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0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삼하 24:25)
요즘 ‘육각형 인간’이란 말이 유행이다. 외모, 성격, 학력, 자산, 직업, 집안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을 의미한다. 요즘 청년들이 되고 싶어하는 인간형이다. 프랑스 철학자 라크 자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나의 욕망인 듯 착각하며 살아간다. 이런 면에서 육각형 인간은 내가 바라는 이상형이라기보다는 지금 우리 사회가 욕망하는 이상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육각형 인간 사회에서 사람들은 무엇이든 수치로 평가하며 서열화하려 한다. 내가 받는 연봉이 상위 몇 퍼센트인지 확인하려 한다. 데이팅 앱에서는 학력, 소득, 직업에 따라 프로필에 인증 배지를 달아 주거나 외모를 점수화 한다. 육각형에 얼마나 가까운지 그 가치를 숫자로 계량화하고 그것을 비교해 서열을 매기는 것이다. 손흥민의 현재 FIFA 24 수치를 보면 스피드가 87, 슈팅이 88, 패싱 능력 80, 드리볼 84, 수비 42, 피지컬 70이다. 공격수라 상대적으로 수비 능력 수치가 낮아서 육각형의 모양에서 조금 일그러져 있다. 육각형 인간형에 따라 여러분의 외모, 성격, 학력, 자산, 직업, 집안 수치를 그려보면 아마 대부분 상당히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일그러진 만큼 여러분은 완벽한 인간형의 기준에서 일그러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매 순간 타인과 비교당하며 순위가 매겨지고 좌절하는 시대가 되었다. 핸드폰만 열면 유명 연예인, 재벌 2,3세의 일상까지 공유되기 때문에 이제는 그저 주변 친구들과 비교되는 정도가 아니라 육각형 인간들과 비교당하는 것이다. 젊은 청년들이 더더욱 살기 어려워진 세상이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인구조사를 한다. 자신의 군사력을 수치화하려 했던 것이다. 다윗은 무엇을 욕망했던 것일까? 오늘 함께 살펴보며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자 한다.
삼하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진노하신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그 이유가 무엇인지 나와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사회 전반의 분위기에 대해서 화가 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대표격인 왕을 격동시켜 그들의 죄를 드러내기 원하셨다. 다윗이 격동되어 한 행동은 인구 조사를 명령한 것이었다. 역대상 기록은 사탄이 다윗을 격동한 것으로 나온다. 대상 21: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사탄은 다윗 안에 있는 욕망을 충동했다. 그 욕망이 무엇이었을까? 다윗이 요압에게 인구 조사를 명령했을 때 요압은 이렇게 반응했다. 삼하 24:3, “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요압은 하나님께서 왕의 백성을 백배나 더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인데 왜 그 숫자를 파악하려 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왕이 재촉하자 요압은 사령관들과 함께 9개월 20일동안 인구조사를 실시한다. 요압이 보고한 인원은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 십만 명이고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다. 결국 다윗이 알고 싶었던 것은 수치화된 군사력이었고, 이것은 그가 힘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소년이었을 때 했던 고백이 오버랩 된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그는 수를 계산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힘을 추구하는 자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칼을 빼는 용사 130만 명을 찾아 계수했다는 것은 엄청난 타락이다. 여기서 ‘담대한 자’는 히브리어로 ‘이쉬 하일(איש חיל)’이다. ‘힘의 사람’이란 뜻이다. 이스라엘은 칼을 빼든 힘센 남자들의 나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쉬 하일’이 다윗 당시 사람들이 되고 싶었던 육각형 인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군인들의 나라가 되라고 이스라엘을 세우신 게 아니었다. 하나님은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의 민족적 사명에 대해 말씀하셨다. 출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길 원하셨다. 이방 민족들처럼 칼의 승리를 믿고 살아가는 자가 되라고 그들을 부르신 게 아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밀히 말해서 다윗 왕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이며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계약 당사자들이었다. 돈이 내 수중에 들어 오면 우리는 돈을 센다. 사람의 수를 세었다는 것은 그것이 내 소유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인간 왕의 통치권 아래 수동적으로 지배 당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따라서 군사력을 파악하기 위해 했던 다윗의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킨 것이다.
다행히도 다윗은 자신의 행동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빨리 자각했다. 삼하 24:10,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다윗도 사람이다. 그도 실수할 수 있다. 그래도 그의 강점은 그가 잘못했을 때 빨리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돌이키길 원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다윗에게 선지자 갓을 보내 세 가지 선택권을 주신다. 삼하 24:13,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아뢰어 이르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 하는지라” 다윗은 전염병을 택했고, 이로 인해 삼일 동안 칠만 명이 죽게 된다. 인구조사를 통해 드러난 것은 단순히 다윗의 죄가 아니라 백성들 안에 있는 죄였기에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선지자 갓은 다윗에게 이 재앙을 끝내기 위해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고 지시한다. 이에 다윗은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구입한다. 그냥 준다는 것을 은 오십 세겔 지불하고 구입한 것이다. 삼하 24: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전쟁 영웅이었던 다윗은 이처럼 사무엘서 마지막 장에 와서 백성들의 죄를 중보하는 제사장적인 인물이 된다.
인구조사 사건이 있었던 사무엘서 마지막 장의 메세지는 분명하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지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윗이 구입한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후에 성전이 세워지는 장소가 된다. 대하 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서는 수많은 동물의 피가 백성들의 죄 용서를 위한 대가로 흘려졌다. 그리고 천 년 후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온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대가로 예수님의 희생의 피가 흘려져야 했던 것이다. 죄인인 우리가 용서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은 결국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였던 것이다. 다윗이 드렸던 번제와 화목제는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온 인류를 위해 드릴 속제와 화목제를 미리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다윗이 사탄의 충동을 받아 인구조사를 하는 일을 허용하셨던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롬 3:23-26,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용서는 값을 지불해야 받을 수 있다. 성경은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고 말한다. 죄인인 우리가 죽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지불하고 받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값을 지불하지 않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 산다면 그것은 재앙을 자초하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찾아온 성공과 번영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회가 아니라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이러한 명예욕과 과시욕은 성공과 번영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다. 결국 자신들이 가진 힘을 수치화하려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 없이 살겠다는 삶의 태도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늘날 육각형 인간이 각광받는 이 사회가 위험하다고 본다. 세상에서는 힘이 있는 자가 강해 보인다. 따라서 너도나도 이 힘을 극대화하려고 분주하다. 그러나 사실 힘이 있는 자가 강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허물이 없는 자가 강한 것이다. 하나님과 아무 허물이 없이 관계가 회복된 사람은 이런 시편을 노래할 수 있다. 시편 46:1-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여러분은 하나님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사람은 코로나 전염병이 문제되지 않는다. 전쟁이 문제 되지 않는다. 천지가 흔들려도 요동치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삶의 문제가 생기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라는 싸인이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우리는 그 어긋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군사강국, 이쉬 하일, 육각형 사람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선 자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드려야 할 번제와 화목제는 무엇인가?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축원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잘못된 동기와 행동이 있는지 살펴보고 반드시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확한 목표를 향해 가는 게 중요하다. 다림줄을 내렸을 때 어긋나 있다면 집은 허물어지고 만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은 죄고, 죄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육각형 인간을 동경하는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힘쓰는 사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세상을 동경하는 욕망의 방향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갈망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