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강해 1 다른 세대를 위한 예언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4년 5월 18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사기 강해 1 다른 세대를 위한 예언

세대의 사람도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 2:10)

유튜브나 네플릭스 같이 인터넷을 통해 미디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OTT 플랫폼이 대세다. 이러한 디지털 환경 변화의 영향이 교회에도 밀려오고 있다. 이에 한국교회 올해 트렌드 중의 하나는 ‘OTT 크리스천’의 등장이다. OTT 크리스천은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크리스천을 말한다. 성경공부와 기도, 공동체 활동 등 신앙생활의 전반을 온라인 환경에서 실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지난 3년여 간의 코로나 기간 동안 교회 활동이 제한된 성도들은 그들의 영적 갈증을 OTT 플랫폼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이들은 온라인 기도회에 참여하여 뜨겁게 기도하고 그런 기도회를 주도하는 단체에 헌금과 후원금을 아낌없이 냈다. 구독자가 10만, 20만 늘어나면서 기독교 OTT 스타들이 등장했다. 그런데 최근 그 슈퍼 스타 중 한 명의 불륜과 헌금 유용 혐의가 드러나게 되었다. 나라와 민족 통일, 이스라엘 선교를 위해 뜨겁게 기도하던 모임이었는데, 이 단체와 지도자에게 소망을 두고 헌금하며 참여했던 후원자들의 상실감이 무척 컸을 것이다. OTT 미디어 환경이 우려되는 것은 이곳이 극단적 종말론과 잘못된 성령 운동의 온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알고리즘을 통해 미디어 컨텐츠에 노출되면서 사람들의 확증 편향은 강화되고, 그리하여 더더욱 좌파와 우파가 나뉘는 분열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사사시대처럼 우리는 지금 가치 판단이 혼돈스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오늘부터 사사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사시대의 혼돈의 역사를 통해 지금의 우리 시대를 돌아보고 미래를 예견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성경학자에 의하면 사사기는 역사서에 해당된다. 사사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에 의하면 사사기는 예언서에 속한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타나크(תַּנַ”ךְ)라고 한다. 이것은 토라(תּוֹרָה)와 네비임(נְבִיאִים), 케투빔(כְּתוּבִים)의 앞글자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네비임은 예언자들이란 뜻이고,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 모두 예언서에 속한다. 우리는 흔히 역사서는 과거에 대한 기록이고, 예언서는 미래에 대한 기록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역사가 과거에 일어난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여준다는 믿음이 있다. 예언자들의 사명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주신 계명을 기준으로 지금 현실이 어떠한지 직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사사기를 통해 우리의 지금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미래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언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현실을 고발하기 위함이 아니다. 현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돌이키기 위함이다. 따라서 사사기를 예언자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좋을 듯 하다.

2: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하나님이 보낸 메신저가 등장하는데 그가 길갈에서부터 올라 온다. 왜 길갈일까? 길갈이 어떤 곳인가? 길갈은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행한 곳이었다. 400년 애굽의 노예 생활을 마치고, 또한 40년 혹독한 광야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행한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두고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한다는 것은 도박과도 같은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희망을 하나님께 두었다. 그들이 할례를 행하고 누워서 바라본 가나안 땅의 하늘은 이제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다는 안도감과 장차 이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기대감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있는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셨다. 할례를 행하고 이어 맞이한 유월절은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이처럼 길갈은 가나안 세대들에겐 하나님과의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은 길갈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곳, 그래서 하나님 한 분 때문에 아낌없이 헌신했던 처음 사랑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그 길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말했다. 2:1-2,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않을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미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을 헐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가나안 땅에 살면서 타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들을 섬기며 불륜을 저질렀다. 그 사실을 모르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알고 계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2:3,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주민들을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었다.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 행해야 할 그들의 임무를 포기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 노역을 시키며 그들을 통해 농경문화를 배웠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기 시작했다. 풍요와 성공을 약속하는 그 땅의 신들과 결탁하며 하나님과의 사랑을 버린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제서야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첫사랑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를 자각하게 되었다. 2:4-5,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그들은 울었다. 보김(בכים)은 ‘우는 자들’이란 뜻이다. ‘울다’라는 뜻의 동사 ‘바카(בכה)’에서 온 말이다. 자신들의 죄악이 드러나고 현실을 직시하게 될 때 흐르는 눈물이 있다. 이 눈물은 다시 삶을 돌이킬 수 있는 회개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후의 기록을 보면 이들의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6-7,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자들이 사는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여호수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에는 하나님을 섬겼다. 그러나 이 이후에는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사기의 패턴을 반복한다. 그 결과는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세대의 등장이다. 2:10, “ 세대의 사람도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한 세대가 가면 다음 세대가 온다. 다음 세대는 이전 세대가 희생과 헌신을 감수하고 키운 세대이다. 이전 세대는 자신들이 완수하지 못한 일들을 다음 세대가 동일한 희망을 품고 완성해 주길 바란다. 여호수아 당대의 세대들은 다음 세대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어 열방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하길 원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고 난 뒤 ‘다음 세대’가 아니라 ‘다른 세대’가 출현했다. 다른 세대는 히브리어로 ‘도르 아헬(דור אחר)’이다. 이전 세대와는 질적으로 아주 다른 세대가 출현한 것이다. 그들의 특징을 보자. 2: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다. 그들의 신앙이 달라진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바알을 섬기는 바알의 백성이 된 것이다. 이들은 더이상 이스라엘의 ‘다음 세대’가 될 수 없었다. 그저 다른 신을 섬기고, 다른 희망을 품으며, 이전 세대와 다른 길을 걷는 ‘다른 세대’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슬프셨을까? 광야에서도 독수리가 새끼를 엎어 날게 하는 것처럼 그들을 자기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며 인도하셨는데, 날 수 있게 되니까, 먹어서 배가 부르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버린 것이다.

