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3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서 강해 17 하나님이 세우시는 인생
“또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니 그는 용맹스런 일을 행한 자라 일찍이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또 눈이 올 때에 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쳐죽였으며” (삼하 23:20)
사무엘서 강해가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이제 다음 주면 마지막이다. 오늘 사무엘서 23장에는 서른 여섯 명의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이 열거된다. 다윗이 왕이 되기까지는 충성된 용사들의 헌신이 있었다. 사무엘서의 결론 부분에서 이들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다윗 왕국이 다윗 개인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윗의 용사들이라 불리는 중간 리더들의 헌신과 충성 위에 세워졌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나라는 비록 유명하지는 않지만 충성되고 헌신된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이 땅 위에 세워져 가는 것이다. 여러분이 그 한 사람이길 축원한다. 세상은 여러분을 기억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기억하신다. 오늘은 그 서른 여섯 명 중에 브나야라는 사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세워 사용하셨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그는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로 소개된다. 역대상 27장 5절을 보면 그의 아버지 여호야다는 대제사장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요즘 말로 하면 PK(Pastor’s Kid)였다. 그의 아버지 여호야다의 이름은 ‘하나님이 아신다’란 뜻이다. 그의 이름 ‘브나야’는 ‘세우다라’는 뜻의 ‘바나’와 ‘야훼’를 뜻하는 ‘야’가 결합된 말이다. ‘하나님이 세우신다’라는 뜻이다. 이름에서부터 벌써 이 집안이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브나야는 ‘삽십인’으로 알려진 다윗의 최정예부대 사령관이었다. 그가 어떻게 해서 다윗의 용사가 되었을까? 삼하 23:13,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이 구절을 보면 브나야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그에게 합류한다. 사울이 다윗 때문에 놉 제사장 85명을 죽인 사건이 있었다. 아마 그 때문에 제사장 집안의 아들인 그도 사울을 피해 다윗에게 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몇가지 경력이 있다. 먼저 성경은 그가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다고 기록한다. 모압은 이스라엘의 적국이었다. 개역 개정 성경은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다고 했는데, 원문을 보면 ‘아리엘’ 둘을 죽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리엘은 ‘신의 사자’라는 뜻인데, 사자와 같이 영웅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모압의 영웅적인 장군 둘을 죽인 것이다. 그의 또 다른 경력은 눈이 올 때에 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쳐죽인 것이다. 우리가 야생에서 사자를 만나는 일은 안 좋은 일이다. 그런데 눈 오는 날 구덩이에서 사자를 만나는 것은 아주 안 좋은 일이다. 사자는 굶주렸을 것이고, 구덩이 안은 그 사자를 피해 도망 갈 데도 없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면 그런 상황을 피할 것이다. 그러나 브나야는 스스로 구덩이에 내려가 사자를 죽인다. 사자도 두려워하지 않는, 일반인과는 완전 다른 스피릿을 가진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의 또 다른 경력은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이다. 역대상 11장을 보면 그 거인의 키는 다섯 규빗이라고 소개된다. 2미터 25센티의 거인을 그는 막대기로 거인의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를 죽인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이력이었고, 다윗은 그를 그의 경호대장으로 채용한다.
다윗이 왜 많은 용사 중에 브나야를 경호대장으로 세웠을까? 다윗도 사자를 죽인 경험이 있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삼상 17:34-35,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또한다윗 역시 거인을 죽인 경험이 있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었다. 삼상 17: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다윗 역시 일반인과 다른 스피릿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역시 사자와 거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남자다운 사람이 갖는 용맹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많은 시간을 가지며,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나온 용맹이었다. 다윗은 브나야에게서 바로 이런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의 이력서에 ‘눈오는 날 구덩이에 내려가 사자를 죽임, 애굽의 거인을 막대기로 죽임’이라는 그의 이력을 본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브나야를 그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경호대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하나님은 보통 과거의 경험을 활용하여 미래의 기회를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신다. 하나님은 브나야를 모압의 영웅 앞에, 눈 오는 날 구덩이에 빠져 굶주린 사자 앞에, 애굽의 거인 앞에 세우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브나야의 인생을 위해 마련하신 무대였다. 브나야는 이 엄청난 도전 앞에 용감히 맞설 수도 있었고, 물러설 수도 있었다. 그런데 브나야는 자신이 맞이한 상황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알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 기회를 믿음으로 취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믿음은 어디서 나왔을까? 성경은 그것을 기록하고 있지 않기에 우리는 그의 상황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하나님은 아신다’라는 뜻의 ‘여호야다’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아신다는 믿음을 습관화 했을지 모른다. ‘나는 몰라도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은 나를 가장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나를 두신다’라고 그는 습관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믿음은 보통 자신의 능력보다 큰 상황속에서 발휘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브나야가 처한 가장 큰 위험은 그에게 가장 큰 기회가 되었다. 그가 믿음으로 그 위험을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 위험에서 승리했기에 그는 용사가 되었고, 다윗 왕국을 세우는 다윗의 사람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는 이처럼 위험을 수반할 때가 있다. 