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강해 4 영광의 분배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4년 6월 8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사기 강해 4 영광의 분배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 4:9)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의 첫번째 질문은 “What is the chief end of man?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이다. 그에 대한 답은 이렇다. “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영광의 하나님’에 대한 각별한 인식과 깨달음이 있었다. 교회의 성도들이 ‘영광의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에 온 마음과 힘을 기울일 때, 하나님은 교회와 성도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셨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가 세속적인 욕망에 빠져 ‘영광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 영광을 추구할 때, 교회는 타락했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나눠주신다. 오늘 본문에는 영광을 얻는 사람과 영광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누구에게 영광을 나누어 주시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텔 하솔 입구

4:1-3,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야빈 왕은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사사 시대의 역사는 늘 이런 식으로 반복되었다. 하나님이 사사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안한 삶을 살다가 또 하나님을 잊고 악을 행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의 안일함을 다루실 대적을 그들에게 붙여 고통받게 하신다. 이번의 대적은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이었다. 하솔은 갈릴리 호수 북쪽으로 약 16km 지점에 위치한 도시였다. 하솔은 당시 북쪽에서 가장 강력한 성읍이었기에 ‘가나안의 머리’라고 불렸다. 야빈 왕에게는 그의 군대 장관 시스라가 이끄는 900 대의 철병거가 있었다. 철병거는 히타이트 문명이 가나안 땅에 이식한 철기 문명이었다. 당시 제대로 된 무기가 없었던 이스라엘로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었다. .이 철병거는 2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압제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특히 하솔과 가까이 있었던 납달리나 스불론 지파는 더욱 극심한 압제와 착취를 당했다.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말이 사사기 5장 6절에 나온다. 5:6,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치안이 불안하고 약탈이 심하면 사람들은 큰 길로 다니지 않는다. 얼마나 불안했으면 사람들이 큰 길을 놔두고 오솔길로 다녔을까?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 속에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된다.

4:4, “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하나님은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신다. 원문을 보면 “드보라 이샤 네비아 에세트 랍피돗 히 쇼프타 (דבורה אשה נביאה אשת לפידות היא שפטה)”이다. 드보라가 여성임을 알 수 있는 말이 5번이나 이어진다. 왜 여자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등장하게 되었을까? 사사기 5장 7절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5:7,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여기서 ‘마을 사람들’로 번역된 ‘페라존(פרזון)’은 원래 ‘관원, 장관’이란 뜻이다.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 아래서 이 상황을 역전시킬 만한 남자 지도자가 없었다는 말이다. 어려운 시대 일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에만 골몰한다. 자기를 희생하며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사라진다. 이 상황에서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어미가’가 되기를 결단한다. 이스라엘 자손의 어머니가 되어 그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결단이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한 아이의 성장을 위해 내 인생을 내어주겠다는 결단이다. 더군다나 한 민족의 어미가 되겠다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한 삶을 포기하겠다는 결단이다. 5:12,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이것은 드보라가 지은 시이다. 드보라는 자신을 향해 네 번이나 ‘깰지어다’라고 선포한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전쟁은 이처럼 한 여인의 깨어남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한 여인의 깨어남이 민족의 구원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깨어남은 노래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함이다.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하여 드보라는 자신을 향하여 깨어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다볼산

4:6-7,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드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선지자였다. 그녀는 그가 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바락에게 전한다. 그것은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서 전쟁을 준비하라는 명령이었다.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그의 손에 넘겨주겠다는 약속이 따른 명령이었다. 해발 588m인 다볼산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군사들이 집결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런데 바락은 이렇게 반응한다. 4:8,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바락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드보라가 전쟁터에 함께 가야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기에 바락은 드보라가 전쟁의 현장에 있길 원했던 것 같다. 어째튼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건 담대한 순종을 하지 않았다. 이에 드보라가 말한다. 4:9,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드보라는 바락이 이번 전쟁에서 영광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영광은 히브리어로 ‘티프아라(תפארה)’이다. 이는 ‘제단 위에 나무를 벌여 놓다, 준비하다’란 뜻의 ‘아라크(ערך)’에서 유래된 말이다. 제단 위에 벌여 놓은 나무와 같이 하나님을 위해 준비된 모습이 아름답고 영광스럽다는 의미다. 이는 사람에게서 받는 세상의 영광과는 다른 차원의 영광이다.

