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4년 4월 20일) 설교 이익환 목사
여호수아서 강해 10 우편의 아들
“베냐민 자손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제비 뽑은 땅의 경계는 유다 자손과 요셉 자손의 중간이라” (수 18:11)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내려 가다보면 늑대가 새겨진 게시판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베냐민 지파의 땅을 표시하는 싸인이다. 야곱은 베냐민을 이렇게 축복했다. 창 49:27,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이 표현 때문에 늑대는 베냐민 지파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은 베냐민 지파가 땅을 분배 받는 장면이 나온다. 야곱의 예언적 축복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야곱의 막내 아들 베냐민이 태어난 날 그의 엄마 라헬은 출산의 고통 가운데 죽어갔다. 라헬은 죽기 전 그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지었다. ‘베노니’는 ‘내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엄마의 얼굴도 못 보고 태어난 아들의 슬픔은 얼마나 컸을까? 그는 어쩌면 엄마가 나 때문에 죽었다는 자책감과 함께 평생을 살았을 지 모른다. 아내의 슬픈 마음은 이해되지만 이제 막 태어난 아들을 ‘슬픔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야곱은 그의 이름을 ‘베냐민’으로 바꾼다. ‘베냐민(בנימין)’은 아들을 뜻하는 ‘벤(בן)’과 오른쪽을 뜻하는 ‘야민((ימין)’이 결합된 말이다. 그래서 베냐민은 ‘우편의 아들,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오른손은 ‘힘, 보호’를 상징하는 것이다. 아버지 야곱은 늘 그의 오른손으로 아들 베냐민의 왼손을 잡고 다니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베냐민의 왼손은 아버지의 사랑과 권위를 붙잡는 통로였다. 그래서 ‘야민’은 ‘오른손 편’이란 뜻이 있지만 ‘왼손잡이’란 뜻도 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벤야민은 태어나면서부터 생존에 대한 불안을 겪어야 했다. 그가 태어난 순간 엄마가 죽었다. 그리고 하나 밖에 없었던 친형, 요셉이 다른 형들에 의해 사라졌다. 그래서 그에겐 생존엔 대한 절박함이 있었다. 그는 형들 사이에서 늘 존재의 불안이 있었을 것이다. 늑대가 사나운 것은 생존에 대한 불안(anxiety)이 있기 때문이다. 벤자민은 이 늑대처럼 스스로 먹이를 포획하며 생존하는 호전적인 사람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이러한 불안 속에서 그가 붙잡았던 아버지의 오른손은 얼마나 든든했을까? 유다는 ‘아버지 야곱의 생명과 벤야민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다고 표현했었다. 베냐민은 그의 왼손을 통해 끊을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붙잡았다. 그것은 아버지의 권위를 붙잡는 것이었다. 그래서 베냐민은 자신의 힘을 상징하는 오른손보다도 왼손으로 아버지의 사랑과 권능을 붙잡고 살았던 왼손잡이가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그래서 일까? 성경에는 701명의 왼손잡이가 나오는데, 모두 베냐민 지파다. 먼저 사사 에훗이다. 삿 3: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여기서 왼손잡이는 히브리어로 ‘이쉬 잇테르 야드 예미노 (איש אטר יד ימינו)’다. 여기서 잇테르는 ‘닫아버리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말의 문자대로의 뜻은 ‘오른손의 능력이 닫힌 사람’이다. 이것이 왼손잡이의 정의다. 그렇다고 오른손이 불구라고 해석하면 곤란하다. 우리는 다른 구절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삿 20:16, “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더라” 칠백 명이 다 왼손잡이(איש בחור אטר יד ימינו) 였는데, 이들은 ‘이쉬 바훌(איש בחור),’ 즉 뽑힌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었다. 즉 정예병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오른손도 쓰지만 전투력 향상을 위해 오른손 사용을 제한하고 왼손의 기능을 향상시킨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베냐민 지파는 다른 지파들보다 더 나은 전투력을 갖기 위해 오른손 사용을 제한했던 정예병을 양성했다. 오른손을 닫아야 왼손을 사용할 수 있다. 조금 확대해석이긴 하지만 베냐민 지파에게 왼손은 오른손의 자기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붙잡는 걸 의미한다.
