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4년 5월 25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사기 강해 2 옷니엘의 존재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삿 3:9)
‘존재감’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중요시 여기고 나를 필요로 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사람들 속에서 내 존재감을 느낄때 우린 행복을 느낀다. 요즘은 내가 올린 글이나 사진에 달리는 ‘좋아요’ 숫자를 통해서도 우린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려 한다. 내가 올린 이력서를 보고 내가 가기 원한 회사에서 나를 채용하겠다는 연락이 먼저 온다면 나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것이고, 결과적으로 나의 자존감도 높아질 것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존재감 있는 인생으로 살 수 있을까? 오늘은 이스라엘의 첫번째 사사 옷니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가 존재감을 갖게 된 비결을 살펴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감을 갖게 되는 원리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삿 3: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여기에 사사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질적인 문제가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잊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샤카흐(שכח)’다. ‘잘못 놓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그들 인생의 언저리나 그들 인생 밖에 둔 것이다. 하나님을 내 마음의 중심이 아닌 다른 곳에 잘못 놓은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인생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서 축소되거나 사라질 때 그것은 위기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다른 것을 숭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통해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들과 아세라를 숭배했다. 그 우상들이 나에게 풍요와 성공을 가져다 주고, 그 풍요와 성공을 통해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리라 그들은 기대했다. 하나님은 분명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레 26:1) 자기를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내 삶의 바깥에 두고 오히려 우상을 내 삶의 중심에 두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삶이라는 더 높은 부르심에 순종해야 했다. 이것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 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신약시대 우리 모든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요 12: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자기를 위한’ 삶을 포기해야 하는 도전이 있다.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은 결국 자기애에 빠지고 욕망과 우상의 노예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자기를 내어주는 삶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위해 우상을 섬기며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냥 놔두시지 않으셨다. 삿 3: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팔았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리사다임(רשעתים)’은 별명이다. ‘두 배로 사악하다’란 뜻이다. 우상을 섬기는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두 배로 사악한 왕 구산에게 8년 동안 고통받게 한 것이다. 징계를 받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항변할지 모른다. ‘내 인생 그냥 자유롭게 살게 놔두지 왜 이러십니까?’ 자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악한 왕에게 넘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회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리 도망치고, 자기를 위하여 더 많은 우상들을 찾아 다녔을 것이다. 징계는 결국 자기 백성을 돌이키기 위한 하나님의 최선의 조치였던 것이다.
삿 3: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자 이제 여기서 옷니엘이 등장한다.그는 갈렙의 동생 그나스의 아들로 소개된다. 그러니까 갈렙의 조카인 것이다. 옷니엘은 이미 사사기 1장에서 등장한다. 삿 1:12,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하였으므로 갈렙이 그의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기럇 세벨을 점령하는 것이 쉬운 일이었다면 갈렙이 이런 제안을 안 했을 것이다. 기럇 세벨을 점령하기 위해선 갈렙 못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믿음이 요구되었다. 옷니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갈렙과 함께 충성과 믿음으로 정복 전쟁을 감당해 왔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어느 한 순간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평상시 충성과 믿음으로 순종해왔던 사람을 하나님은 중요한 순간에 다시 쓰시는 것이다. 한 방향으로 오래 순종해 온 사람을 하나님은 안 쓰실 수 없는 것이다.
옷니엘의 존재감은 이미 그의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옷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힘’이란 뜻이다. 시대의 트렌드는 자기를 위해 힘을 추구하는 시대였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그 힘이 바알과 아세라에게서 나온다고 믿고, 그 우상들을 섬겼다.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해서 땅과 재산을 늘리며 자기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 당시의 트렌드였다. 하나님과 다른 이웃을 위하는 하나님의 길을 걷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힘과 영향력을 약속하는 우상숭배의 길을 걷는 것이 트렌드였던 것이다. 자기를 위한 삶의 위험은 하나님이 내 삶에 주변인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힘을 부여할 것 같은 다른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시대에 오직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는 정체성으로 산 사람이 바로 옷니엘이었다. 우상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감을 높이려는 시대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안 쓰실 수 없는 것이다.
삿 3:10,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옷니엘이 두 배로 사악한 왕 구산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그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인간적인 힘과 능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기꺼이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바울은 말한다. 롬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옷니엘은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았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이 임할 수 있는 사람을 쓰신다. 하나님의 전쟁은 힘으로 하는 것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을 따라야 승리한다. 우리 인생도 전쟁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싸움을 힘의 우위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하게 되는 전쟁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이 시대에도 악한 영의 세력을 이기며, 자신과 남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 내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거하시게 된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원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의 존재감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이타적으로 사는 사람의 존재감 중 누구의 존재감이 더 높을까? 여기에 삶의 아이러니가 있다. 자기를 위해 존재감을 추구하는 사람보다 남들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내어주는 사람을 사람들이 더 소중하게 여기고 찾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의 존재감이 더 높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존재감을 키우기 위해 더 나은 스펙을 쌓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막 10:42-44,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기꺼이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고, 결국 섬기는 자가 하나님께 쓰임 받으며 더 큰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삿 3:11,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옷니엘이라는 사람이 사사로 있었던 40년간 그 땅에 평화가 임했다. 그의 존재와 영향력이 대단했다. 평상시 충성과 믿음으로 살았던 옷니엘, 자기를 위한 삶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 한 분을 자신의 힘으로 여겼던 옷니엘, 인간적인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살았던 옷니엘을 통해 가나안 땅에 40년간 평화가 왔다. 그런 옷니엘이 죽으면서 사사시대 어둠이 다시 찾아온다. 삿 3:12,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그동안 한 사람의 존재가 시대의 악을 꺾고 평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았던 한 사람을 통해 가나안 땅에 평화가 임했던 것이다. 중국에서 선교사로 살았던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존재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는 무한 경쟁 속에서 힘의 우위를 획득한 사람이 존재감을 가지고 사는 세상인 듯 하다. 힘을 추구하다보니 하나님은 삶의 언저리나 내 삶의 바깥으로 밀려나도 별 상관 없는 세상이 되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사사시대 못지않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시대의 우상들을 섬기는 시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잊고 살아감에도 성공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껴야 한다. 오히려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로 느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이 추구하는 존재감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야 한다. 그러한 존재는 옷니엘처럼 하나님을 나의 유일한 힘으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충성 때문에 늘 순종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따라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전쟁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고,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한 것이다. 바라기는 사사시대와 같이 혼돈스러운 이 세상에서도 옷니엘과 같이 존재감을 발휘하며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