여준다. 시 142:1-4,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곧 기도]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그의 슬픔이 전해진다.그가 피난처로 알고 굴 속에 들어왔지만 이 곳이 언제까지 자신의 피난처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기도하면서 자신의 인생의 진정한 피난처를 발견하게 된다.시 142:5-6,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삶의 위협을 피해 도망친 곳에서 다윗은 자신의 진정한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게 된다.인생이 닫힌 곳에서 그는 피난처 되신 주님께 자신의 인생을 열어 보인다. 아둘람은 이처럼 다윗이 인생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더 깊은 의존을 배운 곳이다.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는 인생을 그 누구도 닫을 수 없다.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철저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갔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것, 그것은 그가 단순히 왕의 직분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하나님께 탄식과 호소를 마치고 다윗은 7절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7절,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이 예언적인 선포가 이루어진 것일까? 다윗에게 사람들이 몰려 오기 시작한다. 삼상 22:1-2,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그런데 다윗을 찾아 온 자들은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다. 모두 사울을 피해 다윗에게 온 힘 없는 약자들이었다. 이들은 다윗의 상황을 역전 시켜줄 만한 ‘의인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운명도 비참한데 이제 다윗은 또 다른 비참한 400명의 운명도 떠 안아야 했다. 다윗은 과연 이 사회적 추방자들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다윗은 이들이 내어 놓은 인생의 슬픔을 공감하며, 그들의 인생에 날개를 달아줘야하는 진정한 리더십의 시험대에 오른다. 아둘람 굴에 모인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무엘서를 보면 이들은 결국 ‘다윗의 사람들’이 된다. 그리하여 후에 다윗과 함께 다윗 왕국을 세우는 실제 주역들이 된다. 자신의 인생을 받아 준 다윗을 위해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다윗의 용사들이 된 것이다.
다윗이 굴에서 지은 또 한 편의 시가 있다. 시편 57편이다. 1-2절,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7-8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인생이 갇힌 듯한 캄캄한 동굴은 이제 다윗이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확정한 곳이 된다. 다윗은 그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하나님께 간구했고 하나님을 노래했다. 그러면서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선포했다. 새벽은 가장 어두운 밤을 뚫고 빛이 오는 시간이다. 다윗은 피난처 되신 하나님을 통해 그의 인생에 여명이 오고 있음을 믿음으로 선포한 것이다. 아둘람은 이처럼 새로운 시대를 여는 비전이 잉태된 곳이다. 그리고 이 비전은 그곳에 함께 있었던 400명의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수된다. 그리하여 이들은 후에 다윗과 함께 이스라엘 역사의 여명을 밝히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빚어지길 원하셨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철저히 자신을 내려 놓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져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미친 권위자를 그 위에 두셨다. 만약 다윗을 핍박했던 사울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다윗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철저히 고통스럽고, 철저히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시간을 지나면서, 다윗은 사람의 인기에 주목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주목하는 자가 되어 갔다.
다윗은 그의 손으로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다. 사울을 죽인다면 도망자로서의 그의 고난은 바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다윗의 사람들은그를 재촉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삼상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다윗은 사울을 원수로 여기지 않았다. 여전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여겼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했다. 그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에 맡겼다. 사울을 죽이고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는 도망자로 피해 다니는 시간이 연장될지라도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기로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내 인생이 동굴에 갇힐 때 그 원인 제공자들을 헤아린다. 그리고 그 인간들을 향해 원망하며 복수의 칼을 간다. 그러나 복수는 복수를 부를 뿐이다. 그것은 결코 인생에 날개를 다는 선택이 아니다. 인생에 날개를 다는 선택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윗처럼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노래 부르는 것이다. 철저히 주님께 피하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시간이 될 때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날개를 달아 주시는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처리하신다. 하나님의 사람은 탁월한 능력이 아니라 탁월한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말도 안 되는 권위자 밑에서도 순종의 훈련을 묵묵히 감당했던 것이다. 단순히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신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을 아는 것이 우리 인생의 꽉 막힌 굴에서 나오는 유일한 열쇠인 것이다.
다윗에게 아둘람의 시간은 그가 바보가 되는 시간이었다. 그의 삶에서 원망과 분노라는 독기가 빠져나가는 시간이었다. 그의 시간이 멈추고 그의 자아가 죽는 시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다윗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시간이었다. 그것은 허비되고 낭비되는 시간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데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다윗의 인생의 시간이 멈춰진 곳에서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이 비로소 작동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아둘람의 시간, 십자가의 시간, 고난의 시간은 내가 멈춰지는 시간이다. 그러나 나의 인생이 멈춘 것 같은 그 시간은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작동되기 위한 기회의 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둘람의 시간을 맞이할 때 복수라는 감정이 아니라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더욱 긴밀히 연결되어야 한다. 바울은 십자가의 비밀을 이렇게 말한다.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십자가를 져야 할 때 우리는 무력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를 감당하는 그 시간은 내가 멈춰진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지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능력으로 살아나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도 캄캄한 아둘람의 시간이 찾아올 때가 있을 것이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 때문에 슬프고 불안한 밤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살려고 미친 척 연기했던 다윗처럼 인간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빨리 그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깜깜한 동굴에 갇히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존재 앞에 엎드리게 된다. 그러나 그곳이 하나님을 유일한 나의 피난처로 노래할 수 있는 아둘람이 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며 철저히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당하는 광야가 된다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달라질까? ‘I’m nothing’처럼 여겨지던 그 아둘람의 시간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둘람의 시간은 분노의 칼을 가는 시간이 아니라 용서를 연습하는 시간이다. 혼자 갇혀 있는 시간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자와 공감을 연습하는 시간이다. 절망하고 한숨 쉬는 시간이 아니라 기도하며 여명의 비전을 꿈꾸는 시간이다. 한숨과 의심이 아니라 절대 믿음을 벼리는 시간이다. 그래서 아둘람의 시간은 나의 포지션과 상관 없이 진짜 리더가 되는 시간이다.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여겨지는 시간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인생에 절망스런 아둘람의 시간이 찾아올 때, 그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다윗처럼 노래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이렇게 선포하면서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새벽의 여명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그 분의 뜻대로 이 땅 위에 세워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