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3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서 강해 14 복(福)의 이동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삼하 6:14-15)
세계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대표로 하는 4차 산업혁명은 직업의 형태와 ‘부(富)’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지금은 인공지능과 지식 산업을 주도하는 일런 머스크나 주커버그가 부자가 되는 시대다. 우리는 이 세상의 ‘부(富)’가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그 부(富)를 나에게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급변하는 세상에서 앞으로 내가 뭘 해야 먹고 살지 고민하고 있다. 부의 이동에 주목하는 이 시대에 오늘 우리는 복(福)의 이동에 대해 생각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지난 주 우리는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고 나서 치른 전쟁에 대해 살펴보았다. 다윗은 400년 동안 정복하지 못했던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속을 정복하고 그곳을 수도로 삼는다. 그리고 다윗은 이스라엘을 괴롭혀온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나라의 기반을 든든히 다지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부족했다. 그것은 바로 약 70년 전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 때문이었다. 다윗이 언약궤를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 온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왕으로서 정치적, 종교적 기반을 확고히 다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루라도 빨리 언약궤를 옮겨 오길 원했다.
삼하 6:1-2,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다윗이 언약궤를 이동하는 장면이다.언약궤는 하나님이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시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언약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긴 후 기럇여아림에 방치되어 있었다. 사울은 40년이라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 언약궤를 가져올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윗은 왕이 되자 가장 먼저 언약궤를 가져오는데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그의 통치의 중심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
대상 13:1-3,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초원이 딸린 성읍에 사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을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다윗은 언약궤를 가져오는 프로젝트를 위해 지휘관들과 의논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 특히 각 성에 흩어져 살던 모든 제사장과 레위인을 불러 모으자고 제안한다. 백성들은 다윗의 제안을 좋게 여겼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 삼만 명이 기럇여아림에 모이게 된다.이처럼 다윗은 언약궤를 옮기는 일을 국가적인 행사로 진행한다.
다윗은 언약궤 이동을 위해 새수레도 준비했다. 드디어 언약궤가 이동하자 삼만 명의 사람들은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했다.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 소리도 울려퍼졌다. 그러나 축제는 잠시였다.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자 수레를 몰던 웃사가 흔들리던 언약궤를 잡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로 그가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축제는 끝나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삼하 6:9-10,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다윗은 두려운 나머지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두고 자신은 궁전으로 돌아온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다윗은 고민했을 것이다. 전쟁을 앞두고서 다윗은 항상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그리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다. 그러나 그는 언약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그는 그의 계획을 사람들과 의논했다. 그리고 그 계획을 모든 사람이 기뻐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고 국가적으로 추진했던 행사에서 다윗은 오히려 삼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체면을 구기게 된 것이다.
민수기서에는 이미 언약궤를 옮기는 방식에 대해 나와 있다.민 4:15,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이 말씀에 의하면 언약궤를 옮기는 것은 고핫자손이 맡은 일이었다. 그런데 언약궤는 직접 만져서는 안되고 고리에 막대를 넣어 어깨에 메고 그것을 옮겨야 했다. 다윗은 그 사실을 간과했다. 법궤를 옮기고자 했던 그의 열정이 지식보다 앞섰던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셨기에 그의 잘못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다. 다윗이 이 사건을 통해 깨달은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분명 축복의 통로지만 그것을 잘못 다룰 때 화가 임한다는 사실을 다윗은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한가지 소식이 날아왔다. 삼하 6:11-12,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다시 언약궤를 옮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역대상 말씀을 보면 다윗은 그가 이전에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음을 알게 된다. 대상 15:2, “다윗이 이르되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택하사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영원히 그를 섬기게 하셨음이라 하고” 다윗은 레위 사람만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윗은 또한 언약궤를 수레로 옮기려 했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알게 된다. 대상 15:13-15,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이번에 다윗은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일을 진행한다.