여러분의 한계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인도하실 수 있다. 여러분이 앞 길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는데, 인도하신 곳이 이스라엘이었다. 일하거나, 공부만 하기도 힘든데 전쟁까지 나서 미사일을 피해 다녀야 하는 나라에 온 것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환경에서 우리는 굶주린 사자와 나를 죽이려는 거인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위험은 환경이 아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위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우시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살 떨리는 무대를 마련해주실 때가 있다. 그것은 우리를 용사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사자를 피하느냐, 사자와 맞서느냐,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맞설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기회라는 믿음이 있으면 우린 맞설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브나야와 비교되는 인물로 요압이 있다. 그는 다윗 치하에서 국방장관이었다. 그런데 그는 충성보다는 야망이 앞서는 인물이었다. 사울이 죽고 사울의 국방장관이었던 아브넬이 다윗에게 항명했을 때, 요압은 그를 살해한다. 또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윗은 피난을 가면서도 젊은 압살롬만은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요압은 그 명령을 무시하고 압살롬을 죽인다. 이후 다윗은 압살롬을 섬겼던 아마사를 군대 장관으로 세웠는데, 요압은 그를 살해한다. 요압은 탁월한 용사였지만 정치적 야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았다. 다윗이 나이가 들고 병약해지자 다윗의 네째 아들 아도니야가 반역을 한다. 그 때 요압은 아도니야 편에 선다. 다윗은 지는 해였고, 아도니야는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아도니야가 반역을 모의하면서 브나야를 부르지 않은 것은 다윗 왕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브나야는 세상의 대세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종교인들이 좀 고집스러운 데가 있다. 그들은 세상이 변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 변화를 따라가지 않는다. 브나야는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자로 자라났을 것이다.
아도니야가 반란을 일으킨 상황에서 다윗은 급히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그리고 브나야를 부른다. 다윗은 그들에게 솔로몬을 노새에 태우고 기혼샘으로 가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선포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브나야가 이렇게 대답한다. 왕상 1:36-37, “아멘 내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오며 또 여호와께서 내 주 왕과 함께 계심 같이 솔로몬과 함께 계셔서 그의 왕위를 내 주 다윗 왕의 왕위보다 더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브나야의 첫 마디는 ‘아멘’이었다. 다윗 왕이 제사장과 선지자와 함께 기도하고 결정한 것을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내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이 그가 행동하는 기준이었던 것이다. 그는 또다시 위험 상황에서 그 위험을 감수한다. 쿠데타가 일어난 상황에서도 그는 끝까지 늙고 힘 없는 다윗의 명령에 충성한 것이다.
제사장 사독이 기혼샘에서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 백성들의 마음이 솔로몬에게 기울고 아도니야의 반란은 끝난다. 이후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솔로몬은 브나야를 보내 아도니야를 죽인다. 솔로몬은 또한 브나야를 보내 요압을 죽이고 그를 요압을 대신하여 군사령관으로 세운다. 브나야는 이스라엘 내에서 인간들의 야욕을 제거하고 이스라엘 왕국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뜻대로 세워지도록 쓰임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인생에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기회의 시간에 뒤로 물러가지 않는 것이다. 그 기회가 굶주린 사자일지라도, 그 기회가 자신을 죽이려는 거인일지라도, 그 앞에 자신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 있는 직장이, 학교가 위험이 가득한 곳일 수 있다. 거기에 여러분을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 난 상관이 있을 수 있다. 거기서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부딪힐 수 있다. 그러나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구해야 할 때다. 믿음의 사람은 사자를 피하는 자가 아니라 사자를 쫓는 자이다. 믿음의 사람은 거인을 보고 떠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 때문에 거인을 향해 분노하는 자이다. 그런 사람이 막대기로, 물맷돌 하나로 거인을 죽일 수 있는 것이다. 가장 큰 위험은 가장 큰 기회의 시간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기회의 시간에 물러서지 않는 여러분이 되길 축원한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인생의 또 다른 특징은 세상의 대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과 야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충성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정한 질서를 깨뜨리는 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힘을 규합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럴 때 끝까지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에 충성하는 여러분 되길 축원한다.
삼하 23:39, “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성경은 다윗의 용사들이 서른 일곱명이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실제로 이름이 나와 있는 건 서른 여섯 명 뿐이다. 요압이 빠진 것이다.요압은 여부스를 칠 때 가장 먼저 올라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군대장관이 된 사람이다. 그 후 그는 다윗 왕국의 여러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이름이 빠져 있다는 것이 놀랍다. 끝까지 충성하지 못하면 이렇게 성경의 역사 속에서 지워지는 것이다.
세상은 영웅을 기억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게 사명의 길을 가는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는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또한 야망을 품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서 충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세워진다. 바라기는 하나님이 세우신 기회의 시간에 충성함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쓰임 받고 기억되는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