그러면 여호수아 이후 세대가 ‘다른 세대’로 전락한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먼저는 이전 세대가 타협했기 때문이다. 사사기서 1장을 보면 이미 동쪽에 정착한 지파를 제외하고, 나머지 아홉 지파들 모두 예외 없이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들은 여러 이유를 말했다. ‘그들은 철병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너무도 강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과 죄악으로 관영했던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심판 전쟁을 수행함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회복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적당한 지점에서 타협했다. 가나안 족속들을 다 쫓아내지 않고 노역을 시키며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보다는 실제적인 유익을 추구했다.

두번째, 그들이 ‘다른 세대’로 전락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을 버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 모세를 통해 이렇게 강조하셨다. 6:12-14,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너희는 다른 신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신을 따라가면서 하나님을 잊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세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번째, 그들이 ‘다른 세대’로 전락한 이유는 그들이 물질적이고 쾌락적인 가나안 문화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2:13, “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하나님을 따르자니 지켜야할 계명이 너무 많았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선 나의 욕망을 억제해야 할 순간들이 많았다. 그런데 가나안 신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은밀한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그 신들을 기쁘게 하는 예배 행위였다. 우상은 인간의 욕망을 두둔하고, 그 욕망을 이루어 주는 자로 자처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 신전에서 춤추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갔고, 그리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능력을 상실한 ‘다른 세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기독교는 한 때 세상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근세 이후 기독교는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과학의 발달 덕분에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상실하게 되었다. 현대 의학은 죽을 인간도 살려내며 더이상 신의 은총으로만 가능했던 기적을 바라보지 않게 했다. 기술의 발전은 이 세대에 테크노피아의 환상을 심어주며, 성경이 말하는 천국은 오히려 고리타분한 곳으로 여겨지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지금이 ‘탈기독교 시대’라고 말한다. 삶에 대한 성경의 가치와 기준들이 세상의 주류에서 밀려난 시대를 우린 살아가고 있다. 교회가 세상의 주변으로 밀려나고 오히려 교회 안으로 세상의 가치가 들어오면서 교회는 세속화되고 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의 삶과 세상에서의 삶을 달리 해야만 하는 분열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 결과 교회와 성도는 세상에서 아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너무도 미미한 존재들이 되었다. 다음 세대는 이전 세대의 소망을 이어받지 못하고 얼마든지 ‘다른 세대’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 사람은 유행에 민감한 존재다. 늘 대세를 따라가길 원한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욕망하고 있는 타인의 욕망들을 욕망하며, 그 욕망들을 따라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숭배하는 우상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섬기며, 그 우상들에게 절할 수 있다. 길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김에서 통곡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가나안의 대세 문화에 휩쓸려 하나님을 떠나게 된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다른 세대’가 아니라 이전 세대의 소망을 이어가는 ‘다음 세대’가 될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이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다음 세대가 ‘다른 세대’가 된 것은 10절 말씀처럼 그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다’는 히브리어로 ‘야다(ידע)’이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사사시대라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들이 고통 속에서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찾았을 때 하나님은 사사들을 세우셔서 구원을 경험하게 하셨다. 사사는 재판관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사사는 이스라엘 민족이 곤경에 처했을 때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뭔가를 결정하고, 그 결정을 수행하는 책임을 가진 사람이었다. 기독교가 작아져 보이는 오늘날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사사와 같은 지도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흘러가게 하시는 분이시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모세처럼, 여호수아처럼 한 시대를 이끌었던 신앙의 인물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지도력을 발휘하는 작은 사사들로 살아갈 수 있다. 혼돈의 시대에도 하나님 한 분을 구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삶을 우리는 이어가야 한다. 혼돈과 무질서는 분명 부정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혼돈과 무질서의 현실은 무엇이 진리이고, 질서인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배경이 된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복적인 배신과 고질적인 우상숭배, 그로 인한 혼돈을 보여주는 책이다. 지금 기독교를 벗어난 이 세상도 윤리적인 타락과 가치관의 혼돈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러한 혼돈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배경이 되는 것이다. 바라기는 시대의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 모두가 이전 믿음의 세대의 소망을 이어가는 다음 세대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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