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6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서 강해 10 분노의 주권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삼상 25:21-22)
스페인의 작가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분노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Never do anything when you are in a temper, for you will do everything wrong.” “화 났을 때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하는 일마다 잘 못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안다.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행동하거나 말을 했을 때 우리는 일이 잘 못되거나 관계가 깨어지는 경우를 종종 경험했을 것이다. 우리 중에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없다. 분노를 자주 폭발 시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분노를 안으로 쌓아 놓아 별로 화를 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표현되지 않는 분노는 우울증이 된다. 그래서 우울증을 ‘응고된 분노’라고 한다. 그런데 분노를 함부로 쏟아 놓는 사람에게도 우울증이 찾아온다. 지나치게 화를 낸 것에 대한 후회 때문에, 또한 화를 내도 상황이 별로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우울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이 분노하는 사건이 나온다.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크게 화가 난 날이 아닐까 싶다. 오늘 그의 분노를 살펴보면서 우리 안에 있는 분노를 점검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삼상 25:1,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오늘의 본문 25장은 사무엘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었던 선지자 사무엘이 죽었다. 다윗도 라마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사울을 피해 바란 광야로 도망간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다윗은 왕이 되기는 커녕 도망자로 피해 다니고 있다. 사무엘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은 더욱 희미해지고, 그가 왕이 된다는 전망은 더욱 어두워졌을 것이다.
삼상 25:2,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여기서 한 부자가 나온다. 그의 이름보다도 그가 가진 재산이 먼저 소개된다. 양이 삼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 엄청난 부자다.이어서 그의 이름이 소개된다. 삼상 25: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나발(נבל)은 ‘바보’,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이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보요”라는 소개에서 우리는 그의 캐릭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바보’는 뭔가 모자란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사야서에서도 ‘나발’이 나온다. 사 32:6,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여기서 ‘어리석은 자’가 히브리어로 ‘나발(נבל)’이다. ‘어리석은 자’는 어떤 사람일까? 바로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지 않는 사람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공동체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에 관심이 없는 자를 성경은 어리석은 자, 나발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나발이 부자이고 갈렙 족속이라는 소개는 그가 유다 지파의 재력가임을 보여준다. 한편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으로 소개된다. 등장인물에 대한 이러한 소개를 통해 우리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할 수 있다.
삼상 25:4, “다윗이 나발이 자기 양 털을 깎는다 함을 광야에서 들은지라” 고대 이스라엘에서 양의 털을 깎는 것은 보통 5~6월 여름 전에 벌어지는 연례 행사였다. 삼천 마리 양의 털을 깎는 큰 행사가 나발의 소유지에서 벌어진다. 양 주인은 양털을 통해 큰 소득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양털 깎는 행사는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먹고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된다. 다윗은 이 때 자신의 부하 열 명을 나발에게 보내 떡과 고기를 달라고 정중히 요청한다. 그러나 나발은 다윗의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삼상 25:10-11,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나발은 마땅히 환대를 베풀어야 할 날에아무런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않고, 그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낸다. 이들에게 한 나발의 말은 고스란히 다윗에게 전달된다. 다윗이 이 말을 듣고 분노한다. 자신에게 창을 던진 사울 왕 앞에서도 분노하지 않았던 그였다. 쫓기던 아둘람굴 속에서도 자신의 원통함을 하나님께 토하며 평정심을 지켰던 그였다. 그러나 단 한번 자신을 모욕한 나발의 말에 다윗은 이성을 잃는다. 그는 복수의 칼을 빼어 든다. 그는 나발을 죽이기 위해 400명의 부하를 무장시켜며 이렇게 맹세한다. 삼상 25:22,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다윗은 사울 아래에서 그에게 주어진 커다란 십자가도 묵묵히 감당했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나발이 그에게 던진 작은 십자가를 감당하지 못하고 분노하는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이런 작은 십자가들을 통해 아직 다루어지지 않은 다윗의 자아의 모습들이 보이는 것이다.
