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강해 5 300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4년 6월 15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사기 강해 5 300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 7:7)

숫자가 주는 안정감이 있다. 내가 받는 연봉의 숫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높다면 나는 상대적으로 안정감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숫자가 주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 나의 원수가 갖고 있는 무기와 군사의 수가 훨씬 많다면 나는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오늘 사사기에는 300이란 숫자가 나온다. 이것은 안정감을 주는 숫자였을까, 아니면 불안과 두려움을 주는 숫자였을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6:1-2,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사사 드보라의 시대가 끝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다시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진다. 이번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칠 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넘기신다. 미디안 족속은 사막의 바이킹이었다. 이들은 아라비아 사막에 사는 유목민들인데, 낙타부대를 앞세워 가나안 일대를 약탈하곤 했다. 이들로 인해 당시 이스라엘 온 땅을 지배했던 건 두려움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산 여기저기에 굴을 파고 살았다. 미디안 사람이 없을 때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농사를 짓다가, 미디안이 쳐들어 오면 동굴 안으로 피하면서 사다리를 걷어 올리는 일을 반복했다. 이스라엘은 이 미디안 족속으로 인해 삶이 궁핍해졌다. 추수만 하면 쳐들어와 곡식을 다 가져가니 극단적인 가난에 몰렸고, 그 결과 그들은 괴로워 하나님께 부르짖게 된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자를 기드온에게 보내신다.

6:11-12,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여호와의 사자가 “큰 용사여”라고 기드온을 불렀을 때 기드온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밀 타작은 보통 소나 노새가 타작기를 끄는 넓은 타작 마당에서 한다. 그러나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조용히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던 소심한 남자였다. 그에겐 미디안 사람들에게 약탈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며 풍요한 삶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7년간의 약탈이었다. 이에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질문한다. 6: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사람들은 흔히 내 인생에 문제가 생기면 그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냐고 따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에 의해 약탈 당하고 궁핍해진 건 하나님이 안 계셔서 생긴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찾아온 결과였다. 미디안은 하나님의 권징의 도구였던 것이다.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궁핍을 겪게 된 진짜 이유가 그들의 우상숭배의 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전 그의 집에 있는 바알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 내라는 명령을 하신다. 아버지의 집에 바알 제단이 있었다는 건 그의 아버지가 바알 제사장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집에서 자란 기드온도 어떤 영향을 받았을 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기 전 먼저해야 할 일은 우상의 제단을 헐고 바알 신앙을 끊어 내는 것이었다. 기드온(גדעון)의 이름의 뜻은 ‘벌목꾼’이다. 이는 ‘가다(גדע)’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이다. ‘가다’는 ‘나무를 베어 내다, 자르다’ 라는 뜻이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에서 아세라 상을 찍어 내고, 바알 신앙을 잘라내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었다. 소심한 그는 대낮에 그 일을 하지 못하고, 밤에 바알의 제단을 무너뜨린다. 어찌되었건 그는 이 일로 ‘여룹바알’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바알이 그와 다툴 것이라’는 뜻이다.

6:33, “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여룹바알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급부상하고 있었던 그 때 미디안 족속이 쳐들어온다. 그들은 아멜렉과 동방 족속들과 함께 요단 강을 건너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다. 몇 명이 왔을까? 사사기 8장 10절에 의하면 모두 13만 5천명이다. 이들이 진친 이스라엘 골짜기는 이스라엘의 곡창지대인 이스르엘 평원이다. 밀수확이 가장 많은 이곳을 털려고 미디안이 군대를 대동하여 쳐들어 온 것이다.

6:34-35,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기드온이 사자들을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이 때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한다. ‘임하다’는 히브리어로 ‘라바쉬(לבש)’인데, 이는 ‘옷 입히다’는 뜻이다.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은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성령의 옷을 입혀주시면서 그를 강하게 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영으로 옷을 입은 기드온은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행동한다. 그는 쇼파르를 불어 군대를 소집한다. 이에 아셀과 스블론과 납달리 지파에서 3만 2천명이 모인다. 13만 5천 대 3만 2천은 4.5대 1의 싸움이다. 여전히 숫자적으로 불리하긴 하지만 그래도 대항해 볼 만한 수였다. 그들이 진 친 곳은 하롯샘이었고, 미디안이 진친 곳은 모레 산 앞 골짜기였다. 7:1,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골짜기에 있었더라우리는 이들이 진 친 장소의 이름에서 여호와의 전쟁의 의미와 성격을 유추해볼 수 있다.

