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4년 5월 11일 설교 이익환 목사
여호수아서 강해 13 우상의 배신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수 24:14)
지부작족 (知斧斫足).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사자성어다. 평소에 알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쓰는 표현이다.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배신했다면 그것만큼 큰 상처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선택하는 것은 선택하는 대상에 우리의 믿음을 주는 것이다. 다신관이 지배적이었던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다른 이방신들을 선택하며 그 신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이방신들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의 선택을 촉구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수 24: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고 있다. 왜 세겜에 모았을까?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한 곳이었다. 세겜은 야곱이 이방의 신상들을 묻어버리며 우상과의 결별의식이 있었던 곳이다. 또한 세겜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 충성을 다짐한 맹세의 장소였다. 이곳에서 여호수아는 그가 죽기 전 온 백성들을 소집하여 언약을 갱신하기 원했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회고한다.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시작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통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 역사를 근거로 이제 하나님 한 분에 대한 충성을 요구한다.
수 24: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강 저쪽은 유프라데스 강 건너 편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다. 그 중 우르는 종교적인 도시로 중요한 신당들이 있었다. 애굽 역시 신들로 가득한 나라였다. 고대 근동의 사람들은 이처럼 신들의 세상에 살았다. 그들은 땅과 하늘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후 세계에도 각각의 영역을 다스리는 신들이 있다고 믿었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이러한 신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그들의 생사화복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우르에서 건너온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 그리고 400년간 신들의 나라, 애굽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는 ‘여호와만 섬기라”고 요구한다.
다른 신을 섬기면 왜 안되는 것일까? 그는 왜 하나님만 섬기라고 요구하고 있는 걸까? 이스라엘에서 태어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배타성에 불편함을 가질 것이다.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스라엘 사람도 아닌 내가 믿어야 하나? 십계명의 제 1, 제 2 계명은 하나님의 배타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제 1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이다. 여기서 ‘네게 두지 말라’는 ‘너를 위하여 두지 말라’는 뜻이다. 이 말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필요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신들을 가까이 한다는 것이다. 제 2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다른 신들을 가까이 하기 위해 그 매개체가 되는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새긴 우상을 만드는 것은 자신의 필요를 다른 신이 채워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우상을 만드는 것은 결국 자기 필요와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다른 신을 금지하는 것은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이 아니라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다른 신을 믿고, 우상을 만드는 것에 대해 배타적인 분이시다. 자기 필요와 이기적 욕망의 노예가 되면 그 사회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사라지게 된다. 당시 고대 근동의 신들은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는 신들이었다. 이 신들은 철저히 가진 자들의 편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끊임없이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에 끌어들이려 했던 세력은 왕과 권력자들이었다. 그 신들은 권력자들의 욕망을 지지해주는 존재였다. 반면 하나님은 권력가들 입장에선 불편한 신이었다. 자신들이 부리는 종들도 샤밧 때는 일을 해선 안되었다. 또한 희년이 되면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주고 노예들을 풀어주어야 했다. 또한 그들이 가진 재정을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데 사용해야 했다. 하나님은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최대치로 추구하는데 불편을 주는 신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섬기길 원했다. 하나님을 자신들에게 유익을 주는 존재로 섬기며, 단지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어 주는 여러 신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태도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이에 여호수아가 다음과 같이 도전한다.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신들의 나라에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도 이방 신들을 섬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에 여호수아는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도전한다. 우상이냐 하나님이냐, 하나만 선택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간지대는 없다. 왜냐하면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상의 실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선언한다. 그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전생애를 통해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호수아의 단호한 선언에 백성들도 응답한다.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들의 응답에 박수라도 쳐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한다. 수 24:19,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을 내어놓는다. 이것은 모세의 전망이기도 했다. 신 31:20,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여호수아와 모세의 전망은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했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작정했다 해도 하나님을 끝까지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보여준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려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에 대해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한다. 질투는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일어나는 감정이다. 자신의 아내가 남편 아닌 다른 남자에게 지나친 친밀감을 보인다면 질투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랑의 반응이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분으로 표현한 이유는 그가 자기 백성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랑하시는지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또한 자기 백성이 하나님만 섬기지 않을 때 그 우상으로 인해 야기되는 불행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우상 숭배가 왜 위험할까? 그것은 우상이 그것을 섬기는 자를 배신하기 때문이다. 시 106:36-38, “그들의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들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그들이 그들의 자녀를 악귀들에게 희생제물로 바쳤도다 무죄한 피 곧 그들의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로 더러워졌도다” 시편 기자는 우상이 올무라고 말한다. 짐승을 잡기 위해 만든 덫, 함정이라는 것이다. 짐승은 그 올가미 안에 있는 음식을 먹으려고 입을 연다 그러나 그 순간 올가미가 그 짐승을 낚아 채는 것이다. 우상이 그런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다른 신을 섬기려다가 자신의 자녀까지 희생제물로 바치게 되는 것이다. 자녀 뿐만이 아니라 우상에게 절하는 순간, 자신의 인생은 우상에게 담보로 잡히게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근본적인 죄악이 우상숭배였음을 이렇게 고발한다. 렘 2:11, 13,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그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면 번영의 복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터진 웅덩이에 물을 붓는 행위였고,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였다. 이처럼 우상은 그것을 섬기는 자를 배신한다. 그리고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을 패망으로 이끈다.