수 18:11, “베냐민 자손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제비 뽑은 땅의 경계는 유다 자손과 요셉 자손의 중간이라” 땅 분배를 통해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사이에 위치하게 된다. 두 힘이 충돌하는 그 사이에서 베냐민은 생존을 해야 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는 사나운 이리가 되어야 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에게서 나온 것도 특이하다. 그만큼 사울은 전투에 능했던 인물이다. 사울은 집권 초기에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전쟁에서 승리를 경험한다. 그러나 사울은 점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오른손의 능력을 의지한다. 이스라엘의 왕이 오른손의 능력만 의지한다는 것은 타락을 의미한다. 나의 힘, 나의 지혜를 제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화 내는 것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오른손을 휘두르는 것이다. 오른손의 사용을 제한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의 손을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이번 주에도 베냐민 지파의 땅 중 한 곳을 방문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전에 성전이 있었던 성전산에 올랐다. 성전이 베냐민 지파 땅에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이틀 전 미사일이 지나가던 이곳은 아랍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놀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 한 쪽 구석에서는 성전이 있던 곳을 바라보며 조용히 속으로 기도하고 있는 정통 유대인들을 볼 수 있었다. 마음 놓고 기도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이 안스러웠다. 지금은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자유롭게 기도할 수 없지만 과거 이 성전은 늘 갈 수 있는 곳으로 베냐민 지파에게 허락되었던 것이다.신 33:12,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 예루살렘 성전이 베냐민 지파 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이 지파에게 너무도 큰 축복이었다.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의 상징이 베냐민 지파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모세는 베냐민 지파가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 지파가 여호와 곁에 안전히 살 것이라고 축복했다. 이 모세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베냐민은 육신의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막내였다. 그리고 이 지파는 성전 가까이에서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가까이 경험하게 된 지파가 되었다. 아버지와의 친밀한 사랑 때문에 그들은 깊은 보호 가운데 격동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하늘의 평안을 누리게 된 것이다. 시편 중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가 있다. 시 125:1-2,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성전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성전에 자주 오르면서 이 노래를 가장 많이 불렀을 것이다. 지난 주 이란에서 미사일을 쏘았고, 어제 새벽에는 이스라엘에서도 대응 포격을 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존재의 위협이 있는 시대 한 복판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른손을 붙잡고 그분의 보호와 사랑을 입은 자는 존재의 불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지금의 이란은 과거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 때 유대 민족은 하만 때문에 멸절 당할 존재 위기에 처하게 되었었다. 그 때 활약 했던 사람이 모르드개와 에스더였는데, 이들이 베냐민 지파였다. 에스더는 왕후라는 오른손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 금식하며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왕 앞에 나아갔다. 오른손의 능력을 제한하며 하나님의 권능과 보호의 오른손을 붙잡은 것이다. 그 결과 운명이 역전되었다. 역사는 이처럼 하나님 우편의 사람들을 통해 전개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교회를 박해했던 사나운 이리였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오른손의 능력을 얼마든지 자랑하며 발휘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빌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는 오른손 사용을 스스로 닫았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힘썼다. 그는 메시아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굶주린 늑대처럼 예수를 위하여 온 로마제국을 다녔다. 이 베냐민 지파의 아들, 바울을 통해 오늘날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그것을 바라보시던 하늘 아버지의 기쁨을 우리는 안다. 막 1: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 아버지의 사랑의 노래를 들었기에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를 위해 생명을 드리는 순종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힘을 제한하며 십자가에서 순종한 예수님을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셨다.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 ‘우편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도 ‘우편의 아들’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이렇게 책망하셨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사울왕처럼 언제부터인지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오른손 잡이로 살아갔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교회에 사랑과 열심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면서 이렇게 약속하셨다.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우편의 아들’이 되라고 촉구하신 것이다.
‘우편의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 거하는 자를 의미한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이리처럼 용감하게 적과 싸우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용사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열정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다. 요 17: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란 의심이 있었을 때 나에게 다가온 말씀이었다. 하나님은 존재가 사랑이기시에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이 하늘 아버지의 어깨 사이에 거할 때 우리 역시 베냐민 지파처럼 존재의 운명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건설하기 위해 일어서는 전사들이 되는 것이다. 끝으로 유다서 말씀이 우리의 기도가 되길 원한다.유 1:24-25,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늘 아버지의 보호와 사랑 때문에 거침 없는 자로 살아가길 바란다.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을 붙잡고 우편의 아들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