삼하 6:12-14,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갔을 때 소와 살진 송아지를 잡아 제사를 드린다. 인간적인 방법과 열정이 앞섰을 때 다윗은 실패했다. 그러나 이제 다윗은 그가 받고자 했던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돌린다. 그는 힘을 다해 춤을 추며 하나님을 경배한다. 오벧에돔의 집에 있었던 복은 이제 다윗성으로 이동하게 된다. 복의 이동은 새 수레를 준비했다고 오지 않았다. 인간적인 열정을 앞세웠다고 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을 향한 전심의 예배가 회복되었을 때 복의 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역대상을 보면 한가지 눈에 띄는 장면이 있다. 다윗이 언약궤를 옮길 때 노래하는 자들과 악기하는 자들을 세우는데 그 중에 오벧에돔이 있다는 것이다. 대상 15:21, “맛디디야와 엘리블레후와 믹네야와 오벧에돔과 여이엘과 아사시야는 수금을 타서 여덟째 음에 맞추어 인도하는 자요” 오벧에돔은 오늘 사무엘하 본문에서 가드사람으로 소개된다. 여기서 가드는 블레셋의 도시 가드가 아니다. 여호수아 21장에 보면 고핫 계통의 레위 사람들에게 할당된 땅 중에 가드 림몬이 나온다. 오벳에돔은 바로 가드 림몬 출신인 것이다. 그는 역대상 26장에서 고핫의 손자였던 고라의 후손으로 소개된다. 그는 수금을 잘 타던 자였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궤가 그의 집에 머물렀던 삼개월의 시간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는 언약궤 앞에서 수금을 타며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들을 보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신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삼하 6: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은 드디어 언약궤를 옮겨 그가 준비한 장막에 둔다. 이 장막이 바로 다윗의 장막이다. 다윗은 언약궤를 당시 기브온에 있던 모세의 성막 안에 두지 않았다. 대상 16:37-39, “다윗이 아삽과 그의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있게 하며 항상 그 궤 앞에서 섬기게 하되 날마다 그 일대로 하게 하였고 오벧에돔과 그의 형제 육십팔 명과 여두둔의 아들 오벧에돔과 호사를 문지기로 삼았고 제사장 사독과 그의 형제 제사장들에게 기브온 산당에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 모시게 하여” 당시 모세 때 만든 성막은 기브온에 있었다. 다윗은 제사장 사독과 그의 형제 제사장들을 거기에 배치해 제사를 담당하게 했다. 반면 다윗은 언약궤를 다윗의 장막 안에 두고 그곳에 아삽과 그의 형제들을 배치한다. 그리고 궤 앞에서 매일 교대로 섬기게 한다. 아삽이 누군가? 여러 시편을 기록했던 당시 찬양대장이었다. 역대상 23장, 25장에 보면 다윗은 레위인 중에서 4000명의 찬양팀을 조직한다. 그리고 찬송에 능숙한 자 288명을 세운다. 다윗은 그들을 다윗의 장막에서 찬양으로 섬기게 했던 것이다. 다윗은 그의 시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시 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하나님이 찬송 중에 거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다윗은 그의 장막에 찬양대를 두어 하나님의 임재를 구했던 것이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예배가 끊이지 않았던 다윗의 장막 안에 임재하셨던 것이다.
오벧에돔은 다윗의 장막이 세워진 후 그것을 지키는 문지기로도 일하게 된다. 시편 84편은 ‘고라 자손의 시’로 소개되어 있는데, 이 시는 고라 자손이자 문지기로 일했던 오벧오돔이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 시 84:1-2, 10-12,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단순히 오벧에돔의 집에 언약궤가 머물렀기에 복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주께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음을 알고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였기에 그가 복을 받은 것이었다. 오벧에돔이 가슴에 수금을 안고 찬송하며 주께 힘을 얻었기에 그와 그의 집에 복이 임했던 것이다. 예배는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존귀한 자인지 그것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예배는 그냥 지겨운 시간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머물며 그분의 임재를 구하는 시간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준비되는 것이다. 그럴 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로 그렇게 서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윗은 그런 믿음이 있었던 오벧에돔을 찬양대의 리더와 다윗의 장막 문지기로 임명한 것이다. 오벧에돔과 그의 집에 임했던 복은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옮겨지며 이제 다윗의 집과 온 이스라엘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다윗의 장막이 세워진 것이 기원 전 1000년 경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것은 기원전 960년이다.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기까지 다윗의 장막은 40년 동안 찬양과 예배가 끊이지 않는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 기간 동안 역사상 가장 강력한 나라로 세워진다. 그로부터 200년 후 이스라엘이 쇠락해가던 기원 전 760년경 아모스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암 9:11-12,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왜 하나님은 모세 때 지은 성막이나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아니라 다윗의 장막을 다시 일으키신다고 하셨을까? 신약시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을 이렇게 적용한다. 행 15:15-17,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야고보는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보고를 들으며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다윗의 장막에는 휘장도 없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허용되었던 제사도 없었다.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는 자에게 임하시는 주님의 임재와 축복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찾으며 그분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다윗의 장막은 하나님 한 분의 임재를 갈망했던 다윗의 모든 열정이 숨쉬던 곳이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장막을 회복하기 원하셨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다윗의 장막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시작된 교회의 예표였다. 교회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찾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만나주시는 곳이다. 사람들은 거기서 예배하며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인생의 목적을 회복한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인생을 하나님은 축복하실 수밖에 없다. 복의 이동은 그렇게 예배를 회복한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기도하는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예배하는 개인과 가정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따른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예배를 회복하는 여러분 되길 축원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의 이동을 주목하며 분주한 시대에 오직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며 그분이 주실 복의 이동에 주목하는 여러분의 인생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