결국 이스라엘과 하솔 왕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이 결코 이길 전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드보라는 이렇게 선포한다. 4:14,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강한 남자’ 바락은 그의 강함으로도 도무지 시스라를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약한 여자’인 드보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던 자였고, 그가 받은 음성으로 ‘강한 남자’ 바락을 움직였다. 4:14-15, “이에 바락이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어떻게 이스라엘이 이길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셨기 때문이다. 드보라는 승리 후에 이렇게 노래한다. 5:20-21,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기손 강은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기손 강은 강이라 영혼아 네가 있는 자를 밟았도다 기손강은 나할이었다. 우기에는 범람하는 강이 되지만 건기 때는 물이 없어 평원이 되는 곳이다. 하나님은 이 기손강에 모여 있는 시스라의 철병거 군대에 엄청난 폭우를 내리신 것이다. 평원이었던 강 주변이 갑작스런 폭우로 진흙창이 되자 철병거가 쓸모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바락의 급습으로 시스라의 군대는 전멸하고 시스라만 걸어서 도망하게 된다. 그가 어디로 갔을까?

4:17,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하여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솔 야빈과 사람 헤벨의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전쟁은 대장이 죽어야 끝난다. 그런데 시스라는 살아서 겐 족속에게 도망친다. 그가 그리로 피한 것은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 사이에 평화 조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헤벨의 아내 야엘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자신이 누구를 위해 행동해야 할지 알았다. 그는 시스라를 영접하며 이불을 덮어준다. 그리고 물을 달라는 그에게 우유를 갖다 주어 마시게 한다. 우유를 마시면 잠이 잘 온다. 우유도 마시고, 이불도 덮은 시스라는 곧바로 잠에 떨어진다. 4:21, “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여자들이 무섭다. 고대 근동에서 장막을 세우는 일은 주로 여자들이 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들이 망치로 말뚝을 박는 것은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야엘은 너무도 익숙한 솜씨로 말뚝을 시스라의 머리 관자놀이에 박은 것이다. 이후 바락이 그곳에 도착하지만, 이미 전쟁을 종결시킨 영광은 야엘이란 여인에게 돌아간 뒤였다.

전쟁이 끝난 후 드보라는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전쟁에 참여하거나 참여하지 않은 지파에 대해 언급한 점이다. 5:14,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들은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이요 베냐민은 백성들 중에서 너를 따르는 자들이요 마길에게서는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내려왔도다에브라임 지파 중에서는 아말렉에게 뿌리 박힌 자들이 전쟁에 참여했다. ‘아말렉에 뿌리 박은 자들’이라는 것은 아멜렉 족속이 거주했던 지역의 사람들이란 뜻이다.고통받은 자들은 고통받는 자들의 처지를 안다. 아말렉에게 괴롭힘을 받았던 에브라임 사람들은 가나안 왕 야빈에 의해 고통받는 다른 지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전쟁에 자원해서 참여했던 것이다. 베냐민 지파도 전쟁에 참여한다. 그들은 하솔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에 살았기 때문에 일개 지파 차원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 듯 하다. ‘마길’은 므낫세의 독자인데, 여기선 요단 서편에 정착한 므낫세 반 지파를 의미한다. 이 지파에서는  ‘명령하는 자들,’ 곧 군대 지도자급들이 참전했다.스불론 지파에서도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참전했다. 5:15-16,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과 같이 바락도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서 결심이 있었도다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르우벤 시냇가에서 결심이 있었도다잇사갈 지파에서도 지도자급 인사들이 참전했다. 자 그런데, 문제는 르우벤 지파부터다. ‘큰 결심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전쟁에 참여할 지 안 할 지에 대한 많은 토론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들은 토론만 하다가 직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당시 르우벤 지파는 다른 지파들 보다 많은 가축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의 나팔 소리를 듣는 대신 목자들의 피리소리를 들으며 사는데 만족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안정을 지키고 누리느라 형제 지파의 고난을 외면했던 것이다. 5:17, “길르앗은 요단 저쪽에 거주하며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여기서 길르앗은 요단 동편의 므낫세 반 지파를 말한다. 그들은 요단 동쪽에 거주한다는 명분으로 서쪽 지파들이 겪는 고통에 무관심했던 것이다. 단 지파는 당시 욥바 항구를 중심으로 무역을 하면서 돈 버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배에 머무르며 자기 일을 하느라 공동체가 함께 싸워야 할 전쟁의 의무를 외면했던 것이다. 아셀 지파도 상황이 비슷했다. 이들 역시 해변지역에 거하며 자기 만족적인 삶을 누리느라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것이다.