하롯샘

하롯샘은 길보아산이 시작되는 서쪽에서 나와서 요단강으로 흐르는 샘이다. 지금도 분당 6톤의 물이 솟아나는데, 물 맛이 달다. 그런데 샘 이름인 ‘하롯(חרד)’은 ‘하라드(חרד)’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하라드’는 ‘두려워하다, 흔들다, 떨다’라는 뜻이다. 초정통 유대인들을 ‘하레디(חרדי)’라고 부르는데, ‘하레디’는 ‘두려워 하며 떠는 자’라는 뜻이다. 이 역시 ‘하라드’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들은 기도할 때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기도한다. 성전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 떨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몸을 흔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하롯샘에서 기드온에게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전쟁에 승리했을 때 그들이 스스로 자랑하며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라고 생각할 것을 염려하셨다. 그래서 이런 명령을 내리신다. 7: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명이었더라두려움은 전염성이 있다. 군대의 숫자가 많아지면 두려움이 없어질 것 같은데, 하나님이 두려움을 제거하신 방법은 오히려 군대의 수를 줄이는 것이었다. 사람의 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만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들이 수행한 전쟁의 본질은 미디안 군대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두려움을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 한 분을 향한 두려움을 회복하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미디안과의 전쟁은 하나님이 소집하신 전쟁이었다. 그래서 미디안의 군대 때문에 아직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소집한 전쟁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מי ירא וחרד)’ 2만 2천 명을 돌려보내게 하신다. 그래서 철저히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할 만 명만 남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에는 이 숫자도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 만 명을 테스트하게 하셨다. 그들이 하롯샘의 물을 마시게 하고, 물을 무릎 꿇고 벌컥벌컥 마신 사람을 탈락시키셨다. 그리고 손으로 떠서 물을 핥아 마신 사람 300만 남기신다. 하나님 눈에는 이 300명이 미디안 군대 때문에 두려워 떠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여호와의 전쟁에는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 대신 하나님 한 분을 철저히 경외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두려움의 샘, 하롯샘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 때문에 두려워하며 떠는 300명의 용사가 탄생한 것이다.

미디안 족속은 모레산에 진을 쳤는데, 모레산의 ‘모레(מורה)’는 ‘야레(ירה)’에서 파생된 말이다. ‘야레’는 ‘겁을 내다, 두려워하다’란 뜻이다. 기드온의 300용사가 세워진 그 즈음에 미디안 족속은 기드온으로 인해 겁을 내고 있었다. 이제 13만 5천 대 300명이니까 450대 1의 싸움이다. 그럼에도 겁을 먹고 있는 쪽은 오히려 미디안 족속들이었다. 그런데 소심한 기드온에게는 여전히 450대 1의 싸움이 버거웠던 모양이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이런 제안을 하셨다. 7:9-10, “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부하 부라와 함께 진영으로 내려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하나님은 기드온 안에 남아 있는 일말의 두려움까지 다 해결하기 원하셨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미디안 진영에 내려가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고 하셨다. 기드온은 그곳에서 미디안 병사가 나누는 꿈이야기를 듣게 된다. 7:13, “기드온이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장막이 쓰러지더라여기서 보리떡 한 덩어리는 히브리어로 ‘쩰롤 레헴 쎄오림(צלול לחם שערים)’이다. 쩰롤을 ‘덩어리’로 해석했는데, 아랍어 어원은 ‘말라 비틀어진’이란 뜻이 있다. 말라 비틀어진 보리떡은 기드온의 자화상이었다. 기드온은 이어서 이 꿈의 해석을 듣게 된다. 7:14,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말라 비틀어진 쓸모없는 보리떡이 미디안의 장막을 무너뜨리는데 그것은 곧 ‘기드온의 칼’이라는 해석이었다. 이 말을 들은 기드온의 마음이 어땠을까? 온 몸에 소름이 끼치면서 ‘미디안과의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구나, 하나님이 내 손에 칼을 쥐어주셨구나’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정확한 타이밍에 기드온이 이 말을 듣게 하심으로 그에게 남아 있던 두려움을 다 제거해 주셨다. 여호와의 전쟁은 결코 수의 싸움이 아니었다. 기드온이 해야 했던 전쟁은 먼저 그 안에 있던 바알 신앙을 스스로 제거하고, 또 그 안에 남아있던 두려움을 제거하는 싸움이었다.

기드온이 준비되자 전쟁이 시작되었다. 7:18,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전쟁 나팔이 울려퍼지자 450대 1의 전쟁은 순식간에 결판이 났다. 7:22, “삼백 명이 나팔을 때에 여호와께서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싯다에 이르고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하롯샘과 모레산에서 있었던 전쟁은 결국 누가 누구를 두려워 했느냐의 싸움이었다. 처음 미디안을 두려워 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끄심을 통하여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하는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들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얕잡아 봤던 미디안 군대는 하나님의 간섭을 통해 기드온과 그의 군대에게 겁을 먹게 되었다. 이처럼 여호와의 전쟁의 본질은 숫자와 군사력의 싸움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우상과 거짓 두려움을 제거하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참된 두려움을 회복했을 때 이기는 싸움인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회복한 자에게 그분의 임재의 장막을 펼치신다. 승리의 칼을 쥐어 주신다. 볼품없는 보리떡과 같았던 기드온도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회복했기에 그가 민족을 구원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 전쟁에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하는 자로 내가 그 분 앞에 서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두려움이 많아지는 시대다. 세상의 수치와 순위 앞에서 너무도 자주 내가 보잘 것 없는 존재로만 여겨지기 쉬운 시대를 우린 살고 있다. 두려움은 우리가 그것에 사로잡히면 위축될 수 밖에 없는 거짓 감정이다. 영적 전쟁은 내가 상대보다 객관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에 승리하는 싸움이 결코 아니다. 내 안에 우상이 꺾이고 두려움이 제거되었을 때 비로소 승리하는 싸움이다. 영적 전쟁은 하나님 한 분을 향한 두려움과 떨림을 회복했을 때 거둘 수 있는 승리인 것이다. 예수님은 권세자들의 핍박을 경험하게 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지금 이 세상은 더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듯 하다. 이런 세상에서 영적인 약탈이 난무하고 사람들은 궁핍함으로 신음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서 두려움으로 동굴에 숨는 자가 아니라 참된 두려움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가 되야 한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러분을 통하여 이 땅을 약탈하기 위해 세워진 미디안의 장막들이 무너지게 되길 축원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존재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세대가 일어나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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