다윗이 복수하러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아비가일은 급해진다. 그녀는 급히 떡 이백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를 준비한다. 그리고 양 다섯 마리를 잡아 음식을 준비한다. 그것들을 나귀에 싣고 다윗에게로 달려간다. 아비가일은 총명했다. 다윗을 만난 그녀는 다윗의 분노 상담가 역할을 한다. 먼저 그녀는 화로 가득한 다윗의 마음을 공감해준다. 삼상 25:25,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분노 유발자인 자기 남편을 먼저 깎아 내린다. 그녀는 나발이 불량하고 미련하기 때문에 다윗이 분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분노에서 벗어나는 첫번째 스텝은 나를 화나게 하는 그 사람이 정말 내가 화낼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평가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 때문에 화가 났지만 그 화가 나를 지배하고 이끌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어서 아비가일이 말한다. 삼상 25: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비가일의 말은 다윗의 시선을 다시 하나님께 돌리게 했다. 그동안 다윗은 자신의 원수에게 피 흘려 스스로 보복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잘 지켜왔다. 그것은 그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비가일은 29절에서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고 말한다. 아비가일은 원수 갚은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임을 다윗에게 상기시킨 것이다. 따라서 분노에서 벗어나는 두번째 스텝은 분노의 주권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분노하며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시 7:11-12,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분이시다. 악한 자를 향하여 칼을 가시는 분이다. 그의 활을 당기어 조준하고 계신 분이다. 악한 자에 대한 분노의 주권은 이처럼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악한 자에 대한 분노의 집행도 하나님께서 때가 되었을 때에 하시는 것이다.
아비가일은 또 말한다. 삼상 25:28,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한다. 다윗이 격노하게 된 이유는 나발의 어리석은 말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윗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았다. 그러나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 했던 사무엘이 죽었고, 그는 여전히 도망자의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정체성과 부르심이 흔들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이미 기름 부으신 자였고 장차 왕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사람이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일깨워주며, 다윗의 정체성과 부르심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든든한 집, 다윗 왕조를 세우실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도망다니며 고단한 싸움을 하고 있지만 당신은 결국 여호와를 위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당신의 삶 속에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은 잘 해왔습니다.” 이런 아비가일의 평가가 다윗의 마음을 새롭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분노에서 벗어나는 세번째 스텝은 나의 부르심과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누가 나를 화나게 해도 흔들리지 않고 나의 부르심과 사명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분노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힘들어서 지쳐갈 때 우리는 나의 부르심과 사명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필요 이상의 분노를 쏟지 않고 사명자로 일어서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비가일은 말한다. 삼상 25:30-31,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하니라” 다윗은 지금 분노로 인해 자신의 미래를 잊고 있었다. 만약 다윗이 나발 집안 사람들을 다 죽였다면 어떤 결과가 따랐을까? 나발은 유다 지파의 세력가였다. 후에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된다. 만약 다윗이 나발과 그 집안 남자들을 다 죽였다면 그는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되었더라도 그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스스로 입게 되었을 것이다. 아비가일은 지금 다윗이 분노를 느끼는 현재의 상황을 미래와 연결해서 판단하도록 도운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분노 유발자 때문에 분노라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다시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분노에서 벗어나는 네 번째 스텝은 현재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노의 감정과 그에 따른 행위가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며 말과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안에 분노가 가득할 때에 우리는 잠시 스스로 ‘타임 아웃’을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이 분노가 미칠 미래의 결과를 한번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결국 다윗은 그의 분노를 파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않게 된다. 아비가일은 잔치로 취한 나발을 깨우지 않고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그간에 벌어진 일을 보고한다. 나발은 그것을 듣고 낙담하여 몸이 돌같이 된다. 그리고 열 흘 뒤에 죽게 된다. 하나님이 나발을 치신 것이다.
우리는 평생 분노라는 감정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는 옳은데 다른 사람은 틀려서 또 화가 나게 될 것이다. 분노라는 감정은 나의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옳을지라도 나의 분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다루어져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한다. 엡 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우리는 분을 낼 수 있다. 그러나 분을 남발하면 그게 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분을 계속 품고 있다면 그것은 마귀가 개입할 틈을 주는 것이다. 만약 다윗이 분노의 주권자가 죄어 그 분노를 집행했다면 그는 마귀가 그의 사명을 방해할 기회를 주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이렇게 도전한다. 엡 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쉽게 분노하는 사회에 살면서 적용하기 힘든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분노하는 세상에 왕 같은 제사장이 되라고 부름 받았다. 쉽지 않겠지만 내가 분노할 수 있는 권리를 내려 놓고 친절과 긍휼과 용서를 심는 삶을 살기 바란다. 우리는 내 감정의 주권도 주님께 드려야 한다. 그래서 분노의 죄로 인해 방해 받지 않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오래된 분노의 문제를 처리해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일마다 잘될 것이다. 바라기는 분노의 주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길 원한다. 그리하여 다윗처럼 이 땅에서 우리를 왕으로 삼아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시려는 주님의 계획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