사사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정복 전쟁을 감당해야 하는 시대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땅을 나눠 주신 것만이 아니라 그 땅을 정복하는 소명도 함께 주셨다. 그런데 그 소명은 어느 한 지파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함께 연합하여 싸워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개개의 지파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임을 기억하고, 필요 시 함께 연합하여 전쟁에 참여해야 했던 것이다. 결국 르우벤지파, 요단 동편의 므낫세 지파, 단과 아셀 지파는 안락하고 자기 만족적인 삶을 추구하느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전쟁을 외면했다. 반면 스불론과 납달리는 이런 칭송을 받았다. 5:18,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여기서 ‘아끼지 않았다’는 히브리어로 ‘헤레프(חרף)’다. ‘위태롭게 하다, 무시하다’란 뜻이다.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는 죽기까지 자신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생명의 위협도 무시했다. 그것은 자신들이 이방의 압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드보라의 찬양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한 지파들에게 영광이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영광의 분배는 땅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대의에 어떻게 헌신했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고전 15:40-41,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영광의 분배는 하나님의 몫이다. 특히 하늘에 속한 영광은 우리 인간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각자에게 나누어 주시는 영광의 크기도 다르다. 여러분은 하늘의 속한 영광을 구하고 있는가? 땅에 속한 영광을 구하고 있는가? 땅의 영광을 구하느라 내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헌신과 공동체와 함게 해야 할 전투를 외면하고 있진 않은가?

구원 이후 우리 성도들의 영적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작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는 사탄이 무저갱에 갇힐 때까지 사탄의 세력을 무력화 시키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함께 싸워야 할 공동체인 것이다. 내 삶의 번영과 나의 관심사에 매여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전쟁에 동참해야 할 때 그것과 무관한 자로 산다면 우리는 장차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 받을 영광이 없다. 우리 삶의 목적은 이 땅에서 평안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땅을 차지하고 나의 영광의 성을 쌓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우리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드보라처럼 우리 자신을 향해 “깰지어다”라고 외쳐야 한다. 이 땅에서의 번영과 영광이 신기루임을 깨닫고 속히 그 환상에서 깨어나도록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 역시 사사시대 못지 않게 큰 길로, 정도(正道)로 다니는 사람들이 사라진 시대이다. 사회를 정의롭게 이끄는 남성 리더십이 사라진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기도하고 중보하는 어머니들이 일어나야 한다. 기도하는 어미는 세상 어떤 권력자보다도 강한 것이다. 우리 자매님들, 드보라처럼 기도하는 어미가 되길 축원한다. 우리 형제님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쟁에 참여하는 전사가 되길 바란다. 오랜 싸움을 마치고 영광의 배분이 있게 될 때 하나님 앞에서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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