오늘날 우리는 바알과 아세라를 풍요의 신으로 섬기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은 물질만능주의로 환생한 바알 종교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 돈과 명예, 권력과 쾌락을 약속하는 이 시대의 우상들 앞에 우리는 지금 서 있는 것이다. 이 현대의 우상들은 지역의 한계가 없다. 인터넷과 매체를 통해 얼마든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팀 켈러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든 우상이 될 수 있으며 이미 우상이 되어 왔다…. 삶의 무엇이든 우상 노릇을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대용품, 즉 “가짜 신“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우상을 나쁜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자체가 나쁜 경우는 거의 없다. 더 좋은 것일수록 그것이 우리의 가장 깊은 욕구와 희망을 채우리라는 기대도 커진다. 무엇이든 가짜 신이 될 수 있으며, 특히 삶의 가장 좋은 것일수록 더 그렇다.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돈이 나쁜가? 그렇지 않다. 명예와 권력이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다.성공과 성(sex)이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다.그러나 그것이 생수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추구하는 것이 될 때 그것은 우상이며, 그것은 터진 웅덩이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삶에 ‘이것만 있으면 내 삶이 달라질거야,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될거야’라고 속삭이는 것이 있는가? 그것이 나란 사람의 정체성에 하나님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인 것이다. 그래서 나의 재산, 내가 하고 있는 공부, 나의 사역도 우상이 될 수 있다. 나의 존재를 온전히 채워줄 것만 같은 이러한 우상들을 하나님과 상관 없이 섬기고 있다면 그것은 언젠가 우리의 믿음을 배신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의 마지막 연설에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온전함은 히브리어로 ‘타밈(תמים)’이다. 타밈은 다른 것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마음이다. 진실함은 히브리어로 ‘에메트(אמת)’이다. 에메트는 ‘견고함, 확실함’이란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다른 것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마음과 시대의 우상이 주는 유혹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마음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다. 섬긴다는 건 히브리어로 ‘아바드(עבד)’다. 종이란 말 ‘에베드(עבד)’가 여기서 나왔다.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우리는 우상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직장의 노예, 학업의 노예, 성공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기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다. 내가 지금 우상의 배신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이 만든 신과 인간을 만든 신 중 우리는 누구를 섬겨야 할까? 인간의 행복은 우상에게서 오지 않는다. 인간의 행복은 창조주의 목적과 일치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존재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할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그만큼 우상은 내 삶에 침투해 온다. 우상이 내 삶에 들어오면 하나님이 주신 건강한 욕구들은 탐욕으로 변질된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킨다. 질투의 결과는 곧 심판이다. 심판은 우리를 우상에서 돌이키기 위한 아픈 채찍이다. 우상은 내 삶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것이 우상의 배신이다. 하나님께서 당신 한 분을 섬기라고 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배타적이고 편협한 분이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 한 분만 섬기지 않는 사람은 자기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따라 반드시 시대의 우상을 섬길 수 밖에 없음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화려한 우상 앞에 머뭇거리지 말고 하나님 한 분을 섬기는 여러분의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